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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92화 (92/366)

92화 글러트니의 송곳니 (5)

글러트니의 위장은 완벽한 폐쇄 공간이었다.

잠시 입구가 열린 사이, 방주가 공간 이동으로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긴 했으나 그건 극히 예외였다. 정확한 좌표와 타이밍.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불가능했을 우연이었다.

글러트니의 이능은 구인류에게 허락되지 않은 지고한 힘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런데 그걸 베르덴은 보란 듯이 무시했다.

루펠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설마 몸에 글러트니의 조각을 품고 있었던 건가? 아니,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루펠이 글러트니의 송곳니 중 하나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마도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마법을 구사한 것.

도저히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방대한 마력량.

모든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원소 마법사로서의 정점에 가까운 재능.

그 의심은 베르덴이 글러트니의 위장을 단신으로 빠져나온 것으로 확신으로 변했다.

신인류.

글러트니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루펠의 관점에서 봤을 때 베르덴은 구인류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였다.

그걸 인식하자 루펠의 눈에 새로운 게 비쳤다. 베르덴의 푸른 눈동자 안에 숨어 있는 짙은 증오와 분노가.

그것이 증명한다. 그가 초월한 한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결과임을.

상처를 손아귀로 틀어막은 루펠이 비틀거렸다.

가쁜 호흡을 내쉬며 베르덴에게 말했다.

“……너는 글러트니가 악으로 보이나?”

“그럼 아닌가?”

“천만에. 글러트니의 이념은 필연이고 숙명이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고기를 먹음으로써 근육이 붙고, 채소를 먹음으로써 부족한 영양분을 얻지.

섭식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이며 본능을 표방한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잘 먹는다고 해도 그저 한계 내에서 벌어지는 작용이다. 평범한 사람은 뭘 먹든 간에 곰보다 강한 힘을 얻을 수 없듯이.

인간의 진화는 그 한계를 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글러트니가 하는 것은 그 한계를 깨뜨리는 일이고.

인류는 나약하다.

병으로 죽고, 살해당하고, 수명도 짧다. 그래서 인류는 섞일 수 없다. 그래서 약소 종족이다

하지만 글러트니의 이상이 이뤄지면 달라진다.

병으로 죽지 않고, 군림하며, 수명도 길어진다. 인류는 뒤섞인다.

선천적으로 유약한 몸을 가졌던 루펠.

언제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에 떨었던 그였기에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글러트니와 함께했다. 그런 죽음의 공포를 더는 겪고 싶지 않았기에, 더 나아가 그런 죽음의 공포를 겪는 인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셔, 너도 잘 알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눈을 하고 있지 않았을 테니.”

맞는 말이다.

태생적인 베르덴의 한계는 1위계였고, 그로 인해 마탑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베르덴은 루펠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타고난 운명을 비틀었고 하늘을 거슬렀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들었다.

“그만 끝내지.”

마력이 술렁이자, 루펠이 어금니를 깨물며 전력으로 검을 내던졌다.

염동력으로 비틀었으나 부족했다. 칼날이 베르덴의 허벅지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있던 다용도로 쓰던 단검을 움직여 루펠에게 던졌다.

루펠이 쳐 내며 박살 냈지만, 그것이 베르덴의 노림수였다. 단검의 파편이 잠시나마 루펠의 시야를 빼앗았다.

<투명화>

“크윽……!”

루펠이 곧바로 눈을 떴으나 이미 베르덴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 잠깐의 당혹감. 그 기회를 베르덴이 놓칠 리가 없었다.

비행을 쓴 베르덴이 사각에서 루펠을 향해 스태프를 강하게 내질렀다.

콰아앙!

충격에 투명화가 풀렸다. 베르덴이 스태프로 루펠의 가슴을 밀어내고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짓눌렀다. 가슴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베르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혹한의 반지와 마안을 발동했다.

<스테이시스>

오른쪽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혹한의 얼음이 루펠을 뒤덮기 시작했다. 루펠이 스태프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남은 기운을 전력으로 끌어모아 마법에 저항했다.

죽이기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 서로가 전력을 다했다.

우직직!

스태프가 부러졌다.

아직이다.

곧장 부러진 스태프를 루펠의 심장에 찔러 넣고, 그의 목을 움켜잡아 마법을 이어 갔다. 순식간에 얼어붙어 가는 시야.

죽음을 직감한 루펠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살…… 려……!”

쩌저저적.

루펠의 몸이 얼어붙으며 이내 산산이 부서졌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의 위장. 아마도 글러트니의 장기로 보이는 것이 허공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남은 건 글러트니의 징표인 이빨 하나뿐.

더 이상 루펠은 재생하지 못했다.

루펠은 죽었다.

“후우…….”

베르덴이 한숨을 털어 내며 근처 나무에 기대앉았다.

마안을 과하게 사용한 터라 머리와 눈이 심하게 지끈거렸고, 막대한 양의 마력을 사용한 터라 정신이 나른했다. 일부 상처에서의 출혈도 심했다.

루펠은 강적이었다.

특히나 그 재생력은 가히 불사에 가까웠다.

베르덴이 쌓아 온 노력, 시간 그리고 운.

어느 하나가 부족했더라면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넘어섰다. 스스로 한 단계 성장했음을 느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두 개의 유리병을 꺼냈다.

“아껴 두길 잘했군.”

샐러맨더의 심장으로 만든 활력제 그리고 최상급 포션.

둘을 차례대로 마시자 포션의 효과가 증폭되었다. 그와 더해 리커버리 팔찌를 기동했다. 빠르게 상처가 아물고 출혈이 멈췄다.

당연히 마력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정신은 더없이 맑아졌다.

오른쪽 눈을 깜빡였다.

시야도 멀쩡했고 아프지도 않았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

그러던 중, 안개 속에서 기척을 느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가만히 주시하고 있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귀티가 나는 얼굴을 보아 평범한 신분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딘가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애셔.”

“방주의 일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두운 호수 일대를 통제하는 지휘관 역할을 맡았죠.”

사내가 루펠이 있었던 흔적에 시선을 향했다.

“다행히 송곳니의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치신 모양이군요.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분명 공국에 큰 혼란이 찾아왔을 겁니다. 따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아닌 모양이군요.”

근처 공간이 일렁였다.

루펠이 죽음으로써 글러트니의 위장이 붕괴된 것이리라.

잠시 후, 공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글러트니의 일원들은 전부 사망했다. 심지어 스위퍼들까지.

렌 발하그가 시체 더미 위에 피에 젖은 장갑을 던졌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로크가 바닥에 누워 가파른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부상은 있었으나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다.

‘음, 조급해지니 기술에만 의존하는군. 신체 능력을 더 키워야겠어.’

늘그막에 들인 제자를 어떻게 키울지 생각하며 시선을 공간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 후작이 있었다.

“하아, 하아…….”

쿨럭, 쿨럭!

후두둑.

피를 쏟아 낸 가드란 후작이 무릎 꿇었다. 검은 이미 부러진 지 오래였다. 그는 글러트니의 조각을 몸에 품고 있었으나 이식자는 아니었기에 재생력 따위는 없었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 친우인 라비슈른 후작을 상대했다. 서로 배운 검술은 달라도 실력은 비등했고, 신체 능력도 그러했다.

그런데 이기지 못했다.

스스로 옳은 길을 걷는 자.

잘못됨을 알면서도 걸어야만 했었던 자.

패인은 그 마음의 차이였다.

글러트니의 위장이 사라져 간다.

사체들이 공간과 함께 모습을 감췄고 살아남은 자만이 섬의 중앙으로 돌아왔다.

가드란 후작의 눈에 베르덴이 비쳤다.

공간을 벗어나 루펠을 쫓아갔었던 마법사. 그가 살아남았다는 건 자신의 아들이 죽었음을 의미했다.

“하하…….”

결국 전부 잃었다.

가드란 후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끝나 버렸군. 인간으로서, 아버지로서 모든 걸 내던졌는데도…….”

후회는 없었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러면 어땠을까, 저러면 어땠을까. 수많은 과거의 선택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했다.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뭔가 후련했다.

스스로 인간답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적어도 죽는 순간만큼은 본래의 자신으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드란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라비슈른의 검이 가드란의 목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가드란 후작이 답했다.

“가문의 하인들과 봉신 가문들은 부디 살려 주게. 그들은 글러트니와 전혀 무관하니.”

라비슈른 후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서걱!

빛이 번쩍이자 가드란 후작의 목이 떨어졌다. 곧바로 신경을 끊은 터라 많은 고통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친우의 목을 베는 감각. 그건 꽤나 사무치는 일이었다. 깊게 한숨을 내쉰 라비슈른 후작이 검을 납도했다.

피는 닦지 않았다.

안개 속을 비추는 태양 빛.

공국에 아침이 밝아 왔다.

* * *

가드란 후작가의 멸문.

공국의 기둥 중 하나가 무너진 여파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방주…… 정확히는 방주의 일원인 라비슈른 후작이 직접 사태를 수습했다.

그동안 베르덴은 라비슈른 후작가의 별장에서 요양했다.

후작가에서 직접 손상된 유자의 로브와 마흐바트의 가죽옷을 수리해 주었다. 베르덴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마력을 회복했다.

‘목걸이하고 스태프가 없으니 좀 허전한데.’

사실 지금 기준에서 그리 귀한 것들은 아니다. 약간 애착이 갔을 뿐이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미스릴을 첨가한 스태프가 몇 달도 안 되어서 박살 난 걸 보면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단 뜻이니까.

달리 말해서 험하게 다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새로 하나 구해야겠어.”

그래도 급한 문제는 아니었다.

큰 전투를 끝냈으니 당장 어디 가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을 터. 페일에게 의뢰가 와도 안 받으면 그만이다.

휴양도시 브리엔테, 3위계 마법사였을 때 약 5천만 엘크를 주고 스태프를 구했으니. 4위계 상위인 지금은 더 성능이 높은 스태프를 구해야 한다.

지금 베르덴이 가진 재산은 약 10억 엘크.

틈틈이 쓰면서 모아 둔 게 이 정도. 고작 1년도 안 된 사이에 번 것치고는 엄청난 수익이었다.

베르덴은 고민했다.

일단 적당히 쓸 무기를 구한 뒤, 돈을 더 모을지.

아니면 뛰어난 마법 물품 제작 장인을 찾아 오브(Orb)를 사용한 스태프를 제작할지.

전자를 택하기엔 후자가 아른거렸고.

후자를 택하기엔 모아 둔 돈이 애매했다. 그리고 장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무기가 없다고 해도 베르덴의 전력은 건재하지만 굳이 전투 방식의 가짓수를 줄일 생각은 없었다.

‘흐음…….’

생각이 길어졌다.

만약 적당히 쓸 스태프를 구한다고 한다면 얼마 정도가 좋을까. 적당히 3~4억 정도면 괜찮은 스태프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애셔 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베르덴이 곧장 방을 나서서 후작의 방에 찾아갔다. 마침 전달할 것도 있었기에 공간가방도 챙겨 갔다.

안쪽에서 허락이 들려왔다.

사용인이 문을 열자, 두 명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명은 라비슈른 후작, 다른 하나는 귀태가 어린 사내. 어두운 호수의 섬에서 베르덴과 마주했던 사람이었다.

“앉게나, 애셔. 그리고 자네는 차 좀 하나 더 내오고.”

“예, 가주님.”

하인이 물러가고 베르덴이 의자에 앉았다.

라비슈른 후작이 베르덴에게 사내를 소개했다.

“인사하게. 이분은…….”

“다시 인사드립니다, 애셔.”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리비안트 공국의 2왕자, 벨폰스 뤼인 디 리비안트입니다.”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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