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86화 (86/366)
  • 86화 방해 (3)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

    불에 덴 듯한 뜨거운 통증에 듀켈이 눈을 부릅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던 터라 너무도 무방비했다.

    이어 제론이 칼날을 비틀자, 듀켈이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제, 제론. 네가 대체 왜……!”

    뻐억!

    제론은 대답하지 않고 듀켈의 턱을 후려쳤다. 이어 메르크가 듀켈의 얼굴을 향해 방패를 내리찍었다. 그 충격에 듀켈의 머리가 반쯤 지면에 파고들었다.

    물론 죽지는 않고 타박상으로 그쳤다.

    듀켈이 워낙 튼튼한 터라 확실하게 의식을 끊어 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병사들과 기사들이 멍하니 바라봤다.

    제론이 말했다.

    “정리해.”

    그러자 방금까지 누워 있던 병사 몇몇이 벌떡 일어나 그들을 습격했다. 기사들이 재빨리 반응했으나 상대는 도저히 일반 병사라고 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순식간에 태반 이상이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졌고 기사들이 서로의 등을 지키며 검을 세웠다.

    “중, 중앙기사단이 왜 갑자기 배신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가 됐든 일단 벗어나야 한다. 서둘러 도시로 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서로 눈빛을 나눈 기사들.

    젊은 기사가 길을 뚫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목표는 제론. 놈만 제친다면 길이 열린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제론이 기사의 검을 맨손으로 붙잡아 우그러뜨리곤, 그의 목을 붙잡아 의식을 단번에 끊어 냈다. 나머지 기사들도 어찌할 도리 없이 차례대로 제압되었다.

    방패를 털어 낸 메르크.

    그가 죽은 해롤드의 손에서 이면의 그림자를 빼앗았다. 그리고 기절해 있는 사람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재료는 이걸로 충분하겠군.”

    미리 잠입해 있던 글러트니들.

    이들은 오랜 시간 공국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표면으로 나타난 것이다. 글러트니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

    제론이 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검붉은 레드헷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저 레드헷, 슬슬 거슬리는군.”

    “안 그래도 송곳니께서 준비가 끝나면 레드헷들을 정리하라고 하셨다. 저런 이형종 따위는 구인류보다도 못한 존재들이니.”

    글러트니가 바라는 세상에 저런 존재는 불필요했다.

    그저 키워서 적당히 쓰고 버리는 체스 말 정도. 그 정도의 가치일 뿐이고, 놈들은 그런 가치라도 가졌음에 감사해야 했다.

    고개를 끄덕인 제론이 병사들로 위장해 있던, 글러트니의 일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놈들이 일제히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 순간.

    ────콰자자작!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석편(石片)이 덮쳐 왔다.

    휩쓸린 글러트니들은 곧바로 찢겨 나갔고 그 끝에 있던 제론이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상체 일부가 갈라지며 피 분수가 쏟아졌다.

    “……?”

    전혀 상정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그들이 일제히 돌조각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없었던, 짙은 녹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홀로 서 있었다.

    베르덴. 그가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바라봤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야 할 자침이 정확이 눈앞에 있는 글러트니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가까워져야 제대로 작동되는군.”

    하나 배웠다.

    나침반을 공간가방에 넣은 베르덴이 스태프를 들었다.

    * * *

    중앙기사단과 병사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글러트니.

    역시 베르덴의 예상대로였다.

    우드드드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메르크의 몸이 크게 융기했다. 그리고 제론 또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형체를 띠기 시작하며 상처를 회복했다.

    ‘이식자 둘. 나머지 아홉.’

    힘 조절은 필요 없다.

    어차피 잡아 봤자 글러트니의 조각 때문에 어떤 정보도 뽑아낼 수 없었으니까.

    “산 채로 잡아라.”

    글러트니가 일제히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주변을 뒤흔드는 진동과 몇 번의 번쩍임.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 소리까지. 삽시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끝은 곧 찾아왔다.

    사방에 널브러진, 형태조차 무너진 글러트니의 일원들.

    두 이식자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피거품이 섞인 기침을 내뱉은 제론이 그제서야 베르덴에게 물었다.

    “네놈, 방주인 건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 소리도 이제 지겹군.”

    만날 때마다 방주, 방주.

    아니라고 해도 나중에 또 물어보니 짜증이 날 지경이다.

    베르덴이 손가락을 튕겼다.

    어두운 색의 차가운 바람이 이식자들을 감쌌다. 혹한의 반지로 속성이 변질된 얼음 마법. 그 한기에 이식자들의 몸이 얼어붙음과 동시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운마저 얼어붙었다.

    비정상적인 생명력을 보여 주던 이식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 죽었다. 이내 얼음이 산산이 부서지며 시체 또한 수천 조각으로 흩어졌다.

    ‘나쁘지 않군.’

    모조품치곤 상당한 효과. 이게 고작 1할이 채 되지 않은 성능이라니. 대체 원본은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뭐, 베르덴의 손에 들어올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베르덴이 쓰러진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듀켈을 빠르게 수습했다.

    중앙기사단이 가지고 있던 포션을 사용해 듀켈을 치료한 다음, 지면 아래에 공간을 만들어 그들을 숨겼다.

    이걸로 지나가던 아인종에게 개죽음을 당할 일은 없겠지. 숨구멍을 뚫어 놓았으니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알아서 빠져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내가 챙겨 가야겠어.’

    이면의 그림자.

    이게 없다면 글러트니가 베르덴의 흔적을 찾아낼 일은 없을 터. 곧바로 공간가방에 수납했다.

    ‘그럼 이쪽은 끝났는데…….’

    하지만 고작 이걸로 끝난 건 아니었다.

    방금 전 이곳을 보고 있던 기형적인 레드헷이 남아 있었으니, 다른 분대 쪽에도 글러트니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단서를 찾을 방법은 있었다.

    베르덴이 첫 번째 분대에 있는 병사의 등에 새겨 넣은 추적용 마법진.

    그 잔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으니까. 글러트니가 움직였으니 다른 분대에서도 무슨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글러트니.

    놈들은 철저하게 베르덴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리고 이곳만이 아니라 다른 곳까지 말이다.

    다시금 베르덴이 움직였다.

    * * *

    테온.

    그는 유년기 시절 고아로서 뒷골목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납치를 당해 글러트니의 일원으로서 살게 되었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가혹한 나날들. 실제로 여러 아이가 죽어 나갔다. 그리고 그 시체들은 글러트니에서 실험 재료로 사용했다.

    여기선 죽음마저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기에 테온은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고 그렇게 글러트니의 암살자가 되었다. 언제 죽는다 해도 금방 갈아 끼워질 부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지금도 그렇다.

    테온은 살기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근데 이건 아니지.’

    글러트니의 앞니를 목에 맨 테온.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방주에게 잡힌 이후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머리가 아팠는데 설마 이런 걸 시킬 줄이야.

    “시발…….”

    테온이 작게 욕을 내뱉으며 걸었다.

    그렇게 도시에 있는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테온을 본 덩치 큰 노인과 안경 쓴 사내. 일반 시민으로 위장하고 있는 글러트니의 일원들이었다.

    제 발로 글러트니의 소굴로 찾아간 테온이 그들에게 목걸이를 슬쩍 보였다. 눈을 휘둥그레 뜬 그들이 서둘러 테온에게 길을 안내했다.

    몇 개나 되는 지하 통로를 거쳐 도착한 장소.

    걸어온 거리와 방향으로 짐작해 보건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바깥임이 분명했다.

    긴장이 흐르는 분위기 속, 누군가 테온의 앞으로 걸어왔다.

    목 한가운데에 이형종의 눈을 달고 있는 이식자였다. 그가 테온에게 말했다.

    “살아 있었군.”

    한마디였지만 압박감이 숨을 죄어 왔다.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어째서 살아 있냐.

    테온과 같이 움직이고 있던 글러트니는 죄다 죽었는데 어떤 이유로 살아 있냐. 분명 그런 의미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말실수를 했다간 죽는 상황.

    테온은 내심 에라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목에 걸고 있는 글러트니의 앞니를 꺼내 보였다.

    “박사께서 이빨을 찾으신다.”

    “…….”

    이식자의 시선이 앞니에 고정되었다.

    하루와 같은 1초가 몇 번이고 지나고 나서야, 이식자가 입을 열었다.

    “따라와라.”

    이식자가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테온이 곧 그를 따라 모습을 감췄다.

    베르덴이 보낸 미끼가 서서히 글러트니의 내부에 파고들었다.

    * * *

    베르덴이 마법진의 잔향을 추적했다.

    시시각각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어느새 위치에 도착한 베르덴이 주위를 둘러봤다.

    “……없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숲과 절벽뿐. 마력감지를 넓게 펼쳐 봐도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분명 잔향은 이곳을 마지막으로 끊겼는데……. 설마 눈치채고 마법진을 통째로 제거하여 여기에 놓았을 리는 없을 테고.

    베르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룬의 반지 엑시드로 강화되어 있는 베르덴의 감각. 그걸 감쪽같이 숨기고 있다면…… 일부 이형종이 가진 특수한 능력을 제외하면 하나밖에 없었다.

    마법적인 은폐, 환영.

    ‘그렇다면 절벽인가.’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를 숨기기엔 안성맞춤인 지형이다.

    지면으로 내려간 베르덴이 손으로 절벽을 짚고 천천히 나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베르덴의 손이 절벽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느껴졌다, 베르덴이 작성한 마법진의 잔향과 익숙한 마력이.

    ‘루크넌.’

    이 환영은 실종된 루크넌이 만들어 낸 것임이 분명했다.

    <암시>

    베르덴이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습한 공기와 퀴퀴한 냄새. 동굴 안쪽에 들어서자, 공동의 중심에 전에 봤던 석관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이번엔 구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한쪽 팔이 없는 다비르크 백작의 시체와 첫 번째 분대에 속해 있는 병사 및 기사 그리고 제3중앙기사단원들의 몸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 밑에는 석관으로 향하는 기다란 홈이 뚫려 있었고.

    마지막으로 루크넌.

    그는 그저 눈을 감은 채 강제적으로 환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을 조종당하고 있는 건가.

    ‘다행히 늦진 않은 것 같은데…….’

    루펠이 이끌고 있는 두 번째 분대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직 글러트니에게 당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글러트니에게 당해 이곳으로 끌려오고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마 그건 아니겠지.

    이 공동에는 수많은 기척이 숨어 있었으니까.

    쿠웅.

    검붉은 레드헷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다른 레드헷까지 전부. 그와 함께 안쪽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글러트니들이 나타났다.

    그중 레드헷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이식자. 입 위로는 눈과 코가 없이 붉은색의 뭉개진 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자였다.

    지금까지 만난 이식자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답지 않은 몰골이었다.

    놈이 물었다.

    “너느은. 누구지?”

    어눌하고 목을 긁는 듯한 목소리.

    수십 마리의 괴물이 베르덴의 주위를 에워쌌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수십 배나 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

    하지만 베르덴에겐 그간의 경험이 있었다.

    베르덴은 대답 대신 스태프를 지면에 내리찍었다.

    <지형조작>

    그리고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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