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간단한 의뢰 (2)
마법사와 전사의 근접전.
이건 백이면 백 전사가 유리했고, 압도하지 못하면 전사로서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상식이었다.
‘이게 뭔……!’
그런데 바제스의 철퇴와 정통으로 부딪쳤음에도 베르덴은 멀쩡했다.
마력으로 된 충격파가 충격을 상쇄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바제스를 밀어냈다.
힘에 밀려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친 바제스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런 마법사 새끼가!”
쾅!
바제스가 철퇴를 휘둘렀다. 무지막지한 근력으로 주위를 무차별적으로 강타했다. 한 방 한 방 속도가 빠르고 파괴력이 강하나 그렇기에 정직했다.
감각이 뛰어난 자는 그야말로 바제스의 천적.
종이 한 장 차이로 계속해서 철퇴를 피해 낸 베르덴이 마력을 번뜩였다.
<어스 스피어>
트리플 캐스팅.
마법서로 강화된 대지의 창이 바제스에게 육박했다.
바제스의 근육이 융기했다. 허리와 어깨를 비틀어 억지로 철퇴의 방향을 뒤바꾼 바제스가 마법을 단박에 부숴 버리고는 아래로 내리찍었다.
흔들리는 지면.
중심을 잃은 베르덴을 향해 철퇴가 날아왔다.
“맞고 뒈져라!”
<염동력>
반투명한 막이 철퇴의 궤도를 비틀었다.
그것만으로 염동력의 장막이 깨졌다. 확실히 충격력 하나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투는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쿠웁!”
오큘러스가 바제스의 빈틈을 강타했다.
놈이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움켜쥐었고, 그사이 베르덴이 뒤로 거리를 벌렸다.
‘슬슬 끝낼까.’
오큘러스의 성능은 실전에서 검증이 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 불리한 근접전을 지속할 이유는 없다.
다음은 삼원색의 중심 차례.
베르덴이 연산 능력을 극적으로 발휘하며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화염과 냉기.
서로 상극인 원소 마법들이 각각의 특징이 추출되어 하나로 합쳐진다. 이윽고 스태프 끝에 자그마한 푸른 연꽃이 피어올랐다.
<빙염화>
마력이 확산하며 푸른 꽃잎이 순식간에 동굴 내부에 흩날렸다.
지면에 꽃잎이 내려앉아 삽시간에 냉기가 퍼져 나갔다. 그에 닿은 바제스 또한 마찬가지.
“시발! 이게 대체 뭐야!?”
꽃잎에 닿은 피부가 얼어붙었다.
화염의 특성 중 하나인 ‘확산’을 품은 냉기. 바제스가 아무리 손으로 털어 내 봤지만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기운을 끌어내 조금이라도 냉기에 저항하는 게 전부였다.
뒤에 있던 그의 부하들은 이미 전신이 얼어붙었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마법.
그 사실에 바제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마도사라고?’
마법의 법칙에서 벗어난 도달자.
물론 베르덴은 아직 마도를 걷지 못했다. 애초에 5위계에 이르지도 못했다.
이건 아티팩트 덕분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적일 뿐.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른다면 타인의 눈에 비치는 베르덴은 영락없는 마도사였다.
<크랙>
콰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악!”
바제스의 몸뚱이에서 얼음이 폭발했다.
전신이 찢어지는 격통에 바제스가 무릎을 꿇었고, 그런 그의 앞에 회색의 단검이 육박했다.
푸욱.
목을 관통당한 바제스는 유언조차 내뱉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세른에서 날뛰던 악명 높은 용병은 그렇게 타국에서 온 마법사에게 짓밟혔다.
단검을 회수한 베르덴이 직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아티팩트로 만든 마법 때문인지 마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마력 외적인 문제다.
첫째는 연산 능력.
단시간에 마법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작 마법 한 번에 머리에 뜨겁게 열이 오를 정도니.
그리고 두 번째로 마력회로의 출력.
첫 번째 이유와 마찬가지로 마법 분해 및 조립, 그것이 차지하는 마력회로의 할당량이 상당하다.
이 이상으로 삼원색의 중심이 부여한 혼돈을 일으켰다간 분명 마력회로에 과부하가 올 것이다.
한 번의 전투에 삼원색의 중심을 활용할 수 있는 건 많아 봤자 세 번. 물론 더 많은 속성을 다룬다면 그마저도 더 줄어들 것이다.
“뭐, 익숙해지면 되겠지.”
아직 성장할 길은 많이 남아 있다.
베르덴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고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이곳은 악명 높은 용병단의 은신처.
그렇다는 건 가져갈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괜찮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베르덴의 모습이 동굴 안쪽으로 사라졌다.
* * *
페르네는 식사도 거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침내 희망이 동아줄이 내려온 줄 알았는데, 막상 잡아 보니 기름칠이 되어 있는 기분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이내 불안에 휩싸였다.
“……실패하면 어떡하지?”
페일 기준으로 2등급이라고 했다. 그럼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하지만 페르네는 애셔란 이름 외엔 가진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단지 페일의 말을 신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이러다 애셔가 죽고 바제스가 앙심을 품고 찾아온다면.
페르네는 정말로 최악의 결말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제발…… 제발……!”
페르네가 기도했다.
누구에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디 자신의 인생이 여기서 끝장나지 않기를, 부디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인 것 같은데 그게 애셔인지 바제스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페르네가 침을 삼키며 입구를 바라보자, 마침내 문이 열렸다.
“아……!”
베르덴이었다.
페르네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겨우 한숨 돌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베르덴의 모습은 나가기 전과 같이 멀끔했다.
마치 전투를 치르지 않은 것처럼.
아!
페르네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바제스 못 찾은 거죠? 하기야 놈이 은신처에만 있을 리가 없죠. 비행 금지령인데 이렇게 빨리 찾아내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어쨌든 다행이에요. 저는 정말로…….”
“무슨 소리지?”
“네?”
페르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바제스 못 찾은 것 아니에요?”
“못 찾았으면 안 왔겠지.”
베르덴이 공간가방에 손을 넣었다.
바제스가 이끄는 용병단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 그냥 땅속에 묻어 버리기엔 아까웠다. 품질이 괜찮은 금속이라 대충 중고로 팔아도 최소 수백만 엘크는 받을 테니.
쿵!
바닥에 떨어진 바제스의 철퇴와 여러 무기를 본 페르네의 표정이 굳었다.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낡은 책을 한 권 꺼내 페르네에 건넸다.
“이게 뭐…… 죠?”
“장부. 바제스에게 돈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더군.”
페르네가 스윽 훑었다.
귀족, 상회주 등 몇몇 유명한 이름도 보인다. 즉, 이건 불법 자금 장부다. 아무리 불법이 판치는 왕국이라지만, 이걸 적대 귀족이나 상회에게 넘긴다면 엄청난 무기가 된다.
말 그대로 사용하기에 따라 상대를 끝장낼 수 있는 명분 그 자체.
연이어 베르덴이 바제스가 보관하고 있던 재물들을 페르네에게 보였다.
돈은 별로 없었지만 보석이나 장신구 같은 것이 몇 개 있었다. 책상 위에 하나씩 보기 좋게 나열했다.
마지막으로 바제스의 머리를 꺼냈다.
단단히 얼려 놓은 터라 피가 흐를 일도 없었고,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지도 않았다.
페르네가 멍하니 그 머리를 받아 들었다.
“이거면 됐나?”
“…….”
페르네와 죽은 바제스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털썩.
페르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바제스의 사망 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세른을 강타했다.
길거리에 시체를 장식했던 잔인함 때문에 그 악명은 시민들에게도 퍼져 있었다. 아세른의 모든 주점에서 저마다 화젯거리를 씹어 댔다.
“바제스? 그 망나니 새끼가 죽었다고? 누구한테?”
“몰라. 누가 죽여 달라고 의뢰라도 한 것 아니야? 워낙 미친 새끼여야 말이지. 아니면 귀족 나으리들께서 처리하신 게 아닐까?”
“그런 건 관심 없고. 누군지 몰라도 바제스 그 새끼 손도 못 쓰고 뒈졌다나 봐. 용병단에 아무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최근 대장간에서 그 새끼들 무기 중고로 팔리고 있는 것 봤냐?”
“와, 진짜 무섭네. 근데 바제스 같은 놈이 또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아니길 바라야지. 뭐, 어쨌든! 망나니의 죽음에 건배!”
바제스의 죽음.
누군가는 기뻐하며 술을 들이켰고, 누군가는 바제스와 같은 놈이 또 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민들의 이야기.
그레이에서 활동하는 자들은 달랐다.
바제스는 꽤나 거슬리는 경쟁자였다. 대놓고 맞붙자니 잃을 게 많았고, 같이 지내자니 놈은 하이에나같이 의뢰들을 빼앗았다.
그런 놈이 사라졌으니 자연스레 그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탐욕을 드러냈다. 분명 얼마 안 가 바제스의 이름은 잊히겠지.
그리고 바제스가 아닌, 그를 죽인 자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자도 있었다.
아세른의 대부업자, 바르톨이 턱을 쓸었다.
“페르네에게 고용된 자에게 바제스의 목이 날아가다니. 아세른 바깥에서 온 자인가…… 아니면 해외에서 들어온 자일지도 모르겠군.”
흥미롭다.
다 망해 가던 페르네가 어디서 그런 자를 데려왔을까.
“알아볼까요?”
“아직은. 고작 바제스 따위를 죽였다고 그렇게 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지금 같은 혼란한 시국에 나타난 외부인이라.”
과연 왕국에 녹아들지, 아니면 불순분자가 될지.
뭐가 됐든 평범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야 한때 왕국 그레이를 휘어잡던 페르네가 망하기 직전에 데려온 존재니까.
“이러다 빚을 다 갚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조합’에서는 페르네의 채무 권리를 넘기라고…….”
“권리를 넘기라고 했지, 강제로 빚을 지우라는 말은 안 했잖아? 페르네가 구렁텅이에서 나오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지. 돈만 잘 갚으면 아무 상관 없다고.”
퉷.
바르톨이 침을 뱉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합 놈들이 맘에 안 들어. 귀족을 등에 업고 날뛰는 좆같은 새끼들…….”
“하지만 조합의 영향력이 너무 강합니다. 자칫 적대하게 되면 피해가 클 텐데요.”
“그래서 조합이든 아니든 가만히 내 일만 하고 있잖아. 그리고 아직 뭘 선택할 때가 아니야. 왜냐하면 내 직감이 이렇게 속삭이고 있거든.”
지금은 베팅할 때가 아니라 지켜볼 때라고.
바르톨은 이러한 직감을 믿어 왔고, 그 결과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빈민가에서 악착같이 올라온, 현 아세른의 권력자 중 하나.
그것이 대부업자 바르톨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거다. 근거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그런 바르톨의 근거 없는 확신에, 부하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 * *
페르네는 정말로 이를 악물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베르덴이 가져온 장비를 여러 대장간에 팔아넘겼고, 의뢰인에게 그토록 원하던 바제스의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장물아비에게 보석과 장신구도 적당히 값을 받아 넘기기도 했고.
그 결과 그녀에 손에 남은 건 무려 3천만 엘크의 거금.
베르덴에게 줄 보수를 제외하고, 의뢰를 통해 정보상이 받는 수수료와 바제스의 재산을 정산하면서 베르덴에게 받은 돈이었다.
피곤에 찌든 페르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걸로 한동안 이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원금의 일부를 상환하기까지! 꽉 막혀 있던 숨구멍이 조금이나마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페일 님! 감사합니닷!”
훌쩍 떠나 버린 옛 선배에게 감사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오랜만에 시원한 공기를 맛보고는 곧바로 사고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애셔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거지?’
마법사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최근 경황이 없다 보니 공국에 대한 정보가 갱신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나중에 정보망을 원상태로 복구하면 한번 알아봐야겠지.
그렇게 판단한 페르네가 지폐 뭉치를 한 아름 들고 방에서 나갔다.
적막한 그녀의 주점에서 베르덴이 홀로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앞에 차곡차곡 돈을 올려놨다.
“총 1억 3,800만 엘크. 제대로 확인했으니 액수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예요.”
베르덴이 신문을 접고 보수를 챙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페르네가 페일의 소개장을 떠올렸다.
[2등급. 극진히 대할 것.]
말인즉슨, 의뢰 주선뿐만 아니라 원하는 정보도 있다는 뜻. 그렇지 않았다면 페일이 굳이 이런 소개장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페르네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정보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