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미스릴 모험가 파티 (2)
슬론 숲에 들어온 지 어느새 14시간이 흘렀다.
이쯤 들어왔으면 비행을 써도 왕국 병사에게 발각될 일은 없겠지만 일행의 주체는 모험가 파티 만하이고 리더는 스칼드다.
계약한 날짜는 최소 이틀이기에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중간중간 간단히 식사를 하는 등 휴식을 취하긴 했으나 겨울임에도 몸에 열이 차올랐다. 이따끔씩 베르덴의 움직임을 살피던 스칼드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소, 애셔? 괜찮아 보여서 오래 움직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마법사에게는…….”
“문제없습니다.”
베르덴은 솔직히 답했다.
고작 한나절쯤 행군을 했다고 지칠 체력이 아니었다. 정말로 태연한 모습에 버민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대단하네요, 애셔 씨는. 우리 마법사였다면 못 걷겠다고 몇 시간 전에 침낭 깔고 자고 있었을 텐데. 안 그래, 루비나?”
“누가 아니래.”
“자, 약속 파투 낸 겔톤 뒷담은 그쯤 하고.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왔으니 내일이면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겠소. 그러니 2시간 후에 자리를 잡아 야영지를 만들도록 하겠소.”
모험이 이어졌다.
도중에 아인종이나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거나 기척이 느껴지긴 했지만 충돌은 없었다. 놈들도 직감한 것이다. 저들을 사냥하려 했다가 도리어 사냥당할 거라고.
이윽고 날이 저물고 적당한 공터를 찾았다.
평소대로라면 버민과 루비나가 저녁을 준비하고 나머지가 텐트를 치거나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으나, 이번에는 베르덴이 있었다.
베르덴이 염동력으로 다섯 개의 텐트를 움직여 순식간에 바닥에 설치했다.
이 정도의 위치 계산과 조작은 손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이어 손가락을 튕겨 모닥불에 불을 붙였다.
버민이 감격한 듯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게 진짜 마법사?”
너무 편하다.
불 하나 못 피우고 오로지 냉기와 물 마법에만 몰두하는 겔톤과는, 생활적인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그런 색다른 여유로움 속에서 저녁이 만들어졌다.
미스릴 등급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최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비프스튜. 버민이 한 사람 한 사람 그릇에 퍼서 전달했다.
베르덴이 비프스튜를 앞에 두었다.
문득 비르온 영지로 언데드를 토벌하러 갈 때, 이리스 일행과 먹었던 스튜가 떠올랐다. 꽤 맛은 있었는데.
베르덴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이게 더 맛있군.’
그렇게 늦은 저녁을 먹던 중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됐다. 모험가들끼리 하는 시시콜콜한 잡담. 베르덴은 외부인이었지만 나름대로 듣는 재미는 있었다.
양이 부족했는지 스튜를 한 그릇 더 담은 스칼드가 베르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소. 입맛에는 좀 맞으신가?”
“맛있습니다.”
요리를 담당했던 버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그럼 그럼. 내가 모험가 생활이 몇 년째인데 스튜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지.”
“너는 재료 손질만 했잖아?”
“그게 맛의 비결이지.”
루비나의 눈총에도 버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애셔 혼자 묵묵히 밥만 먹는 걸 보니 좀 그렇군. 그래서 그런데 우리에게 혹시 뭐 궁금한 건 없소? 간단한 거라도 좋으니 말이오.”
궁금한 거라.
베르덴이 고민하다 케디언에게 물었다.
“성직자가 모험가를 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루아스교에서 클레릭(Cleric) 칭호를 부여받아서 가능합니다. 루아스교의 성직자로서 공식적으로 외부 영리 활동이 가능한 자격이지요.”
“대신 일정 기간마다 모험가 길드에게 중개료를 지불하고, 루아스교회에 ‘헌금’을 하고 있소. 물론 전혀 아깝지야 않지.”
성직자의 존재 하나만으로 파티의 생존률이 달라진다.
이들이 파티 단위로 미스릴 등급에 올라온 건, 단지 무력만이 아니라 안정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모험가 길드는 이렇게 오래갈 수 있는 모험가를 선호하며 등급 심사 등에 가산점을 부여하기도 한다. 온갖 편의를 봐주는 건 덤이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툭하면 죽어 나가는 게 세상이었다.
“가늘고 길게 가는 삶. 모험가하고는 전혀 안 어울리는 말이지만 그게 우리 꿈이오. 몸이 삐걱거릴 때쯤 은퇴한 뒤에, 그때까지 벌어 놓은 돈으로 가족 일구고 유유자적 사는 것. 아니면 길드에서 돈 따박따박 받으면서 떵떵거리고 살거나.”
거창한 꿈이 아니다.
으레 모험가라면 바라는 평범한 미래였다.
“꿈이야 그때마다 달라지는 것 아니겠소. 아무것도 모를 때는 혼자서 흑요 등급 모험가가 되어서 세상에 군림하고 싶었소.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깨달았지. 아! 이러다가 얼마 안 가 뒈지겠다고. 그래서 파티를 모았소.”
차례대로 버민, 루비나, 겔톤, 케디언.
퍼즐처럼 서로가 딱 맞물리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백금 등급에서 몇 년간 실적을 쌓고 심사를 통과해 미스릴 등급으로.
루비나가 말했다.
“원래는 저기 제국에서 활동하다가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왕국이 땅이 넓어서 그런지 위험도가 높은 아인종이나 이형종이 비교적 자주 출몰하거든요, 지금처럼.”
“뭐, 솔직히 에스티리아 왕국은 개판이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살짝 그 속을 들여다보면 썩어 문드러졌지. 왕권 다툼이니 뭐니 서로 편 가르고 땅따먹기 하고 있거든. 그래도 다행히 미스릴 등급쯤 되면 별로 건드리는 사람은 없소. 그래서 비교적 편안하게 활동하고 있지.”
모험가 길드에서도 두 번째로 높은 등급.
망나니 같은 귀족이라고 해도 머리가 반쯤 뭉개져 있지 않는 이상,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미스릴 등급과 척질 사람은 없다.
그래 봐야 본전도 못 건질 테니.
스칼드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애셔, 당신도 꿈이 있소? 마법사니까 겔톤처럼 마도사가 되는 것이오?”
마도사는 꿈치곤 소박하다. 적어도 베르덴에겐 그랬다.
그의 목적은 7위계 마도사인 마탑의 정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타인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뭐, 그렇습니다.”
“그렇군. 애셔, 당신은 겔톤보다 훨씬 젊어 보이니 그만큼 오래 살겠지. 그러니 분명 다다를 수 있을 거요.”
젊어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젊다.
해가 넘어가도 고작 26살이니. 굳이 나이를 밝혀 주목을 끌 필요는 없었다. 베르덴에게 중요한 건 나이에 비해 월등한 것이 아닌, 마법사로서 월등한 것이었으니까.
대화는 더 이어졌다.
베르덴도 대화에 끼어들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시간이 흘러 밤 그늘이 차올랐다.
* * *
“불침번은 애셔부터 서시오.”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솔직히 우리쯤 되면 며칠 날밤을 새워도 끄떡없소. 그리고 마법사는 전사보다 컨디션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으니, 불침번 시간은 항상 처음이나 마지막으로 고정되어 있소.”
양보.
어쩌면 그것이 파티의 균형을 유지하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럼 믿고 맡기겠소.”
만하의 파티원들이 눕자마자 곧바로 잠에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모험가로서의 능력 중 하나.
그러나 순간의 살기라도 느낀다면 곧바로 일어나 전투태세에 돌입할 것이다. 불침번을 세우는 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일 뿐, 설령 모두가 잠에 든다고 해도 이들의 감각을 속이긴 어렵다.
타닥타닥.
베르덴은 모닥불 앞에 앉았다.
따뜻한 열기를 느끼며 스칼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꿈이라.’
베르덴의 꿈은 복수다.
그건 과거나 지금이나 같았다. 설령 도중에 죽는다고 해도, 몸이 산 채로 짓이겨진다고 해도 결코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하고 난 다음에는…… 난 뭘 해야 하지?’
눈앞의 모닥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불태울 장작이 없으면 아침이 되기 전에 사그라들 것이다. 후에는 흔적만이 남겠지.
그리고 그건 베르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내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그런 먼 미래까지 생각할 자격은 없다.’
역천을 이룬 지 1년도 안 됐다.
누군가는 그를 천재라고 여기겠지만 베르덴에겐 턱없이 부족했다. 고작 4위계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기엔 너무 일렀다.
생각하자.
마탑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을.
실험 단계인 여러 약물에 중독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그때를.
자유를 빼앗기고 물건처럼 다루어졌던 인생을.
마법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엄이 짓밟혔던 과거를.
생사의 기로에서 증오와 분노를 가슴속에 새겨 넣었던 처음을.
그 고통과 무력감 그리고 절망.
잠시 잊고 있었던 감각들이 전신을 휘감았다.
어금니를 강하게 깨문 베르덴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피가 흘러내렸다. 간신히 살기를 억누르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이 깨는 일은 없었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흥분.
그래, 이게 베르덴이 가져야 할 감정이다. 먼 미래를 생각할 여유는 없다. 겉으로는 일절 드러내지 않을지언정 속은 언제나 지금의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게 베르덴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니까.
“후우…….”
깊게 숨을 내쉬자 서서히 몸에서 힘이 빠졌다.
일그러졌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공간가방에서 최상급 포션을 꺼내 몇 방울 손바닥에 떨어뜨리자, 리커버리 팔찌의 효과와 겹치며 곧 회복되었다.
피를 완전히 씻어 내고는 조용히 불침번을 이어 갔다.
그러던 그때.
[……까득.]
숲 어딘가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베르덴이 곧장 반응하며 저 안쪽으로 마력감지를 펼쳤다. 전신의 감각을 일깨워 경계를 극도로 높였다.
‘……그사이에 사라졌다고?’
베르덴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고작해야 풀이 스치는 소리나 벌레의 울음소리뿐. 어쩌면 베르덴이 과민하게 반응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생각은 없다.
마침 다음 불침번을 깨울 때가 되었다. 스칼드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자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어흠, 잘 잤군. 고생했소, 애셔. 뭐, 별일은 없었소?”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
스칼드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베르덴이 자신이 들었던 소리에 대해 말하자 스칼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분 착각으로 넘어가고 으레 착각으로 드러나는 편이나,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소. 그리고 그 경우에는 파티가 전멸할 가능성도 매우 높지. 불침번을 이어 가면서 확실히 전달하도록 하겠소.”
스칼드가 자신의 양날 도끼를 어루만졌다.
오랫동안 모험가 생활을 해 온 그에겐 허투루 넘기는 것이 없었다. 그게 오래 이렇다 할 부상 없이 오래 살아온 비결 중 하나였다.
깊어 가는 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여전히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음 날까지.
[까득. 까득.]
* * *
다음 날 정오, 마침내 슬론의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의 높이가 한층 더 높아졌고, 나무 사이의 간격은 더욱 멀어졌다. 덩치가 큰 마수나 아인종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습격을 당하기 좋은 환경이군.”
버민과 스칼드가 전방에 서며 후방에 있는 베르덴과 케디언을 감싸는 진형. 탐색을 담당한 루비나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목표물의 흔적을 수색했다.
도움닫기도 없이 나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부러져 있는 나뭇가지. 나무의 몸통에는 날카롭고 거대한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포레스트 와이번이야. 가장 얇은 발톱이 스칼드의 허벅지보다 두꺼운 걸 보면, 우두머리 중에서도 꽤 사이즈가 큰데?”
“당첨이군. 모두 전투 준비.”
포레스트 와이번은 워낙 영역 관리가 철저한 터라 서식지 근처에 반드시 흔적을 남겨 놓는다.
이걸 넘으면 침입자의 체취를 맡은 포레스트 와이번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든다.
베르덴의 마법으로 체취를 지울 수는 있다.
하지만 스칼드는 그러지 않았다. 흩어진 놈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보다 한데 뭉쳐 상대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이건 오만이 아닌 철저하게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자신감이었다.
이윽고 저 앞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키르르르르륵……!]
포레스트 와이번.
우두머리 포함 총 10마리. 숫자가 많긴 하나 오차 범위 내다. 침을 뚝뚝 흘리던 놈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일제히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베르덴을 포함해 모두 제자리에 서서 진형을 지켰다.
어느새 나무를 옮긴 루비나가 활시위를 당겼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화살에 스며들었다.
“일단 하나.”
피잉──── 콰지직!
와이번의 머리가 꿰뚫리며 그 사체와 와이번들이 뒤엉켰다. 난장판이 된 숲. 스칼드가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는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 압력에 지면이 일부 깨어졌다.
“지금이오!”
콰앙!
그의 돌진이 토벌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