104화 정령 (3)
정령이 소멸했던 자리에 남은 자그마한 수정.
베르덴이 염력으로 들어 올려 가까이 끌어당겼다. 녹색의 빛이 그의 청안에 반사됐다.
‘이게 뭐지?’
외형은 마석과 비슷한데, 그 특유의 마력이 전혀 없었다.
느껴지는 거라곤 자연에 존재하는 마력뿐. 그것도 한 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물건에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버민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이거 정령석이군요!”
정령석?
처음 듣는 명칭이다. 그래도 마력이 있는 걸 보면 마석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생소한 이름만큼, 어쩌면 희귀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베르덴이 기대감을 품었다.
하지만 버민의 다음 말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연적인 마력을 품고 있는 돌인데, 딱히 쓸모는 없어요. 마석과 달리 세공이 불가능해 마법 물품 재료로도 쓰지 못하니까요. 정령에게서 나오는 만큼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데 수요조차도 없죠. 장식품으로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너 아까부터 되게 잘 안다? 정령에 대해 공부라도 했어?”
“막 모험가 입문했을 때, 모험가 추천 서적들을 읽고 다녔거든. 그중에 정령 얘기도 있었지. 나도 엄청 자세한 건 몰라. 그냥 겉핥기식으로 본 거라.”
버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덧붙이자면 정령석은 자연의 마력을 흡수해 부활한다는 얘기가 있어.”
케디언이 물었다.
“부활 말입니까?”
“아, 그런데 당장은 아니고. 한 수십 년은 지나야 한다나? 자연적인 마력을 모아야 하는데, 이게 인위적으로 불가능하거든.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그렇게 깨끗한 마력을 가지고 있겠어? 그래서 옛날에 어떤 마탑이 실험했다가 금방 버렸다고 하더라고.”
버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굳이 용도가 있다면…… 엘프가 비싸게 구입한다고 듣긴 했는데.”
“엘프라면…… 그 악명 높은 엘프 말이오?”
자연의 주민, 엘프(Elf).
드워프와 같은 인간종 중 하나로, 긴 귀와 하나같이 미려한 외모가 특징이다. 베르덴 또한 마탑에 있을 시절, 책으로 접해 본 적이 있는 종족이었다.
분명.
“인간이 가장 건드리지 말아야 할 종족이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 엘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무서운 종족이죠.”
엘프는 개인이 아닌 절대적인 집단주의 사상을 가진 종족이다
한 개체가 위험에 빠진 걸 지각한 순간 엘프들은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동족을 구해 낸다. 몇몇 엘프는 동족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엘프에 대한 사례는 너무나 유명하다.
남녀 할 것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어, 과거의 인간들은 엘프를 노예로 삼으려고 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멋모르는 노예 상회가 엘프를 납치했고, 귀족에게 팔았다. 아주 비싸게. 그 가치를 눈으로 본 탐욕스러운 자들은 곧바로 엘프 사냥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엘프를 사냥하러 간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로부터 얼마 후 노예를 납치한 상회가 전멸했다. 그곳을 방문한 손님마저 살아남지 못했다.
또한 귀족 가문도 몰살당했다. 귀족도, 기사도, 하인도 전부.
그들의 시체는 잔혹하게 난도질당해 숲에 걸렸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엘프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 틈에서 확산되었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서 엘프를 토벌하겠다고 나섰죠. 자국의 귀족이 죽었으니 명분도 있었고요. 그렇게 전쟁이 벌어졌는데…….”
“국가가 말라 죽어 버렸지.”
어떤 종족보다도 은밀하며 사냥에 특화된 엘프에게 도시로 향하는 모든 물자들을 파괴당했으니.
아무리 강자를 호위로 세워 놓아도 소용없었다. 상대는 엘프 종족 전체. 개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이었다.
“국가 규모로 치면 소국이긴 했지만…… 그 파장은 꽤나 컸다고 하죠.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으니까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대륙 남쪽 대수림(大樹林)에 있는 엘프들.
그 사건 이후로 머리에 화염구라도 맞지 않는 이상, 그들을 해코지할 인간은 없었다.
루비나가 버민에게 물었다.
“그래서 엘프가 정령석을 왜 비싸게 사는 건데?”
“나도 몰라. 내가 동 등급 모험가일 때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거라서. 확실하지 않으니 믿을 건 못 돼. 그런데 억지로 연결하면 이런 게 아닐까? 엘프는 자연의 주민이고, 정령도 말하자면 비슷한 부류니까…….”
“둘이 공생 관계란 말입니까?”
“그렇지. 어쩌면 여기에 정령이 있는 이유도 엘프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고.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잖아. 정령이 난데없이 우리에게 오더니 화를 낸 것도 그렇고. 인간을 싫어하는 게 아니면 누가 해코지라도 한 거겠지. 정령 본인이거나 아니면 엘프에게.”
“그 말은…… 왕국의 누가 엘프를 납치라도 했다는 말이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모험가들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이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미치지 않고서야 엘프를 납치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오.”
“거기다 대수림이 얼마나 먼데. 사실이라고 해도 오기 전에 분명 엘프한테 걸려 죽었을걸?”
그 의견은 베르덴도 동의했다.
정령이 있는 건 이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엘프하고 연관 짓는 건 비약이 심했다.
“그럼 잡담은 이쯤 하고. 그 정령석은 애셔가 가지시오. 정령을 토벌한 건 본인이니까 말이오. 물론 그건 분배될 보수에 포함하지 않을 거니까 안심하시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해야지. 그나저나 당분간 슬론의 깊은 숲에 올 이유는 없겠소. 분노한 정령이 불러 모은 놈들이 죄다 죽었으니까 말이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죽긴커녕 팔다리 하나 잃은 사람이 없다니 천만다행이군.”
모험가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건 전적으로 베르덴의 덕분이었다.
스칼드가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피로가 담겨 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아세른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군.”
* * *
지형을 조작해 사체들을 묻거나 분산했다.
그렇게 많은 사체가 깊은 숲속에 방치되어 부패된다면 언데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웬만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그렇게 아세른에 돌아간 후 곧바로 보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결과 받은 금액은 총 3억 8천만 엘크. 베르덴이 스칼드와 서로 합의한 보수였다.
기본급의 9배가 넘는 액수였지만 결코 과하다곤 볼 수 없었다. 정령 토벌도 그렇지만, 그 10배가 되어도 미스릴 등급 파티의 목숨값에 비할 건 아니었으니.
다행히 모험가 길드에서 보고를 받고 추가 보수를 내려 줬기에, 모험가들도 적자는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연스레 페르네에게 지불되는 수수료도 상향 조정 되었다.
“헤헤, 이게 대체 얼마야?”
페르네는 진심으로 좋아 죽었다.
고작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도와준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어느새 그녀의 정보상은 과거의 형태를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물론 아직 멀었지만 너무나도 좋은 시작이었다.
애셔. 페일이 소개해 준 그 마법사 한 명만 있다면…… 어쩌면 전보다도 더 잘나가게 될지도 몰랐다.
본디 정보상에게는 주변을 기웃거리며 대충 보수를 타 먹을 어중이떠중이 수백 명보다, 실력이 뛰어난 한 사람의 존재가 더 중요했으니.
‘그러니까 지금은 투자를 할 때야.’
페르네는 지금까지 들어온 돈의 대부분을 정보망 구축에 쏟아부었다.
빚을 청산하는 것도 좋긴 하다. 적어도 불안에 떨며 살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페르네는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돈을 빌리지도 않았겠지. 빚은 이자 및 원금 일부 상환으로도 충분하다.
‘지금은 최대 고객인 애셔에게 잘 보여야 돼.’
페르네가 보는 그는 주체적이며 능동적이었다.
말은 안 하지만 자신만의 계산을 통해 리스크와 보상을 저울질하며 판단해 움직이는 걸로 보인다.
즉, 지금 그가 닥치는 대로 의뢰를 처리해 페르네를 돕는 것은, 단순히 보수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의 가치가 더욱 무거워서 그런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에게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럼 끝장이야.’
저울이 반대로 기울어진 순간 곧바로 페르네를 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그가 보여 준 성의만큼, 페르네 또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할 때다. 그녀에게 기울어진 저울이 넘어가지 않도록 추에 무게를 더해야 한다.
“절대 놓칠 수 없어.”
눈을 번뜩인 페르네가 바쁘게 움직였다.
* * *
무언가를 연구한다는 건 그것에 대해 깊이 조사하고 진리를 따지는 것.
지금의 세상은 연구의 결과물로 가득 차 있다. 강철을 두드리고 담금질하여 만든 장비도, 마법적 효과를 지니고 있는 마법 물품도, 심지어 강철은 단단하다는 기본적인 특성 또한 연구의 산물이다.
정령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느 때처럼 훈련을 마친 베르덴은 그에 대해 고민했다. 아무리 쓸모가 없다 하지만 자연의 마력이 담겨 있는 희소품인 만큼, 한때 연구원으로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연구를 해 보기로 결정했다.
물론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서야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니까. 그렇기에 가능한 효율적으로 연구를 하기 위해, 정령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게 우선이었다.
결심한 베르덴은 곧장 아세른의 서점들을 방문했다.
[무서운 이형종 모음]
[모험가가 피해야 할 괴물 40선]
[숲은 위험하다]
...정령에 관련되었다 싶은 책을 찾아 전부 구입했다.
그래 봤자 몇 권 되지는 않았다. 속독하면 새벽이 오기도 전에 전부 읽는 게 가능하겠지.
‘여기가 마지막 서점인가.’
안으로 들어가 책장을 뒤적거렸다.
이미 구입한 책의 제목들이 가득했다. 그러다 책장 구석에서 헌 책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건드리지도 않았는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숲의 친구]
어린이 동화 같은 제목.
책장을 열어 가볍게 목차를 훑었다. 다른 책들과 비슷한 내용이었으나, 마지막 목차에 시선이 끌렸다.
‘엘프와 정령.’
여타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당장 읽고 싶었지만 서점 주인이 지켜보고 있다. 책을 구입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읽고 가 버리는 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었다.
“이거 주시죠.”
서점을 나서는 베르덴의 공간가방에는 오래된 책이 담겨 있었다.
* * *
바깥에서 저녁을 먹은 베르덴이 고급 여관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씻고 난 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베르덴이 책상 앞에 앉았다. 서점에서 구입한 책들을 쌓아 놓고 하나씩 읽어 나갔다.
사락. 사라락.
베르덴의 손과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문장 하나하나 모두 읽을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정령에 대한 정보뿐이니.
한 권, 두 권…….
다 읽은 책들이 바닥에 쌓여 갔다.
다만 아직까지 베르덴에게 확 와닿는 지식은 없었다.
정령의 생태나 종류와 같은 겉핥기식 정보들. 그런 내용에 대한 반복일 뿐이다. 첵 제목만 다르지, 그 안에 담겨 있는 정령에 대한 내용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건 장작으로도 못 쓰겠어.’
객관적인 지식 대신 주관적인 사족이 가득 담긴 쓰레기 같은 책을 던져 버리고, 다음 책을 찾았다. 마지막 권이자 가장 오래된 책이었다.
먼지를 툭툭 털고 독서를 시작했다. 다른 책보다 더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긴 하나 정령에 대한 내용은 적었다.
빠르게 넘기자, 이내 마지막 목차에 다다랐고, 첫 장을 넘겼다.
[정령에게는 지성이 존재한다.]
그 문구는 베르덴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베르덴은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지성체인 정령은 의사 표현이 가능하며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 분노한 정령 등 여러 객관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니 꽤나 신빙성이 있었다.
다만 실제로 어렵사리 정령을 포획해 실험했지만, 확신할 만한 결과물은 얻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 반발이 심해서 도저히 진행이 되지 않아 결국 전부 실험 자체가 폐기되었다고.
버민이 말했던 것과 비슷한 사례였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건 좀 아쉬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목차에 써 있던 엘프와 정령에 대한 이야기.
책은 자연의 종족인 엘프와 자연의 마력을 품고 있는 정령의 연관 관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는데, 실제 사례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누군가의 주장과 저자 본인의 의견을 섞은 내용으로 가득했다.
[엘프는 자연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며, 정령은 자연의 마력을 통해 부활한다.]
[일부 엘프는 정령과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는 목격담이 있다.]
[엘프 또한 마력은 지니고 있으나, 인간과 달리 자연적인 마력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엘프는 알려진 종족 중에서도 가장 수명이 길다. 그들의 문화에선 죽음은 곧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정령처럼.]
...그리고 결론은 이러했다.
[엘프는 정령과 ‘친구’일 가능성이 높으며, 엘프가 가진 힘은 정령에게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본 베르덴은 뒤로 책을 던졌다.
“괜찮다 싶었는데 이것도 쓰레기였군.”
정령과 엘프의 유사성에 대해 설명했지만, 둘이 연관되었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었다.
그저 추측만 난무했고 추측으로 결론을 지었을 뿐이다. 엘프와 정령을 어떻게든 연결하려 하는 게 훤히 보인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저 책은 지식이 담겼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하나의 사견에 불과하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정령석을 꺼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자연의 마력이 담겨 있다. 다시 보니 전보다도 마력이 더 차오른 듯하다. 그래 봤자 손톱만큼도 되지 않았지만.
‘정령이 부활한다라…….’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베르덴의 뇌리에 스쳤다.
자연의 마력은 곧 한없이 정순한 마력을 뜻한다. 그리고 정령은 그걸 흡수해 부활한다. 애초에 정령이란 것이 자연의 마력으로 이루어졌으니까 납득할 만한 이치였다.
‘그럼 내 마력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역천을 통해 얻어 낸 마력.
정순함만 따지면 객관적으로 봐도 자연에 존재하는 마력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건…….
이거, 실험해 볼 가치가 있다.
베르덴은 정령석을 손에 쥐었다.
주저하지 않았다. 연구원으로서의 호기심도 그렇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곧바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 설령 정령이 부활한다고 해도 마력 위압으로 제압하면 그뿐이다.
이윽고 베르덴이 마력을 주입했다.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정령석.
이내 터져 나온 푸른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