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정령 (2)
바닥을 기어 다니는, 맹독을 품은 거대 지네.
굴강한 육체로 전부 들이받아 버리는 마수, 마흐바트.
단단한 발톱과 깃털로 나무를 타고 움직이는 아울 베어.
한번 정한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 레드 리자드 등.
이와 같이 위험도가 어느 정도 높은 괴물이 가득했다.
슬론의 깊은 숲에 있는 아인종과 마수는 죄다 몰려든 모양. 거기다 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지면.
흙이 솟구치더니 거대한 형태를 갖추었다.
버민의 눈이 화등잔같이 커졌다.
“이런 미친…… 무슨 골렘까지 나와?!”
흙으로 구성된 골렘.
과거에 베르덴이 상대했던 골렘보다는 약하지만, 매개체를 없애지 않으면 죽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더해서 눈앞에 있는 골렘은 하나가 아닌 두 기였다.
케디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거 위험하군요.”
골렘을 무력화하려면, 정령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당장 정령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도망가기엔 숫자가 너무 많았다. 궁지에 빠져 버렸다.
“버민, 정령 좀 어떻게 할 방법 없어?! 약점이라든가!”
“야, 약점? 잠깐, 일단 생각을 좀……!”
“온다! 모두 준비하시오!”
어느새 놈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더 이상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무거운 긴장감 속에서 모험가들이 무기를 꽉 쥐었고, 고블린 하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든 순간.
<선풍의 장막>
거센 바람이 베르덴과 모험가들을 감쌌다.
날아간 고블린이 골렘과 부딪혀 머리가 으깨졌다. 뒤이어 접근한 놈들도 마찬가지. 이곳에 모인 골렘과 아인종 및 마수가 달려들었으나 선풍의 장막을 뚫을 수 없었다.
스칼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건…… 5위계 마법이 아니오?”
“마법 물품 효과입니다.”
“아, 그렇군. 어쨌든 덕분에 살았소. 하지만…….”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버민이 뭔가 생각난 듯 다급하게 베르덴에게 물었다.
“이 마법,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죠?”
“3분 정도 됩니다.”
“3분이라…….”
대답을 곱씹던 버민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정령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알고 있어요. 한 번 힘을 쓰면 긴 휴식기를 가진다고. 그러니 시간을 끌면 정령은 무력화되겠지만…… 아무리 적어도 30분은 끌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건 무리요. 제자리에서 버티는 건 당연히 안 될 테고, 각자 흩어진다면……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멀쩡하지는 않겠지.”
“정령을 토벌할 방법은 없습니까?”
베르덴의 물음에 버민이 답했다.
“정령의 실체를 벨 수 있을 정도로 기를 웅축하면 되는데, 우리 중에 기를 그만큼이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남은 건 마법인데…… 정령은 마력으로 이뤄진 이형종이라, 마력 저항력이 엄청 높아서 5위계 마법 정도는 돼야 하죠. 그것도 숲의 정령의 약점 속성인 화염 마법으로요. 저희로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화염 마법이라…….”
베르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령은 토벌이 가능하다.
성신 마법 중 하나만 쓰면 지금 상황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쓸 순 없다.’
유성은 당연하고 혜성 또한 마찬가지.
성신 마법은 베르덴의 비장의 수단이다. 함부로 패를 타인에게 보이는 건 꺼려진다. 특히나 여러 지역을 오가는 모험가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베르덴은 타인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럼 남은 건 합성 마법인가.’
4위계 마법이라 해도, 속성을 합성하면 5위계 이상의 위력을 내는 게 가능하다. 일격에 죽이지 못한다고 해도 정령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있을 터.
다만 문제는 모험가들이다.
아무리 연산 능력이 빠르다고 해도, 몇 초 동안은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데 마수와 아인종이 거슬린다.
그렇다고 광범위 마법 폭격을 가하자니 모험가들이 방해된다.
모험가들은 죽으면 안 된다.
보수를 줄 사람이 사라지니까. 거기다 베르덴만 살아남는다면 앞으로의 의뢰 수행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정령 토벌과 만하의 생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그러면 되겠군.’
방법이 떠올랐다.
베르덴이 고뇌에 빠진 모험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 * *
베르덴의 작전을 들은 스칼드가 턱을 쓰다듬었다.
“시선을 끌라고? 그건 어렵지 않소만…….”
문제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느냐.
버민과 스칼드는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지만, 루비나와 케디언은 위험하다. 그러자 둘이 고개를 저었다.
“내 몸은 내가 간수할 수 있어. 나 몰라?”
“신성 보호막으로 몸을 지키면 됩니다. 범위를 저 하나로 축소한다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동의했다.
스칼드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정령을 제압할 수 있겠소? 당신이 강한 건 알지만, 4위계 마법사로는…….”
“가능합니다.”
베르덴은 확신했다.
단호한 대답에 스칼드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소. 그럼 믿겠소.”
선풍의 장막이 사라지는 순간이 시작이다.
제자리에 선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이 유형화되어 불꽃처럼 타올랐다.
심상치 않은 압박감에 모험가들이 경악했고, 베르덴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시작하겠습니다.”
화아아악.
그들을 지켜 주던 바람이 사라졌다.
* * *
케디언이 석장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신성력이 발광하며 샛노란 구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루아스시여, 저들에게 광활한 빛을!”
구체가 터지며 빛이 주변 일대를 집어삼켰다.
그 빛을 정면으로 목격한 아인종과 마수들의 시력이 한순간 멀었다. 시각을 잃은 지금, 놈들은 다른 감각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터.
숨을 깊게 들이마신 스칼드가 함성을 내질렀다.
“이리 와라!”
청각을 진동시키는 목소리에 일제히 괴물들이 스칼드에게 달려들었다.
계획대로 버민은 골렘들만을 상대했고, 케디언은 서번트를 소환해 버민의 등을 보호하며 남은 신성력으로 작은 보호막을 둘렀다. 루비나는 놈들의 머리나 어깨를 밟으며 화살로 철저하게 서포트했다.
누구 하나 실수하면 사망으로 직결되는 상황.
‘그래도 꽤 버티는군.’
그사이 투명화를 쓴 베르덴이 몰래 정령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놈이 베르덴을 인식했다. 정령이라 그런지 투명화 마법을 손쉽게 꿰뚫어 봤다.
베르덴이 곧장 스태프를 겨눴다.
<플레어>
고열의 화염 광선.
그러자 지면이 솟구치며 마법과 충돌했다. 녹아 버린 대지가 용암이 되어 흘러내렸고, 그 열기에 화들짝 놀란 숲의 정령이 멀찍이 떨어졌다.
[까득.]
그 소리와 함께 명멸하는 정령.
녹색빛이 나무에 닿자 수십 개의 가지가 비틀리며 날카롭게 변형되더니, 일제히 베르덴을 향해 쏘아졌다.
베르덴이 <화염 장막>을 둘러 나뭇가지들을 전부 태워 버렸다.
비행을 쓴 베르덴이 접근했고, 정령은 도망쳤다.
하늘에서 숲을 불태우다시피 했으나, 정령의 크기가 워낙 작아 맞히기 어려웠다. 생각보다 민첩하기도 했고.
닿을 만하면 정령은 나무와 대지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지켰다.
성가시다.
마치 끈질긴 마법사를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다.
‘잠깐, 마법사?’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정령의 움직임을 멈출 방법이.
베르덴은 지면으로 내려갔다.
도망치던 숲의 정령이 빛을 반짝였다, 마치 약 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마력을 최대한 끌어모은 베르덴이 푸른 눈을 번뜩였다.
마력 위압.
방대한 마력이 정령을 집어삼켰다.
[……!]
숲의 정령이 경직되었다.
‘예상대로군.’
마법사는 마력에 민감하다.
과거 금 등급 모험가인 고드가 베르덴의 마력 위압에 기절한 것처럼 말이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정령 또한 마찬가지일 터.
그 생각은 당연하게도 적중했다.
베르덴이 더욱 위압의 강도를 높이자, 정령도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력과 마력의 충돌. 버민의 말대로 마력 저항력이 상당하다. 출력만 따지자면 4위계의 마력회로의 윗줄이다.
하지만 베르덴의 마력량은 그 이상.
잠깐 동안은 정령이 베르덴의 마력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지속되는 힘 싸움에 견디지 못했다. 서서히 힘이 약해지는 게 마력을 통해 느껴졌고, 이내 완전히 정령의 움직임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베르덴이 마안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형태를 갖춰 가는 합성 마법.
타오르는 대지의 창이 일대를 불태웠고, 그 창끝은 숲의 정령을 가리키고 있었다.
[……!]
놈이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마력을 움직였으나, 전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사이 베르덴이 마법을 완성했다.
<용암격창>
───콰과과과과!
붉은 화염이 정령이 있던 장소를 휩쓸었다.
그것으로 부족할 것 같아 연이어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숲을 진동시키는 폭발. 거센 열기에 피부가 화끈거렸다.
어느새 숲의 일부가 잿더미가 되었다.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는 더 이상 정령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의 끝에서 매개체를 잃은 골렘이 기울며 지면에 쓰러지는 게 보였다.
확실히 정령은 소멸되었다.
이제 남은 건 모험가들에게 몰려든 괴물들을 처리하면 끝.
베르덴이 끌어모은 마력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구름에 스며든 세 개의 벼락. 짙은 청색의 구름에서 수천 개의 번개가 요동쳤다.
오싹한 기운을 느낀 스칼드가 하늘을 바라보더니 소리쳤다.
“애셔의 마법이다! 모두 자리를 벗어나시오!”
스칼드가 케디언을 어깨에 메고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버민과 루비나도 마찬가지. 작전대로 모험가들이 범위를 벗어난 걸 확인한 베르덴이 스태프를 아래로 휘둘렀다.
<삼뢰적멸三雷寂滅>
콰과과과광!
거대한 벼락이 숲을 강타했다.
* * *
거대한 소울 트리에게마저 치명상을 입힌 마법.
그보다 훨씬 약한 아인종과 마수들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중심에 있던 놈들은 사체도 남기지 못했고, 그 반경에 있던 괴물들은 강렬한 전류에 폭사당하거나 신체 내부가 완전히 불타 버렸다.
최외곽에 있던 몇몇 마수가 겨우 살아남긴 했지만, 얼마 못 가 그대로 피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졌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모험가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숲 한가운데 새겨진 그을음과 파열된 지면. 사방에 널려 있는 사체들이 시야에 비쳤다.
버민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야, 이게…….”
그의 동료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4위계 전격 마법을 접해 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생물체 한정으로 절대적인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력만큼이나 엄청나게 많은 마력을 소모한다고도.
스칼드가 직전의 벼락을 떠올렸다.
‘그 마법은 <낙뢰>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 파괴력은…… 설마 합성 마법인가?!’
확실하다.
그것도 더블 캐스팅이 아닌, 트리플 캐스팅을 통한 합성 마법. 스칼드가 알고 있는 <낙뢰>의 위력과 비교하면 분명 그러했다.
‘무슨 시전 속도가…….’
그때, 베르덴이 모험가들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 괘, 괜찮소.”
스칼드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디언이 슬쩍 베르덴에게 물었다.
“저, 근데 애셔 씨는 4위계 마법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 위력은…….”
“4위계라고 다 같은 마법사는 아닙니다.”
아…… 그 한마디에 모험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덴에게서 느꼈던 거대한 마력 그리고 소수에게만 적합성이 있는 고위 속성뿐만이 아니라 여러 속성마저 능숙하게 다루는 극한의 재능, 원거리와 근접전을 오가는 특이한 전투 방식, 상식에서 벗어난 마법의 시전 속도.
뭐가 됐든 상식으로 판단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방해였나.’
그는 아직 숨겨 둔 수가 많아 보인다.
만신창이가 된 모험가들과 달리, 베르덴은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으며,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정령을 토벌하고도 모자라, 그만한 마법을 시전했는데도 부담이 없다는 뜻이겠지.
‘천재…… 아니, 괴물이군.’
모험가들은 생각했다.
어쩌면 훗날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마법사를 만난 걸지도 모른다고.
허허, 스칼드가 웃었다.
“어쨌든 덕분에 목숨을 구했소, 애셔. 내가, 아니 우리가 사람을 너무 몰라봤군. 아무래도 당신에게 줄 보수에 대해 상향 조정을 해야 할 것 같소. 목숨값에 더해 이만한 수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말이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령은 어떻게 됐소?”
베르덴이 잿더미를 가리켰다.
<파도>를 사용해 열기를 지우자, 숲의 정령이 있던 자리에는 녹색의 수정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