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왕국행 (1)
파이테 남작은 공국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얻은 공로로 귀족이 된 케이스다.
본래 남작이란 작위는 세습이 불가능하나, 파이테 남작은 다른 남작과 비교해 영지를 잘 다스렸기에 공왕에세 세습을 허가받았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파이테 영지가 워낙 낙후된 곳에 있어 아무도 영주직을 맡을 생각이 없는 게 컸다. 출세를 바라는 귀족들에겐 유배지로 여겨졌으니.
‘운이 좋군.’
파이테 남작은 소소하게 살아가는 걸 좋아했다.
입맛에 맞는 와인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따로 없는데 출세는 무슨 출세. 남작은 자신의 분수를 진즉에 깨달은 지 오래였다.
작은 영지를 다스리며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이른 아침.
모닝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파이테 남작. 그가 신문을 주욱 읽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드란 후작가가 멸문했다고?”
내용엔 그 이유가 게재되어 있었다.
다비르크 백작 살해나 마을 사람들을 납치한 인신 매매 등 설령 왕족이라고 해도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입에 담기도 힘든 무거운 범죄들이었다.
“공국의 기둥이 어째서 이런 짓을?”
당연한 의문이었다. 부족한 게 없는 가문에서 도대체 왜.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유가 뭐가 됐든 이미 라비슈른 후작에게 처형당했으며 그 죄조차 명백하게 드러나 있으니.
그가 가드란 후작가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남작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애초에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정도로 머나먼 존재라 아는 것도 없었지만.
그러다 신문에서 익숙한 이름을 봤다.
애셔.
수개월 전, 남작의 영지를 구해 준 마법사였다.
“허, 애셔가 죄를 밝혀내는 데 큰 역할을 해낸 모양인데. 첫 인상부터 범상치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군.”
파이테 남작은 몇 번이나 애셔를 신문에서 접했다.
비르온 영지에서 강력한 언데드를 토벌한 것이나,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을 토벌해 도시를 구한 것 등 말이다.
파이테 남작은 내심 뿌듯했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제대로 된 보답을 해 준 사실이 말이다.
신문을 다 읽은 남작은 평소처럼 산책을 나섰다.
나이가 40 줄이 넘은 지 꽤 되었으니 체력 관리는 필수였다. 옷을 단단히 껴입고 바깥으로 나섰다. 눈은 오지 않았으나 추위가 제법 매섭다.
남작은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작은 영지를 바라보며 성벽 위를 거닐었다.
“……응?”
저 멀리 누군가가 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손님이 찾아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그제서야 불청객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애셔?”
봄의 인연이 겨울에 다시 찾아왔다.
* * *
“여기, 선물입니다.”
무려 2천만 엘크짜리 최고급 레드와인.
전에 남작의 연회에서 먹었던 와인과 비슷한 종류의 것으로 구했다. 도수가 높지 않고, 새콤하면서 달달한.
당연하게도 금액의 자릿수가 다른 만큼 향기와 맛이 차원이 다를 것이다.
파이테 남작이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그럼 마개부터 따겠네. 몸도 데울 겸 같이 마시도록 하지.”
“그건 놔두시죠. 같이 마실 건 따로 준비해 놨습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다른 와인을 꺼냈다.
이것 또한 수백만 엘크는 하는 고급 화이트와인이었다. 입고 있는 장비부터 시작해 공간가방에다가 값비싼 와인까지 선물로 줄 정도라니.
전에 봤을 때와는 그야말로 딴판이었다.
“허허, 거참 엄청나게 출세했군.”
파이테 남작이 슬쩍 선물받은 와인을 하인에게 넘겼다. 꽁꽁 잘 보관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베르덴과 남작은 서로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주고 그 맛을 난롯불 앞에서 천천히 음미했다. 안주로는 마침 저번 주에 구입한 치즈를 준비했다.
몸에 취기가 살짝 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남작이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준비하고.”
“부탁할 게 하나 있습니다.”
“음, 자네와 같은 대단한 마법사가 부탁이라니. 뭔가 무섭군.”
“어려운 건 아닙니다. 남작님의 조카를 소개받고 싶습니다.”
“조카? 조카라면 메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이 잠시 턱을 쓸며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에스리티아 왕국에 갈 생각인가?”
“맞습니다.”
파이테 남작의 조카 ‘메딘’은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푸른 구름’이라는 이동 상단의 호위. 상단 전체가 왕국 전역을 주유하는데, 상단주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메딘은 높은 봉급을 받으며 간부로서 자리 잡고 있다고 페일에게 들었다.
“어째서인지 물어도 되나?”
“경매장의 초청권 때문입니다.”
“아, 경매장. 그럼 이해가 되는군. 확실히 잘나가는 상단에는 경매장의 초청권이 우선적으로 배부되니. 남는 건 시중에 풀리기도 하고. 그래, 메딘 정도면 구할 수 있겠지.”
남작도 왕국 출신이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어렵지 않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바로 소개장을 써 주겠네. 그런데…… 괜찮겠나?”
“어떤 게 말입니까?”
“자네도 아는지는 모르지만 왕국은 공국과 다르네. 솔직히 말해 꽤나 무서운 나라지. 나도 벌써 이십 년이 넘도록 가 본 적은 없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은 하나하나 결코 좋지 않네. 물론 자네가 엄청난 마법사임은 알고 있지만…… 왕국이 가지고 있는 악의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네.”
이미 알고 있다.
페일, 방주 그리고 공왕 등에게 왕국이 얼마나 어두운 나라인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베르덴이 주저할 이유가 될 순 없었다.
“저도 만만하진 않습니다.”
그런 대답에 남작이 웃음을 떠뜨렸다.
“하하하, 그렇지. 자네는 결코 만만할 수가 없지.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 그래도…… 노파심에 한 번 더 말하겠네.”
남작이 진지하게 말했다.
“왕국의 어둠은 깊네.”
그러니 결코 집어삼켜지지는 마시게.
* * *
소개장을 받은 베르덴은 왕국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했다.
먼저 은행에서 돈을 전부 인출했다. 공국에는 마그누스 은행이 있지만 왕국에는 다이나 은행이 있다.
서로 제휴가 되지 않아 이렇게 현금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10만 엘크짜리 지폐가 100개 뭉친 현금 다발 약 백 뭉치.
자루를 몇 개 산 다음 꼼꼼히 공간가방에 차곡차곡 쌓았다. 거기다 보존 식품과 이런저런 물건을 챙기다 보니 공간가방을 거의 꽉 채웠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만약 그랬다면 주저앉았겠지.
그 후, 베르덴은 페일을 통해 ‘국제 마차-이카로스(Icarus)’를 고용했다.
국경을 넘어서까지 움직이는 게 국제적으로 허가된 마차 회사. 돈도 돈이지만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이용할 수 없는 서비스였다.
“에스티리아 왕국까지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정중한 운전사에게 대접을 받으며 마차 안에 들어섰다.
고정된 책상과 소파. 내부는 오직 일인용으로 개조되어 있었고 겨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따스했다.
베르덴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바깥으로 보이는 공국의 풍경. 한동안 여기와는 작별이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고객님.”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출발하며 풍경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렇게 베르덴은 에스리티아 왕국으로 향했다.
* * *
“다섯 번째 송곳니가 죽었다.”
서늘한 음성이 공간을 휘감았다.
잠시 정적이 이어진 후, 이번엔 노인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루펠은 붉은 조각의 실험과 박사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을 맡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죽었다는 건…….”
“실패한 걸지도 모르겠지요.”
“쯧. 한심하긴.”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와 오만한 목소리가 뒤섞였다.
혼잡해진 분위기를 정리한 건 서늘한 목소리였다.
“실패하지 않았다. 다만 방주에게 당했을 뿐.”
“그렇다는 건 박사 또한……?”
“정황상 둘 다 죽었다고 봐야겠지.”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짓눌렀다.
분명 글러트니의 부활과 신인류의 탄생이라는, 원대한 계획이 머지않았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서늘한 목소리, 글러트니의 첫 번째 송곳니가 말했다.
“신인류의 탄생은 지금으로선 좌절되었다. 하지만 나는 붉은 조각으로 글러트니의 장기가 가진 능력을 깨울 수 있다는 건 인지했다. 즉, 글러트니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소리.”
실험 자료는 날아갔지만 다시 시작하면 된다.
붉은 조각의 제조 방법은 남아 있었으니까. 필요한 건 재료뿐.
“재료라. 그렇다면 에스티리아 왕국이 어떻소이까? 수십 년 전 방주에게 토벌당하긴 했으나, 지금으로선 적기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아니. 그곳은 이미 다른 어둠으로 물들었다. 섣불리 나섰다간 재료를 구하긴커녕 오히려 피해를 입을 테지.”
“그럼 어디로 갈 것인가?”
“서쪽.”
첫 번째 송곳니가 이빨을 드러냈다.
“블랙 아워와 보헤미른 마탑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간다.”
* * *
어렸을 때부터 베르덴은 특이했다.
평소에는 다른 아이처럼 천진난만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려고 했다. 고집이 어찌나 센지 고아원의 원장님이 말려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로벨린은 그런 베르덴을 봐 왔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나중가서는 그냥 일상이 되었다. 하루종일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익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덴이 마법에 관심을 가졌다.
아마 전직 종군 마법사라고 하던 이웃 할아버지가 손에서 피워 낸 불꽃을 본 이후로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떼를 써도 베르덴이 마법을 가르침받는 일은 없었다.
보통 아이라면 거기서 포기했겠지.
하지만 베르덴은 달랐다. 기어코 독단으로 마탑에 지원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로벨린은 상상했다.
베르덴이 사라진 고아원을, 그가 없는 앞으로의 허전한 일상을.
고민은 짧았다.
“그럼 나도 같이 갈래.”
그렇게 같이 보헤미른 마탑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 강제적으로 떨어져야 했지만, 밖에서 마법 교육을 받고 마탑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베르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계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도중에 이론을 도둑질했다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들리긴 했으나 천만에.
로벨린이 아는 베르덴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변함없이 그를 믿었다.
그렇기에 후회했다.
과거의 로벨린이 현재의 그녀에게 말한다.
‘그날 억지라라도 마법 도시에 데려갔다면 베르덴은 죽지 않았을 텐데.’
암전하는 꿈속.
로벨린은 마음은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르륵. 로벨린이 침대에서 눈을 떴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시선을 아래로 향해니 몸 곳곳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포션을 마시고 루아스교의 성직자에게 치료를 받았음에도 이 정도라니.
그녀가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지 알 수 있었다.
탁. 탁.
목발을 써서 복도로 나섰다. 일정 거리마다 마법 물품으로 빛을 밝히고 있었으나 예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마탑의 동력원을 대체할 것을 찾지 못한 터라, 마탑의 넓은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다.
복도를 지나자 곳곳에서 로벨린을 보며 수근거렸다.
“쟤지, 얼마 전에 4위계에 오른 애가? 근데 왜 저 꼴이야?”
“며칠 전에 블랙 아워의 마법사와 마법전을 벌였다던데.”
“그것도 4위계 상위에 이른 마법사였다더군. 대체 어떻게 이제 막 4위계에 오른 자가 이길 수 있었던 거지?”
“특이 형질 때문이겠지. 알잖아? 로벨린의 화염이 얼마나 강력한지.”
“화염 마법밖에 쓰지 못하지만…… 확실히 동급의 마법사는 상대도 안 되긴 하지. 오죽하면 마탑주께서 토벌대에 들이시고 아끼실 정도니.”
“저번에 싸우는 걸 봤는데 아예 형체도 남김없이 태워 버리던데. 그것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두려움 등.
갖가지 시선이 로벨린에게 향했다. 그녀는 그런 눈길들을 무시한 채 복도를 지나치고는 임시 마력 구동 엘레베이터에 탑승했다.
마탑의 상층에 올라 마탑주와 대면했다.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가 물었다.
“듣던 것보다 멀쩡하구나. 그래, 상대는 어땠나?”
“문제없었어요.”
“크흐흐, 이제 갓 4위계에 올라 놓고, 4위계 상위, 그것도 전격 마법사를 상대로 문제없었다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마법사는 별로 없을 거다.”
로벨린은 가만히 며칠 전을 떠올렸다.
고위 속성의 전격을 다루는 4위계 상위 마법사. 속성으로 보나 위계로 보나 로벨린이 우세한 건 하나도 없었다.
하마터면 <낙뢰>에 맞고 즉사할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피해 냈고, 마법전을 길게 끌었다.
전격 마법사의 약점은 지속성. 강력한 위력의 마법을 다루나 그만큼 마력 소비도 엄청나다. 로벨린은 전격에 노출되어 전신에 화상을 입었으나 죽지 않았다.
결국 상대는 지쳤고 그 틈을 노려 불로 태워 버렸다.
승자는 로벨린이었다.
“아주 잘했다, 로벨린. 지금 이 상황에 나를 흡족하게 하는 건 너와 내 제자들뿐이구나.”
“약속은요?”
“약속이라. 그래, 물론 지켜야지.”
발로크 베시아스가 서랍에서 마핵을 꺼냈다.
“너는 블랙 아워의 지부를 토벌하면서 위계 이상의 공적을 세웠다. 화염 마법에 특화된 특이 형질 덕분이겠지. 하지만 아직 미숙하다. 너는 배울 게 많고 성장할 길이 멀다. 지금 같은 마탑의 위기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건 손해다.”
그러니.
“내가 도와주마.”
로벨린이 마핵을 받았다.
잠시 마핵을 바라보던 그녀가 주먹을 쥐고는 마탑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발로크 베시아스에게 마핵은 투자를 의미한다.
즉, 지금 이 순간부터 로벨린은 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지원을 받을 것이다. 마탑주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마탑의 주인이 될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발로크 베시아스가 웃었다.
“나의 네 번째 제자가 된 걸 환영한다, 로벨린.”
로벨린은 기쁘지 않았다.
이건 그저 수단이다. 강해지기 위한 수단.
목적은 그저 하나뿐이었다.
‘베르덴.’
그를 죽인 블랙 아워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 그때까지 로벨린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