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왕국행 (2)
에스티리아 왕국과 리비안트 공화국의 국경.
그 사이에는 두 개의 장벽이 양쪽으로 세워져 있었다.
마탑에 직접 의뢰하여 마법으로 만들어 낸 벽으로, 각각 공국과 왕국의 것이었다.
일반적인 국경이라면 하나만 있어야 정상이나 둘은 전쟁으로 인해 갈라진 나라다. 작은 마찰이 큰 불로 번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장벽 사이에는 검문소가 있다.
공국과 왕국 사이에 오가는 모든 물류는 물론이고 여행객과 같은 통행자들도 관리 및 감독한다. 규모가 꽤 크기에 여기에 눌러앉는 사람도 많았다.
음식점이라도 차린다면 어지간히 맛이 없지 않는 이상 망하진 않을 테니.
그런 관점에서 보면 검문소는 하나의 도시라고 봐도 무방했다.
양국 간의 중립성을 상징하는 장소이기에 이곳을 담당하는 자들은 민간에서 나온 터라 이렇다 할 충돌은 없었다.
공국과 왕국은 서로 멀리서 감시하기만 할 뿐.
검문소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추위에 떨었다.
“아흐, 이러다 추워 뒈지겠네. 야, 신참! 근무 교대 한 지 얼마나 지났어?”
“예! 8분 지났습니다!”
“고작?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개뿔!”
“악!”
정강이를 차인 신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꼬우면 그만두라지. 날씨가 혹독하긴 하나 경비 일로 이만큼 봉급을 많이 주는 데도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워낙 고여 버려서 내리갈굼이 심하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눈보라가 거세졌다.
선임 병사는 모포를 두르고 구석에 쭈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신참은 선임 병사를 흘기며 성벽 아래로 침을 뱉었다.
‘얼어 뒈졌으면.’
그러던 그때, 눈보라 속에서 금색과 흑색으로 치장된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거친 말밥굽 소리에 선임 병사가 일어났다.
“저건…… 이카로스 마차잖아?”
“그게 뭡니까?”
“검문소 경비라는 놈이 그것도 몰라? 하여튼…… 저건 국제 마차다. 탑승자의 입국 수속부터 시작해서 전부 전문적으로 처리해 주는 마차. 엄청 비싼데다가 아무나 고용할 수 없는 건데…….”
귀족인가? 아니면 돈 많은 상회의 간부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트집 잡힐 일이 없게 하는 게 최우선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선임 병사가 경비 생활 7년간 터득한 단 하나의 노하우.
“당장 가서 경비대장님 모셔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책임자에게 떠넘기는 것.
이곳은 검문소였다.
* * *
“고객님의 입국 처리는 저희가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다만 시간이 걸리니 오늘 하루는 검문소에서 지내셔야 할 겁니다. 여관은 이미 준비해 뒀으니 잠자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이카루스 마차의 운전기사가 경비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검문소장에게 향했다.
원래는 호위 서비스도 있으나, 베르덴은 거절했다. 대신 그만큼 비용의 일부를 깎았다.
베르덴은 눈이 쌓인 작은 도시를 둘러봤다.
‘여기가 검문소군.’
생각보다 사람이 많다.
상단이나 여행객 또는 일자리를 찾는 용병과 모험가들이 가득했다. 검문소에도 의뢰는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덴은 천천히 도시를 거닐며 가장 큰 주점을 찾았다.
‘이곳에 페일의 정보원이 있다고 했었지.’
에스리티아 왕국의 최신 정보를 알 수 있는 장소.
안으로 들어가 바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여성 바텐더가 베르덴에게 다가왔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베이커 3년산 레드와인하고 훈제 오리고기 하나.”
그렇게 말하고 책상을 두 번 두들겼다.
여성 바텐더의 눈이 호선을 그리더니, 책상을 한 번 두들겼다.
정답이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가격이 싼 만큼 딱히 흥미가 돋는 맛은 아니었다.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있자 술에 취한 주정뱅이 하나가 비틀비틀 다가오더니 베르덴의 옆에 앉았다.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애셔 님. 어떤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목소리.
주정뱅이 연기 하나는 일품이었다.
“왕국에 대한 최신 정보.”
“최신 정보라. 다행히 도움드릴 게 많을 것 같군요.”
주정뱅이가 턱짓으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공국과 왕국에서 온 공고문이 게재되어 있었는데, 그중 ‘비행 금지령’이라고 적힌 왕국의 공고문이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달 전쯤, 어떤 마법사가 백작의 자제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작이 어떻게든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더군요.”
귀족 자제에게 중상을 입히다니…….
그런데 그렇다고 왕국 전역에 비행 금지령까지 내린다고?
“그게 에스티리아 왕국입니다. 귀족의 권위는 공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엄청나죠. 명분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움직이는 게 대부분인 귀족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은 더욱.”
“상황이라면?”
“현재 차기 왕위를 두고 다투느라 전국이 어수선한 상태입니다.”
왕은 늙었다.
그렇기에 왕자들은 자신의 파벌을 형성하여 암중에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 왕이 왕좌에서 내려올 때, 누가 가장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왕이 결정된다.
“1왕자, 2왕자 그리고 3왕자는 몰래 국고를 털어서라도 파벌을 유지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1왕자가 가장 강합니다. 그 거대한 암흑가를 등에 업었으니. 그리고 파벌 싸움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중립자들은 1왕녀에게 몰렸습니다.”
“왕녀는 왕위 다툼에서 배제된 건가?”
“여성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애초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왕녀는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요.”
왕녀는 현재 백치에 가까운 상태다.
어릴 적, 폭발 사고로 인해 그 후유증으로 머리를 크게 다쳤고, 평생을 휠체어 위에서 그저 죽은 눈으로 살아왔다.
남은 건 극도의 자기방어기제뿐.
“그래서 세간에선 인형(人形) 왕녀라고도 합니다.”
“치료는?”
“아시다시피 뇌를 다치면 신성력으로도 정상적인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교황이나 성녀급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리고 설령 치료가 가능하다 해도 왕자들이 반대할 겁니다. 왕녀는 한때 천재라 불릴 정도로 머리가 영특했으니, 아무리 가능성이 적어도 왕자들로선 경쟁자를 늘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왕국은 정치적인 내전을 겪고 있다.
기득권 계층이 저마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민생에 전혀 관심이 없다. 시민들은 각자도생의 시대를 버티고 있었다.
“보통은 살점이 썩으면 도려내기 마련입니다. 아파도 그게 더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왕국은 다릅니다. 살점이 썩고 고름이 차올라도 신경 쓰지 않죠, 그게 자기한테 피해를 주기 전까지는. 그래서 왕국은 옛적부터 안에서 썩어 버렸습니다. 그게 제가 지금까지 봐 온 에스티리아 왕국입니다.”
주정뱅이의 목소리엔 혐오감이 깃들어 있었다.
베르덴은 다른 정보를 물었다.
직전의 정보처럼 큰 건 아니었으나, 에스티리아 왕국의 정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보값을 지불한 베르덴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 * *
다음 날, 베르덴은 순조롭게 검문소를 떠났다.
확실히 이름 높은 국제 마차답게 가만히 있어도 복잡한 입국 절차들을 대신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왕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분증까지.
‘돈값 제대로 하는군.’
베르덴이 마차 바깥을 바라봤다.
이곳은 에스티리아 왕국령.
눈으로 뒤덮인 하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거리가 멀지 않아서 그런지 공국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르덴이 페일에게서 얻은 지도를 꺼냈다.
그중 베르덴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있는 도시에 시선을 향했다.
도시 아세른(Asern).
이곳은 페일이 소개장을 써 준 그레이의 정보상 ‘페르네’가 활동하는 장소였다.
‘치안이 상당히 안 좋다고 그랬었지.’
주정뱅이에게 들은 정보로는 그러했다.
시장 겸 영주 노릇을 하는 백작부터 시작해서 빈민까지 멀쩡한 부분이 없다고. 부정부패, 그것이 에스티리아 왕국.
그렇기에 베르덴은 기대가 되었다.
얼마나 의뢰의 규모가 클지.
베르덴의 발판이 되어 줄 강자가 있을지 말이다.
‘공국보다 나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닥치는 대로 들이받을 생각은 아니다.
페일에게서 의뢰를 받았듯이, 자신만의 기준을 지키며 움직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베르덴의 성장을 위해서.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고객님, 아세른에 도착했습니다.”
베르덴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거대한 마을이 원형으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오래된 건축 형태군. 안전 때문에 이런 형태는 금지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미 지어진 건 어쩔 수 없기에, 그럴 경우 마을을 지키는 성벽은 짓는 게 의무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런 벽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마을 최외곽에서는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흘끗 거리를 바라보니 사람들은 익숙한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아세른의 관문을 통과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린 베르덴이 도시 내부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번잡하긴 하나…… 공국과는 달리 뭔지 모를 불쾌감이 느껴졌다.
“이카로스 마차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여행 되시길.”
마차가 떠나가고 베르덴은 혼자가 되었다.
점심이 지나고 시간이 꽤 흘렀으나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딱히 식사를 할 생각도 없었고.
‘먼저 다이나 은행부터 방문해야겠군.’
계좌를 개설하고 돈을 예금한다.
그다음으로 정보상 페르네를 만나면 되겠지. 순서를 정한 베르덴이 발을 옮겼다.
* * *
연보랏빛의 머리칼을 가진 페르네.
그녀는 왕국 그레이의 유능한 정보상이였으며 터줏대감이기도 했다.
한때는.
“꺄아아아아악!”
페르네는 미치기 직전이었다. 아니, 벌써 반쯤은 미쳐 있었다.
페르네는 아껴 두고 아껴 두었던 보드카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다.
꿀꺽, 꿀꺽!
보드카 한 병을 단번에 비웠다.
그런데도 현실은 여전했다. 비틀거리다 이내 바닥에 드러눕고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 어떻게 하지?”
페르네는 정보상으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다. 실제로 바깥에서의 평가도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저 힘없고 빚더미에 앉은 여자였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레이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다만 억울한 건 단순히 정보상으로서의 실력으로 밀린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개새끼들……!”
귀족과 부호를 후원자로 둔 신생 정보상들.
놈들은 너무 강했다. 삽시간에 그레이를 장악했고 온갖 고객들을 빼앗아 갔다. 의뢰를 주선해 주는 일도 마찬가지.
말 그대로 돈을 쏟아붓는데 그녀 혼자로선 저항할 수가 없었다.
여러 정보상을 흡수해 ‘조합’을 만들기까지 하니 정보의 양과 질로 우위을 점하기도 어려웠고.
페르네도 조합에 가입하라고 제의가 들어오긴 했었다.
하지만 거절했다. 정보상으로서의 오기였다. 어쩌면 자부심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참혹했다.
아무도 정보를 사러 오지 않는다.
누구도 의뢰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돈까지 빌려 연줄을 유지했으나 기어코 끊어졌다.
이 바닥이 그러했다. 의리 따위는 없고 오로지 돈만을, 자신만의 이득만을 바라보는 괴물들.
‘나도 공국으로 갈걸…….’
페르네가 훌쩍거리며 뒹굴거렸다.
그때, 선배였던 페일을 따라갔더라면 좀 달랐을까.
갑자기 왕국을 떠난다고 하길래 내심 멍청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는데 멍청한 건 자신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페일은 공국 그레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에 비해 자신은 경쟁에서 밀려난 떨거지였다.
‘아니, 당장은 후회할 때가 아니야.’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악명 높은 고리대급업자에게 수천 만 엘크나 빌렸는데 이자조차 제대로 갚지 못하는 상황이다.
벌써 1개월이 밀렸다.
2개월이 지나면 계약대로 강제 추심이 가능하다.
페르네에게 남은 건 몸뚱이뿐이다.
즉, 불법 노예가 되는 것이다. 여자로서 어떤 일을 당할지는 가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도망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접었다.
자신이 이 도시를 벗어나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분명 얼마 안 가 잡힐 게 분명하다. 그리고 더 끔찍한 일을 당하겠지.
지금이라도 죽어야 하나?
그렇다고 죽긴 싫었다.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너무 무섭기도 하고…….
방법이 없다.
이것도 저것도 싫다.
페르네는 궁지에 몰렸다.
누군가 동아줄이라도 내려 주지 않으면 그대로 갇혀 죽을 것이다.
“아이고, 내 신세야…….”
페르네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러던 그때, 문이 열리며 햇빛이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돌린 페르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서 있었다.
* * *
‘……여기가 맞는 건가?’
베르덴은 낡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둥둥 떠다니는 먼지와 케케묵은 냄새. 그 안에서는 한 여성이 훌쩍거리며 바닥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베르덴이 페일이 준 정보를 다시 떠올리고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
‘페르페르 주점’.
뭔가 어린아이가 지은 것 같은 이름이지만 페일에게 들었던 간판의 이름과 같았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연보랏빛 머리색을 가진 여성이 물었다.
“누구세요?”
“저는…….”
“아, 설마 손님?! 잠깐만요! 의자 좀 가져 올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페르네는 헐레벌떡 움직였다.
다급하게 자리를 준비한 그녀가 베르덴과 마주 앉았다.
“지금은 의뢰는 안 되고 정보만을 팔고 있어요! 어떤 정보를 원하세요? 제가 아는 거라면 싸게 드릴게요!”
정보가 필요한 건 맞는데…….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페일의 소개장을 꺼내 건넸다.
“소개를 받았습니다.”
“소개……? 그럼 손님이 아니야……?”
쿵.
페르네가 책상 위에 쓰러졌다.
삽시간에 울상이 된 그녀가 건네받은 소개장을 바라봤다.
대체 갑자기 뭔 소개장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최 짚이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 위에는 익숙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페일?”
페르네가 곧바로 소개장을 열어 내용을 봤다.
거기에는 단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2등급. 극진히 대할 것.]
에? 이게 뭐야?
페르네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베르덴이 로브를 젖혔다.
“어…….”
약간 어두운 회색의 머리칼과 선명한 푸른 눈동자.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비범함 그 자체였다
순간 페르네가 멍해지면서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페일에게 2등급 고객이라는 건 거물이라는 소리!’
그리고 소개장을 받았다는 건 의뢰를 주선해 줄 정보상, 자신을 찾아왔다는 뜻이리라.
페르네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베르덴의 옆에 무릎을 꿇은 그녀가 그의 로브 자락을 움켜잡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베르덴이 눈을 깜빡였고 페르네가 소리쳤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뭐야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