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정령 (1)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세 가지 힘 중 하나, 기.
통상적으로 기는 붉은 색채를 띠며, 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하거나 무기나 방어구에 덧씌워 파괴력 또는 방어력을 증가시키는 데 쓴다.
하지만 특별한 기를 타고나거나 숱한 훈련과 전투를 거친 소수의 인물들은 더욱 기를 다채롭게 응용할 수 있다.
도살자 갈리아크의 파쇄破碎.
핏빛검 레이라의 혈섬血閃.
잭의 무섬無閃
저마다의 방식으로 변형되고 단련된 기의 방식.
그것을 세계에서는 기예(氣藝)라고 부른다.
스칼드 또한 자신만의 기예를 가지고 있었다.
강체剛體.
기를 활성화하자, 스칼드의 팔과 다리에 핏줄이 돋으며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양손 도끼를 뒤로 당긴 스칼드. 가장 앞서 있던 와이번과 닿기 직전, 다리로 속도에 제동을 걸며 허리를 강하게 비틀었다. 뼈와 고기가 분쇄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번에 포레스트 와이번을 양단한 스칼드가 그대로 돌진을 이어 나갔다.
그 뒤를 버민과 루비나가 지켰다.
루비나가 나무 위를 오가며 족족 화살로 포레스트 와이번의 연약한 신체 부위를 노렸고, 방패를 든 버민이 정면을 막아 냈다.
그사이 성직자 케디언이 영창을 마쳤다. 하늘에 떠오른 성스러운 빛이 하나의 형상을 갖췄다.
<홀리 서번트>
성스러운 갑옷을 두르고 황금의 창을 든 빛의 하인.
루아스교의 성직자 중에서도 클레릭의 계급을 하사받은 자가 사용할 수 있는 신성 소환.
“루아스의 하인이여, 우리의 적들을 분쇄하소서!”
케디언의 부름에 응한 서번트가 포레스트 와이번과 맞섰다.
각자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는 파티의 아인종 토벌은 언제나 그랬듯 순조로웠다. 화살을 절반가량 소모한 루비나가 나뭇가지에 안착했다.
‘다른 아인종은 몰려오지 않는 모양이고…… 음, 변수는 없네. 그럼 새로운 마법사가 어떻게 싸우는지 좀 볼까?’
번개를 다루는 마법사는 몹시 드무니까.
루비나가 활시위에 화살을 얹으며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베르덴도 마찬가지로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긴 했지만 생각했던 광경은 아니었다.
스태프를 휘두를 때마다 충격파가 터진다.
그에 머리를 적중당한 와이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와 동시에 단번에 세 개의 마법을 발동해, 거대한 석편으로 와이번의 얇은 뱃가죽을 꿰뚫었다.
벌써 베르덴의 손에 죽은 것만 네 마리였다.
‘무슨 마법사가 저렇게 무식하게 싸워?’
안전한 거리에서 마법을 쏘아 내는 게 마법사의 정석인데.
그는 오히려 거리를 좁히며 신체와 마법을 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미련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루비나의 눈엔 다르게 비쳤다.
포레스트 와이번의 움직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내는 뛰어난 감각 그리고 대범함. 근거리에서 펼쳐지는 마법은 더없이 위력적이었다.
‘독학은 아닐 테고…… 아마 스승이 있는 거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만약 혼자서 저렇게 싸워 왔다면 진즉에 죽었을 테니. 타고난 재능도 그렇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해 왔을 것이다.
‘저 외모에 실력…… 얼굴값 제대로 하네.’
그렇게 멋대로 결론을 지은 루비나가 다시금 나무를 박찼다.
어느새 전투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제 남은 건 포레스트 와이번 무리의 우두머리뿐.
[키에에에에에에엑!]
다른 개체보다 거대한 크기를 가진 와이번이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하늘로 도약한 놈이 루비나의 화살들을 피해 내고는 그대로 낙하하며 스칼드에게 돌진했다.
기를 전력으로 끌어올린 스칼드가 양손 도끼를 앞으로 뻗었고, 와이번의 앞니와 충돌했다.
콰드드드드득!
스칼드의 다리가 지면에 파고들며 밀려났다.
그러나 그의 몸은 여전히 굳건했다.
스칼드가 팔을 밀며 와이번의 이빨 사이에 도끼를 끼웠다. 이내 힘껏 허리를 비틀며 팔을 위로 쳐올렸다.
한순간에 와이번 우두머리의 거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애셔! 루비나!”
<스톤 크랙>
날카로운 암석들이 와이번의 뱃가죽을 찢어발겼다.
뒤이어 루비나가 연속으로 발사한 화살들이 제각기 급소를 꿰뚫었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힌 우두머리 와이번. 스칼드가 다시금 도끼를 들어 놈의 목을 반쯤 잘라 냈다.
부들거리던 우두머리가 곧 축 늘어졌다.
포레스트 와이번 무리는 전멸했다.
하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멀리서 기척을 느낀 베르덴이 마력감지를 펼쳤다.
“상위종을 포함한 오우거가 다섯 마리. 수가 꽤 됩니다.”
“본래 소란이 들리면 짐승들은 도망가기 마련이지만, 스스로를 포식자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다르오. 사냥감이 있다 싶으면 주저 없이 다가오지. 모험가로서 오래 살아남는 방법은, 전투의 흥분 속에서도 눈앞의 적만 생각하지 않고, 혹시 모를 위험 또한 상정하는 것이오.”
스칼드가 도끼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시선을 돌렸다.
숲 안쪽에서 걸어오는 트윈 헤드 오우거 한 마리와 오우거 네 마리. 놈들이 들고 있는 거대한 통나무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저놈들이 길드의 모험가들을 죽인 놈들이군. 애셔, 선공을 맡아 줄 수 있겠소?”
상대는 다수이며 거리도 적당히 떨어져 있다.
전격 마법을 쓰기엔 제격이다.
스칼드에게 호응하며 앞으로 나선 베르덴.
마력이 집결된 스태프에서 우레 소리가 낮게 울렸다.
<연쇄번개>
* * *
오우거.
거체에 어울리는 강인한 근력과 단단한 피부를 무기로 삼는 아인종.
상위종인 트윈 헤드 오우거는 그보다 한 단계 더 진화된 개체다.
보다 큰 체격에, 동족인 오우거마저 잡아먹는 흉포함은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 잡히는 순간 어지간하면 그대로 터져 죽을 테니, 아인종 토벌에 이골이 난 모험가라 해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물론 미스릴 모험가 파티 만하와 베르덴은 그런 실수 따위 저지르지 않았다.
전투의 여파로 인해 엉망이 된 숲.
주변에는 오우거의 피가 가득했고, 전투 도중 소란에 이끌려 온 마수의 사체들마저 널브러져 있었다. 이윽고 케디언이 소환한 서번트가 마지막 남은 아인종의 입천장을 꿰뚫었다.
───쿠웅.
만신창이가 된 트윈 헤드 오우거가 쓰러졌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제 더 오지 않는 모양이야.”
“휴우, 길드 말대로 평소보다 많긴 하네. 이게 대체 몇 마리야? 와이번까지 합쳐서 스무 마리는 그냥 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예상 범위 내긴 하오. 위험도가 높은 아인종들을 이만큼이나 토벌하는 데 성공했으니 당분간 숲은 조용해지겠지.”
세상은 항상 변화한다.
평소와 다른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드문 일이긴 해도, 자연적으로 아인종이 대량 발생하는 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긴 아니다.
“그럼 소재 좀 부탁하겠소. 나는 애셔와 함께 경계를 서도록 하지.”
“예이, 예이. 수가 많으니 잡다한 소재는 제외할게.”
버민이 오우거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검을 꺼내 기를 덧씌운 뒤, 팔과 다리를 갈라 두꺼운 힘줄을 채취했다. 루비나와 케디언이 그를 옆에서 보조했다.
베르덴이 스칼드에게 물었다.
“안 도와줘도 되는 겁니까?”
“소재 채취할 줄 아시오?”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모험가도 아닌데 알 리가 없었다.
“그럼 여기 있으면 되오. 우린 쉬는 게 아니라 주변에 다른 위협이 없는지 철저하게 경계하는 것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오. 어차피 소재 채취에 대한 인건비도 따로 분배가 되니 말이지.”
“그렇다면야…….”
베르덴의 시선이 루비나에게 향했다.
경계를 설 거라면 궁수가 하는 게 낫지 않나? 파티 내에서 수색과 탐색을 맡은 것 같은데.
그런 의문에 스칼드가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사실 내가 손재주가 없소. 소재 채취할 때만 되면, 긴장해서 그런지 힘을 너무 많이 주게 되더군. 그렇게 날린 소잿값이 꽤 커서…… 자연스레 배제되어 버렸소.”
크흠흠.
스칼드가 헛기침을 하곤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그 전투 방식은 어디서 배웠소? 도저히 마법사다운 움직임은 아니던데.”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
그런 설정이다.
스칼드가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부여 마법으로 마법사 스스로를 강화해 활용한다라…… 단순히 마법적인 재능만 있었던 게 아니었군. 당신은 전사의 길을 걷었다 해도 분명 대성했을 것이오.”
솔직히 말해 지금의 움직임은 룬의 반지 엑시드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이 과감하게 움직이는 건 가능한 한 피했겠지.
‘그런데 마법사가 아닌 다른 길이라.’
역천을 이루기 전, 베르덴의 한계 위계는 1위계.
마법적인 이해력과 연산력은 천재의 반열이라고 해도, 마법사로서의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어쩌면 마법 대신 검을 들었다면…… 보다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절망도 고통도 없는 그런 삶을 말이다.
하지만 의미는 없다.
먼 미래도, 지나간 과거도.
지금의 베르덴에겐 필요 없다. 하늘을 바라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갈 계단만을 찾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다.
그런 생각을 숨긴 채 베르덴은 스칼드와 간단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동안 나머지 모험가들이 소재 채취를 마쳤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씻은 버민이 지쳤다는 듯 팔을 털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는 피부가 너무 질겨. 근육도 그렇고. 나 손 떨리는 것 보여?”
“하하, 고생하셨소. 아세른으로 돌아가면 내 한턱 쏘지.”
“가방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케디언이 소재가 담긴 공간가방을 챙겼다.
배낭 형태인 만큼 베르덴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용량이 컸다. 한두 푼 하는 게 아니지만 미스릴 등급 파티에게는 그리 부담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투는 길었지만 보수는 두둑하다.
해가 지기 전에 슬론의 깊은 숲을 벗어난 뒤 야영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순간.
[……까득]
전날 밤에 베르덴이 들었던 소리.
이번에는 다른 모험가들도 들은 모양이었다.
모두가 슬그머니 무기를 꺼내 들곤, 경계를 극도로 높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지나온 숲 가운데, 녹색 빛 덩이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 * *
‘저게 뭐지?’
처음 보는 녹색 빛 덩이에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과 필적하는 정순한 마력이 정체불명의 빛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가운데, 버민이 이내 눈을 부릅뜨고 경악했다.
“서, 서, 설마…… 정령?”
“정령이라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모험가들의 얼굴이 굳었다.
스칼드가 심각한 얼굴로 버민에게 물었다.
“정령이 확실하오?”
“저 녹색 빛무리…… 책에서 본 것과 똑같아. 분명히 숲의 정령이야.”
정령?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버민이 정령의 눈치를 보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정령이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이형종.
온순할 때는 안전하지만 정령이 분노하게 되면 그 위험도는 극상으로 치닫는다.
“숲의 정령은 주변의 생물들을 끌어들이는 데다가, 또 다른 정령들을 불러 모으는 습성이 있어요. 심지어 오래된 정령은 자신을 매개체로 골렘을 조종하기도 하고요.”
“거기다 물리적인 타격은 소용이 없는 데다가, 마력 저항력도 높습니다. 자연을 조종해서 상대하기도 쉽지 않고요. 토벌 등급은 미스릴 등급이지만, 지금의 저희로서는 토벌할 방법이 없습니다. 파티가 아닌 개인의 무력이 미스릴 등급이 아닌 이상은…….”
베르덴이 정령을 주시하며 스칼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이대로 도망가면 괜찮을 거요. 정령은 화가 나지 않으면 굳이 우리들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없을 테니.”
스칼드를 따라 한 발짝씩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여섯 발자국쯤 이동했을까. 정령에게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정령이 발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루비나가 시선을 돌렸다. 깊은 숲 안쪽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것도 사방에서.
“……뭔지는 모르겠는데 정령이 화가 난 것 같은데? 그것도 엄청?”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키에에에에에에엑!]
이윽고 슬론의 깊은 숲에서 수많은 아인종과 마수가 범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