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91화 (91/366)
  • 91화 글러트니의 송곳니 (4)

    글러트니의 위장에 집어삼켜지는 순간.

    베르덴은 곧장 리스너가 준 수정을 깨뜨렸다. 마력의 파장이 확산되었으나, 곧바로 방주가 나타날 수는 없었다.

    좌표가 왜곡되어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세에 몰린 루펠이 스스로 그 차단막을 허물었고, 갇혀 있던 마력 파장이 바깥으로 나오며 방주에게 감지되었다.

    방주는 곧장 공간 이동을 기동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갑판 위에 선 노인과 사내가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을 바라봤다.

    “불쾌한 공간이군요.”

    “글러트니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글러트니의 장기가 가진 이능인 것 같군. 허, 설마 글러트니가 여기까지 이뤄 낼 줄이야…….”

    글러트니의 장기를 이식받은, 다섯 개의 이빨.

    그들은 여타 이식자와는 차원이 다른 재생력과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고대의 이형종, 글러트니가 가진 힘을 재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 사실을 늦게 깨닫고 대응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가히 상상도 하기 싫어졌다.

    그래, 만약 한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사내가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방주로 향해 있는 무수한 시선. 사방에는 숱한 이형종의 잔해가 널려 있었고, 글러트니의 이빨로 추정되는 루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행동을 보아 나이에 맞지 않게 오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만한 수를 상대로 홀로 맞서고 있을 줄이야. 도대체 어떻게 4위계 마법사가 이런 힘을 갖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노인이 베르덴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리스너가 말했었지, 지금까지 봐 온 누구보다 천재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마법사라고. 하지만 직접 보니 그 이상이군.”

    노인의 눈에는 어렴풋이 보였다.

    베르덴 안에 담겨 있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가.

    저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마력량이다.

    아직 수준에 오르지 않아 저 마력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노인은 확신했다. 저건 100년…… 아니, 천 년 혹은 역사상 유례없이 탄생한 존재라고.

    이어 노인은 시선을 돌려 사내에게 향했다.

    “그런데 설마 가드란 후작가가 글러트니와 손을 잡았을 줄이야. 그것도 공국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기사인, 제3중앙기사단의 단장이 글러트니의 이빨이라니.”

    “…….”

    “직접 할 텐가?”

    “장로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사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오랜 친구로서의 도리이니.

    “그렇다면 그리하시게.”

    “감사합니다.

    노인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소년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로크, 준비하거라.”

    “네! 스승님!”

    방주로서, 옛 배신자인 글러트니를 처단할 시간이다.

    * * *

    ‘설마 공간 이동이 가능한 비행정을 보게 될 줄이야.’

    베르덴이 방주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크기가 작긴 하다만 그 기능 하나만으로, 베르덴이 탔던 공국의 리시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방주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비행정이었다.

    그때, 방주에서 총 세 명의 인영이 떨어지더니 지면에 착지했다.

    처음 보는 노인과 방주의 후보, 로크. 그리고 세련된 장검을 어깨에 멘 사내는, 공국의 연회장에서 봤던 라비슈른 후작이었다.

    ‘그래서 공국의 기밀들을 쉽게 알 수 있었던 건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나저나 가드란 후작은 글러트니고, 라비슈른 후작은 방주라.

    아마 서로 모르고 있었겠지.

    진즉에 알았다면 이미 사달이 났을 테니까.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로크가 다가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애셔 형님!”

    형님?

    뭐, 호칭은 그렇다 치고.

    “생각보다 늦었군.”

    “아 그게, 좌표가 왜곡되는 바람에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워서……. 그래도 타이밍 좋게 온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긴 한데…….”

    수가 많이 모자란 것 아닌가?

    그러자 로크가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제가 스승님을 모셔왔거든요.”

    스승님?

    리스너의 시선을 따라갔다.

    언제 다가왔는지, 노인이 로크의 뒤에 선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칠흑의 정복을 입고 하얀색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언뜻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마치 철옹성과도 같은 굳건함이 느껴졌다.

    노인이 말했다.

    “로크의 스승이자, 방주의 장로인 렌 발하그네. 자네가 제자를 대신해 글러트니의 이식자들을 처리한 마법사로군.”

    “애셔라고 합니다.”

    “본래 스승님은 일선에 잘 나서지 않는 분이신데, 형님에 대해 이야기하니 흔쾌히 도우러 오셨어요.”

    방주의 장로라…….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

    지금 무방비한 상태임에도 스위퍼들이 감히 다가오지 못할 정도다.

    명백한 강자 중의 강자.

    저런 존재에겐 단순한 숫자 놀음은 무의미할 터.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어두운 호수 주변을 완전히 봉쇄했어요. 오늘 이곳에 있는 글러트니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거예요…… 라고 리스너가 전해 달래요.”

    “그렇군. 그럼 여긴 맡기지.”

    렌 발하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많이 지치신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지치긴 했으나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베르덴은 다 잡은 먹잇감을 남에게 넘겨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이자, 렌 발하그가 곧바로 수긍했다.

    “좋은 기백이군. 알겠네. 그럼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게.”

    “감사합니다.”

    렌 발하그가 가볍게 주먹을 쥐고는 발을 옮겼다.

    그리고 갑자기 모습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글러트니의 이식자 중 하나에게 다가섰다.

    “어?”

    콰지직!

    아차 하는 사이, 파공음이 터져 나오며 일격에 이식자의 머리가 사라졌다. 산산이 조각난 파편이 스위퍼들에게 쏟아졌다.

    [───카아아아아아아악!]

    들려오는 거친 울음소리.

    멈춰진 전투가 재개되었다.

    * * *

    다시금 혼란해진 전장, 그 중심.

    가드란 후작과 라비슈른 후작.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쥔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행사가 끝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가드란.”

    “나도 같은 마음이네. 이렇게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지. 우린 언제나 같은 적을 상대로 같이 검을 겨누었으니까.”

    둘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가문명으로 불렀다.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내려온 습관이었다.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라비슈른 후작이었다.

    “……왜 그랬나?”

    “…….”

    “자네는 언제나 정이 많았지. 영지민들을 진심으로 다스렸고, 불의에 분노하며, 선을 베풀었어. 수많은 국민을 제 손으로 희생시킨 에스티리아 왕국을 향해 칼날을 세우기도 했지. 그런데 왜 글러트니 따위에게 넘어간 건가?”

    가드란 후작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가드란 후작의 아내는 선천적으로 몸이 유약했다.

    잔병치레로 몸져눕기 일쑤였고, 마차를 타고 멀리 여행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건강하게 아들을 낳았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그는 행복했었다.

    그러던 중 벨디른 공화국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어쩔 수 없이 가드란 후작은 직접 전장으로 향해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2년쯤 흘렀을까. 겨우 영지로 돌아갈 시간이 생겼지. 나는 곧장 아내가 있는 자택으로 향했고, 나는 마주했네. 불과 한 달 전에도 나에게 편지를 보냈던 아내의 무덤을.”

    “그건…….”

    “뭐, 이건 자네도 아는 얘기니 넘어가겠네. 어쨌든 그 후로 당시 리비안트 공작 전하를 따라 왕국에 반기를 일으켰고, 리비안트 공국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지. 그런데…… 비극은 또다시 여지없이 찾아오더군.”

    아내가 남긴 아들, 루펠.

    그는 아내의 유전자를 받았는지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았다. 아내보다도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병약했다.

    가드란 후작은 절망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곧장 아들의 몸을 낫게 하기 위해 후작가의 전력을 총동원했다. 오랜 친우이기도 공왕과 라비슈른 후작 그리고 여러 귀족과 상인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소용없었지. 공왕 전하께서 어렵게 루아스교의 추기경을 데려왔지만 선천적인 건 어찌할 수가 없다더군. 죽은 자도 살리는 성녀가 아닌 이상은……. 아,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네. 성녀는 결단코 사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지. 그게 한 국가의 귀족이라면 더더욱.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하지만.

    “내 마음은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더군.”

    솔직한 심정으로 전쟁이라도 일으켜 성녀를 납치하고 싶었다.

    물론 그게 무리라는 건 알고 있다. 루아스교의 본산인 루아스 교국과 마찰을 빚는 순간 공국은 그대로 끝장이다.

    거기다 설령 운 좋게 성녀를 데려온다고 해도, 그녀에게 치료할 생각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감정과 이성이 충돌했다.

    그토록 희생했음에도 아들을 구해 주지 못하는 공국이 원망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그러지 못하는 공국을 이해했다.

    죽어 가는 아들을 보며 속이 썩어들어 갔다.

    하늘이, 그가 살아왔던 인생을 저주하는 것 같았다.

    “그때, 글러트니가 내게 찾아와 손을 내밀었네. 그리고 나는…… 잡았지.”

    “놈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고 있었나?”

    “내 아들에게 이형종의 장기를 이식한다더군.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절박했고, 내 눈으로 직접 그 과정을 지켜봤지.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전부를 죽이고 나도 자결할 셈이었네. 그런데 이식은 아주 성공적이었어. 물론 이식 전과 이식 후의 아들이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네. 누가 뭐라 하든 내 아들이니까.”

    가드란 후작이 눈을 떴다.

    “라비슈른, 자네가 방주에 몸담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럴 만해. 자네는 언제나 대의를 추구했으니까. 만약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지.”

    “가드란…….”

    “하지만. 난 더 이상 잃지 않을 거다.”

    설령 모두가 악마라고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죽어서 영원히 저주받는다고 해도.

    모든 걸 바쳐서라도 아내가 남긴 유일한 혈육을 지킬 것이다.

    “그게 내 선택이다. 자세를 잡아라, 라비슈른.”

    가드란 후작이 검을 세웠다.

    이미 길은 갈라졌다. 그것이 선택의 결과였다.

    라비슈른 후작이 말없이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수십 년을 함께해 온 오랜 친우. 이제부터 그를 죽여야 한다. 후회는 있었으나 망설임은 없다. 그래야만 많은 사람이 살 것이고, 잘못된 길을 걷게 된 그를 구할 수 있을 테니.

    “……미안하네.”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

    공국의 두 기둥이 지면을 박찼다.

    * * *

    루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저자가 오다니…….’

    방주의 세 장로 중 하나, 렌 발하그.

    그는 한때 방주를 이끄는 선장으로, 글러트니를 척살하는 데 앞장섰던 존재였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선에 나서지 않는다고 들었었는데.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너무 많다.’

    특히 저 애셔라는 마법사. 어떻게든 스위퍼들을 움직여 방해했지만 놈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대체 어떻게 된 마력량인지, 저건 이해가 가능한 범주를 넘어섰다.

    저건 그저 재능의 영역이 아니다.

    마법사 중에서도, 최정상에 오른 마탑주라고 해도 4위계 마법사였던 시절에 저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도망쳐야 한다.

    공국에서 쌓은 기반은 사라지겠지만, 붉은 조각으로 글러트니의 장기가 가진 능력을 재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다.

    루펠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움직였다. 시선이 팔린 지금이 적기였다. 그러던 그때, 로크가 달려오더니 루펠의 앞길을 막았다.

    날카로운 앞차기에 루펠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어딜 도망가려고?”

    방해다. 시간이 없다.

    루펠이 핏대를 세우며 힘을 끌어모았다.

    “비켜라!”

    루펠이 로크에게 검을 휘둘렀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검속. 로크가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 했으나 손바닥과 팔꿈치로 칼날을 가까스로 흘려 내는 게 전부였다.

    이윽고 루펠이 검 손잡이로 로크를 후려쳤다.

    무지막지한 힘에 로크가 나가떨어졌다.

    고개를 든 로크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와…….”

    방금의 일격에 팔에 금이 갔다. 미리 움직여 충격을 흡수했는데도.

    이게 글러트니의 송곳니인가?

    어떻게 애셔 형님은 이런 괴물을, 그리고 저 많은 수를 상대로 혼자 압도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로크가 베르덴에게 감탄한 사이, 루펠이 따끔한 시선을 느꼈다.

    어느새 베르덴이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표정을 구긴 루펠이 서둘러 공간을 열고, 그 밖으로 몸을 던졌다.

    * * *

    “허억, 허억…….”

    섬으로 나온 루펠이 바닥에 쓰러졌다.

    상처에 일렁이던 별 무리는 사라졌으나 치명상을 회복할 생명력이 부족했다. 연이어 공간을 허무는 바람에 붉은 조각에 담긴 생명력을 거의 소진했다.

    ‘고작 마법 하나에 이렇게 되다니…….’

    루펠의 손가락이 지면을 파고들었다.

    아니, 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다.

    곧 있으면 글러트니의 위장도 사라질 것이다. 지금의 루펠에겐 장로를 상대할 힘이 없다. 당장 어두운 호수를 빠져나가야 한다.

    이미 호수 주변을 방주에서 감시하고 있을 터.

    하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지금, 자욱한 안개를 이용하면 나갈 수 있다. 재생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루펠은 여전히 강자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갖기엔 아직 일렀다.

    <어스 자벨린>

    “커억?!”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대지의 창이 루펠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근처에 있던 바위와 부딪쳤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은 루펠이 마법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자.

    “말도 안 돼…….”

    베르덴.

    그가 루펠이 닫아 놓았던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