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87화 (87/366)

87화 방해 (4)

쩌저적. 쩌저저적.

삽시간에 여러 갈래로 쪼개진 공동이 시시각각 움직였다. 마치 동굴 전체가 살아 움직이듯 말이다. 누구 하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휩쓸려 나갔다.

그들이 서 있는 세상 자체가 뒤바뀌는데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식자는 곧 직감했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전부 녹색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의 짓이라고.

“죽여라아……!”

이식자.

레드헷의 머리를 일부 이식한 그가 레드헷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다른 글러트니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베르덴의 근처에 닿기도 전에 바닥이 움직였다.

사방이 가로막히고, 위아래가 뒤집히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베르덴 자신의 감각을 적극 활용한 지형조작.

통곡의 기사를 상대했을 때와 비슷했지만 그때와 지금의 베르덴의 격차는 압도적이다. 당연히 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빠를 수밖에.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있는 공간 전체를 글러트니와 멀리 떨어뜨린 뒤 가두었다. 그러곤 지형을 정렬했다.

그렇게 거대한 원형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입구는 사라져 있었고 구석에는 석관이 자리 잡고 있다. 중심에 선 베르덴. 여전히 압도적인 숫자의 레드헷과 글러트니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식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그 마법은 뭐지? 아니, 그것보다 도망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상황은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지그음. 이게. 무스은. 짓이지?”

“이래야 처리하기 쉬우니까.”

공동을 무너뜨려 압사시킬 수도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글러트니는 특히나 생명력이 끈질겼으니까.

그래서 베르덴은 확실하게 목숨 줄을 끊어 낼 생각이었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전신에 넘쳐흐르는 마력.

푸른빛에 휩싸인 베르덴이 눈을 번뜩였다.

<연쇄번개>

우레 소리가 공동에 메아리쳤다.

* * *

글러트니는 조급했다. 이건 부정할 수 없었다.

본래라면 총 10개의 붉은 조각이 완성되어 글러트니의 송곳니에게 전달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붉은 조각의 재료가 될 샐러맨더의 심장과 붉은 조각 3개를 탈취당했다. 범인은 방주임이 분명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부족한 양을 수급할 방법은 있었다.

다비르크 백작.

그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웨어울프의 심장을 조각해 만든 액세서리.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은 인간 수백의 것을 아득히 넘는다.

그래서 빼앗았다.

그리고 나머지 재료를 채우기 위해, 다비르크 백작의 죽음을 미끼로 삼아 영양가 높은 병사들을 이끌어 냈다.

중앙기사단과 병사 사이사이에 글러트니가 숨어 있었고 계획은 순조로웠다.

방주에서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붉은 조각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 밤 안에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본래 상정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다.

콰과과과광!

거대한 암석이 레드헷을 짓뭉갰다. 대지에서 솟아난 가시들이 교차하며 레드헷의 몸통을 관통했다. 이어 접근한 베르덴이 땅 속성을 부여한 스태프를 강하게 휘둘렀다.

그 무거운 일격을 버티지 못한 레드헷의 목이 뜯겨 나가며 그대로 쓰러졌다.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일말의 딜레이도 없이 쏟아지는 마법들.

고작 거리를 절반 정도 좁혔을 뿐인데 벌써 태반 가까이 죽어 나갔다.

이대론 위험하다.

이식자는 자신의 옆에 있는 검붉은 레드헷인 ‘블랙헷’에게 명령했다.

“죽여라아……!”

그제서야 블랙헷이 움직였다.

전형적인 레드헷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다른 존재. 붉어야 할 몸이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고, 통상의 레드헷보다 2배 가까이 큰 거체를 지니고 있었다.

블랙헷이 베르덴을 응시했다.

정신 계열 마법을 전공한 루크넌을 압도하는 강력한 정신 조작. 그러나 당연하게도 베르덴의 정신은 조금도 파고들지 못했다.

[…….]

결국 블랙헷은 사냥 방식을 바꿨다.

콰앙! 블랙헷이 채찍처럼 휘두른 팔이 순식간에 베르덴의 스태프와 부딪쳤다. 뒤로 튕겨져 나간 베르덴이 스태프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충격을 견뎌 냈다.

‘이놈은 좀 다르군.’

점점 다가오는 블랙헷.

곧바로 대응했으나 육체의 강도나 움직임이 레드헷과 확연히 달랐다. 자신에게 정신 조작까지 사용한 걸 포함해서.

베르덴이 블랙헷에게 신경이 팔리자, 그 틈을 노린 레드헷과 글러트니들이 베르덴의 뒤를 노렸다.

그 순간 기류가 뒤틀렸다.

<선풍의 장막>

5위계의 원소 마법. 물리적으로 내외를 차단하는 바람의 망토.

거센 바람이 삽시간에 주위를 휩쓸었다. 그 압력에 블랙헷마저 견디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벽에 처박혔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겨우 줄였던 베르덴과의 거리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일회용으로 괜찮군. 도중에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흠이지만.’

거센 바람을 두루는 마법이라 베르덴의 마법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단순히 바람 계열의 마법사가 위급 시에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마법이었다. 로브에 내재된 마법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베르덴의 선풍의 장막을 해제했다.

그러곤 마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그러자 공동 내부의 기온이 서서히 낮아지더니 이내 입에서 하얀 숨결이 흘러나왔다.

<얼음지대>

베르덴을 중심으로 서리가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단순한 얼음 마법이 아닌, 혹한의 반지(모조품)로 인해 속성이 변질된 한기.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기운을 끌어냈으나 그 기운마저 한기가 잠식했다.

전혀 저항할 수 없이 서서히 몸이 둔해지는 감각.

콰득!

그 틈에 지형을 조작한 베르덴이 놈들을 하나둘씩 꿰뚫었다.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움직임은 눈감고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느려졌으니.

설령 가까스로 피한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대지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유일하게 블랙헷만이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롭게 변형한 두 개의 팔. 그러나 움직임은 전보다 더욱 느려진 상태다.

베르덴은 방심하지 않고 일절 거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세 번의 움직임에 연산을 마쳤고, 두 번의 움직임에 마력이 갖춰졌다. 이내 순간적으로 파고들며 스태프를 블랙헷의 팔에 툭 갖다 댔다.

<스테이시스>

4위계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난도의 마법.

닿은 부분부터 냉기가 블랙헷의 전신에 퍼져 나가더니 이내 꽁꽁 얼어붙었다. 가볍게 스태프로 후려치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레드헷과 함께 백작가의 기사들을 몰살한 이형종의 최후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자는, 레드헷들을 조종하던 이식자 단 하나.

베르덴이 한 발짝 다가갔다.

추위에 떨던 이식자가 저항했으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콰직.

* * *

이걸로 글러트니와 레드헷을 전부 몰살했다.

지형조작으로 사체들을 깊은 땅속에 숨기고 공동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뻔한지도 모른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루크넌까지. 기력이 쇠한 듯 보이나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운이 좋군.’

베르덴이 다비르크 백작에게 다가갔다.

이미 생명력이 빠져나갔는지 거의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베르덴이 그의 목 부근을 들췄다.

‘역시 목걸이가 목적이었나.’

웨어울프의 심장으로 만든 목걸이.

예상했던 대로 생명력을 위해 빼앗은 모양이다. 그래서 다비르크 백작을 목표로 삼았던 거겠지.

그렇게 자랑하고 다니더니.

하긴 기사단에게 호위를 받는 백작이 이렇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리라고는 본인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 어쨌든.’

글러트니의 계획을 거의 다 망쳤으니 이제 마무리를 할 단계였다. 기절해 있는 중앙기사단원의 가방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그리고 석관에 다가갔다.

콰아앙!

강한 충격에 석관이 박살 났다. 기다란 홈마저 완전히 지워 없앴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이 부근에서는 붉은 조각을 만들지 못할 테지.

바깥으로 나선 베르덴이 하늘을 향해 적색과 노란색 신호탄을 터뜨렸다.

* * *

신호탄이 터진 걸 목격한 두 번째 분대.

루펠이 이끄는 분대가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절벽 동굴에서 하나둘씩 빠져나오고 있는 사람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중앙기사단원이 루펠을 보곤 서둘러 다가갔다.

“루펠 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게…….”

수색 도중 레드헷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어찌저찌하여 버티고는 있었는데, 검붉은 레드헷에 의해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그러곤 이 동굴 안에서 눈을 떴습니다.”

“그럼 신호탄은 누가 터뜨린 거지?”

“예? 신호탄이요?”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신호탄이 사라진 걸 인지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루펠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내부. 듬성등성 걸려 있는 횃불에 비친 공동, 그 중심에는 손쓸 새도 없이 부서진 석관만이 남아 있었다.

“이건…….”

“루펠 님, 듀켈 님께서 오셨습니다.”

루펠이 바깥에서 듀켈과 만났다.

그의 옷은 일부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표정은 심각했다.

“……자네도 습격당한 건가?”

“습격이라고 해야 할지…… 제론에게 당했다. 거기다 메르크하고 몇몇 병사가 갑자기 공격해 오더군. 방심한 터라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전부 당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없었다.

눈을 떠 보니 상처는 포션으로 회복이 진행되고 있었고, 몸이 땅 아래에 묻혀 있었다. 숨구멍이 뚫린 상태로.

배신자였던 제론 일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해롤드는 어떻게 됐지?”

“내가 갔을 땐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이면의 그림자까지 사라졌더군. 분명 제론이 가져간 거겠지.”

듀켈이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돼. 갑자기 제론이 배신을 왜 했는지, 그런데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건지……. 그러다가 여기서 신호탄이 터진 걸 봤다. 이미 오면서 증원을 요청할 사람을 보내 놨지.”

“증원이라…….”

루펠이 검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그 순간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루펠이 몇몇 병사와 기사 그리고 부하와 차례대로 눈을 마주했다.

“루펠?”

정적을 깨는 듀켈의 목소리.

표정을 굳히고 있던 루펠이 이내 검에서 손을 떼었다.

“본래의 목적대로 다비르크 백작의 시체는 확보했다. 그러니 일단 수색은 여기서 끝내고, 당장 도시로 돌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주님들에게 보고하도록 하지. 그래…… 그게 좋겠어.”

루펠 일행은 곧바로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베르덴도 이내 자취를 감췄다.

* * *

순조롭게 글러트니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코헨으로 돌아갔다.

이른 아침에 성문을 통과하고 여관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 점심이 지날 즈음 일어나자 마침 리스너가 찾아왔다.

여관의 종업원으로 위장한 리스너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애셔 님. 무사하신 걸 보니 기쁘군요.”

“테온은 어떻게 됐지?”

“문제없이 잠입한 뒤 멀쩡히 살아 나왔습니다. 글러트니의 송곳니가 누군지는 아직 보지 못한 모양이지만, 송곳니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글러트니의 앞니, 박사의 징표.

글러트니 내에서 박사는 독보적인 존재이니 당연히 시선이 모일 수밖에.

아무리 경계심이 많다고 해도 소용없다.

설마 박사가 이미 죽어서 잿더미로 변했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 베르덴이 글러트니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난데없이 방주도 아니고 전혀 연고도 없는 마법사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위치는?”

“사흘 뒤, ‘어두운 호수’ 근처에 있는 오두막입니다.”

“어두운 호수?”

“가드란 후작 영지에 있는 큰 호수입니다. 언제나 안개에 휩싸여 있고, 호수 바닥이 검은색에 가까운 터라 어두운 호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실제론 깨끗한 물이지만요. 일단 오두막에서 접촉한 후에 송곳니에게 안내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걸로 준비는 전부 갖춰졌다.

이제 글러트니의 송곳니를 식별하여 처리하면, 그 지긋지긋하고 역겨운 놈들을 공국에서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겠지.

먹잇감이 미끼를 물었으니 이제 낚시줄을 당길 차례.

그 역할은 온전히 베르덴의 것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