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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81화 (81/366)
  • 81화 결승 (1)

    대행사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연회는 전날보다 더욱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수도에 있는 대부분의 고위 귀족이 참석했다. 그리고 그 자제들까지도.

    북적거리는 연회장 속, 왕성의 하인들이 음식과 술을 옮기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2층 발코니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귀족들.

    그중 하나가 연회장을 향해 다가오는 마차들을 바라봤다.

    “왔나 봅니다.”

    첫 번째 마차가 멈췄다.

    마부가 문을 열자 잭이 성큼 발을 디뎠다. 어제와 다름없는 회색 갑옷과 검은색 망토. 연회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눈길이 끌렸다. 그런 잭의 뒤로 볼디아느 백작이 고개를 치켜들며 앞으로 나섰다.

    “아주 의기양양하군요. 뭐, 시합의 유력한 우승 후보를 데려왔으니 누구든 안 그렇겠냐마는…….”

    “솔직히 저 안목이 부럽습니다. 작년에는 모험가 길드와 친한 체르베논 백작이 핏빛검을 데려와서 우승을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준우승을 거머쥐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3년 전에는 우승까지 했지요.”

    대행사의 시합에서 우승을 한다는 건 큰 영예이기도 하나, 영지 평가에 가점이 붙는다.

    그 덕에 다소 척박한 영지를 다스리던 볼디아느 백작이 포상을 받을 수 있었고, 지난 몇 년 사이에 영지를 급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귀족으로서 부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우승이 확정된 건 아니잖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죠.”

    우승 후보는 한 명만이 아니니까.

    귀족들이 다음으로 오는 마차에 시선을 향했다.

    두 번째 이어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줄줄이 뒤늦게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마차였다. 그중에는 오늘 시합의 참가자들도 있었고, 어제 시합에서 떨어진 자들도 있었다.

    루크넌은 오지 않았다.

    하기야 공국 역사상 최단 시간 내에 패배했으니 창피해서 오지 못했겠지.

    그러던 중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던 마차가 도착했다.

    금색 테두리의 고급 마차.

    옆면에 새겨진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표식.

    이윽고 문이 열리며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의 회색 로브가 아닌, 로든마이어 백작이 준비해 준 짙은 푸른색의 연회복.

    잿빛 머리 그리고 푸른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색감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시선에 베르덴이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로든마이어 백작이 주변을 스윽 훑어봤다.

    “너를 상당히 귀찮게 할 것 같은 시선들이군. 복장이 꽤 잘 어울리는 모양이야.”

    “굳이 이런 옷을 입어야 했습니까?”

    “오늘까지는 네가 백작가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그럴진대 모험가에게나 어울릴 법한 모습으로 나서게 할 수는 없지. 적어도 연회장에서만큼은.”

    장소에 어울리는 의복은 사교계의 기본이다.

    어차피 시합에 나설 때는 원래의 복장으로 갈아입으면 될 뿐이니, 길어야 두 시간 정도일 뿐이다. 베르덴은 공국의 사교계에 일절 관심조차 없었지만 순순히 로든마이어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편리한 조건을 하나 받아 냈다.

    “그럼 들어가지.”

    로든마이어 백작 그리고 베르덴.

    둘이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연회장에 들어선 로든마이어 백작은 곧장 다른 귀족들을 찾아갔다.

    자작뿐만 아니라 같은 계층인 백작 위에 있는 자들이 미소 지으며 그를 환대했다. 그것만 봐도 로든마이어 백작의 위치가 상당히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홀로 남은 베르덴은 잠시 연회장 전체를 주시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베르덴을 향해 힐끗거리는 눈빛들. 아무래도 서로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대부분 백작급에 위치한 귀족으로서, 평민에게 먼저 다가가는 건 여러모로 좋은 모습은 아닐 테니.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라. 로든마이어 백작의 말대로야.’

    베르덴은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고 중앙에 있는 식탁에 다가갔다.

    그 위에 차려진 고급 음식들. 수도 리드론은 해안가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신선한 해산물이 손질된 채로 얼음 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왕성에서 주최하는 연회 아니랄까 봐, 하나하나가 귀한 재료들이군.’

    껍질에 황금빛이 감도는 굴.

    따로 장갑을 착용할 필요 없이 가볍게 염력을 일으켜 들어 올렸다. 레몬즙을 뿌리고 굴을 한입에 삼켰는데 해산물 특유의 비린 맛이 전혀 없었다.

    씹을수록 단맛이 올라와 미각을 자극했다.

    꽤나 마음에 드는 시작이었다.

    이어서 공국 왕성의 요리사가 선보인 요리들을 죽 훑어봤다. 죄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번거로운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먹기 쉽게 숟가락 위에 세팅되어 있거나 작은 스틱이 꽂혀 있었다.

    하인이 서빙해 준 샴페인과 함께 요리들을 하나씩 맛봤다.

    연회는 사교계의 전장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사교계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주변에 널린 요리들을 즐기는 수밖에. 안 그래도 고급 요리에 관심이 많은 베르덴이었기에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것이 베르덴이 연회를 즐기는 방법이었다.

    “흠흠.”

    그때, 한 젊은 귀족 무리가 다가왔다.

    나이로 보아 연회에 모인 귀족들의 자제일 터. 아마 귀족들 자신이 직접 찾아오는 대신 자식들을 보낸 거겠지.

    ‘……?’

    그런데 그들 뒤에서 풍채 좋은 귀족이 나타났다.

    “비켜라.”

    “아……! 실례했습니다, 다비르크 백작님.”

    루크넌의 고용주, 다비르크 백작.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귀족 자제들이 물러났다. 뚱뚱한 몸체에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온 다비르크 백작이 와인으로 가득 찬 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나는 다비르크 백작이다. 백작 중에서도 풍요로운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가문이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자기소개였다.

    물론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기에 형식상의 예의를 취했다.

    “애셔입니다.”

    “어제 펼쳤던 시합을 보니 소문대로 상당한 마법 실력을 가졌더군. 돈이고 뭐고 원하는 대로 줄 테니 내 밑에서 일해라.”

    상당히 거창한 제안이었다.

    베르덴이 잠시 고민하는 척하고는 되물었다.

    “무엇이든 말입니까?”

    “그래, 무엇이든지.”

    다비르크 백작이 자신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건 우리 다비르크 가문의 가보로, 늑대인간의 심장을 가공해 만든 매직 아이템이다. 착용자의 활력을 증강해, 잔병에 면역이 되고 건강히 오래 살 수 있도록 해 주지. 설령 왕족이라 할지라도 돈 주고 구할 수 없는 아주 귀한 물건이다. 이것만 봐도 우리 가문의 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을 터.”

    그리고.

    “내 밑에 들어온다면 평민 이상의 삶을 누리게 해 주마. 그리고 원한다면 내 가신의 여식과 혼인을 맺게 하여 공국의 귀족이 될 수 있는 기회 또한 주도록 하겠다.”

    지극히 권위적이고 오만한 말투.

    사실 이게 귀족의 평균이었다. 신분보단 능력을 우선시하는 로든마이어 백작이 예외였다.

    거절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다비르크 백작의 자신감 가득한 시선.

    당연히 베르덴에게는 제안을 받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완곡한 거절도 딱히 필요 없었다. 그저 한마디면 충분했다.

    “로든마이어 백작께 여쭤보겠습니다.”

    “뭐? 로, 로든?”

    다비르크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분명 어제까지 수집한 정보로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고 들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고용된 것은 단순히 그레이에서부터 연이 닿았기 때문이라고.

    ‘설마 내가 잘못 안 건가? 아니면…… 로든마이어 백작, 그놈이 미리 손을 써 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위세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백작 본인은 타인이 자신의 것에 손대는 걸 굉장히 싫어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의 가문에 들어간 마법사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게 알려지면 로든마이어 백작의 심기가 크게 불편할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로든마이어.”

    들릴 듯 말 듯 욕을 뱉은 다비르크 백작이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곤 불쾌함을 훤히 드러내며 휙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베르덴이 샴페인을 머금었다.

    ‘역시 편리하군.’

    잠자코 연회에 참석하는 대신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받은 조건, 바로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제안을 하든, 단 한마디로 거절할 명분이 생기는 거니까. 예상대로 귀찮은 일을 방지하는 역할로는 아주 쓸 만했다.

    잠시 후, 다른 귀족 자제들이 찾아왔다.

    로든마이어 백작의 이름을 말하니 도망치듯 떠나갔다.

    이번엔 귀족 영애가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로든마이어 백작의 이름을 듣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가 된 베르덴은 느긋하게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지긴 했으나 더 이상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시선들 중에는 베르덴의 감각을 거슬리게 하는 것도 있었다.

    슬쩍 시선만을 돌리자, 저 멀리서 검은 머리 사이사이에 흰머리가 나있는 한 귀족이 베르덴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시선에서 적의…… 는 아니지만 못마땅해하는 듯한 감정이 느껴진다.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귀족이기에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누군가가 등 뒤에서 다가왔다.

    “정말로 무섭게 노려보시는군. 그렇지 않나?”

    옷 아래로 근육질의 체격이 훤히 드러나는 사내.

    그의 옆에 있는 책상 위에는 스무 개가 넘는 숟가락과 여덟 개나 되는 잔이 비어 있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듀켈이네. 저 멀리서 자네를 보고 있는 라비슈른 후작 각하의 장남이지.”

    공국의 두 개의 기둥 중 하나, 라비슈른 후작 가문.

    듀켈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베르덴이 마주 잡았다.

    “애셔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애셔. 범상치 않은 자라고 들었는데…… 연회장에 오길 잘했군.”

    듀켈이 한 입 크기로 잘린, 치즈 랍스터가 담긴 숟가락을 들었다.

    “자네 이거 먹어 봤나? 어떤가?”

    “맛이 좋더군요. 특히 재료가 신선했습니다.”

    “그렇겠지, 막대한 양의 돈을 쏟아부어 만든 요리니. 연회란 건 가문의 재력과 인맥을 표방하거든. 그런데 내가 워낙 먹성이 좋아서 연회만 열렸다 하면 모두가 내 눈치를 보기 바쁘지. 재작년에는 연회 내내 왕성의 주방을 털다 공왕 전하께 한 소리 들었다면 믿겠나?”

    듀켈이 웃으며 요리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걸론 부족했는지 다른 요리도 같이 입에 털어 넣고는 와인을 물이라도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도 품위가 있는 걸 보아 뼛속까지 귀족인 건 분명해 보였다.

    “음, 맛있군. 그런데 자네에게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아버지께서 자네를 그리 보고 있었던 거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짚이는 바는 없었다.

    애초에 초면이니.

    듀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거 특이하군. 내 아버지는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아닌데. 아, 혹시 다비르크 백작 때문인가?”

    “백작 각하 말입니까?”

    “다비르크 백작은 허영심이 많은 귀족이지. 가문의 위상으로 개인의 무능을 가리는 귀족. 몇 년 전 가주가 바뀐 뒤로 영지의 평가는 나락으로 치달아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했고. 근데 그만큼 겁도 많아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족속인,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자지. 내 아버지는 그런 부류를 굉장히 싫어하고.”

    겸손을 모르는 자를 싫어한다라.

    어쩌면 어제 베르덴이 한 발언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신경 쓸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 와서 발언을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베르덴이 라비슈른 후작에게 잘 보일 이유는 없었으니.

    이어 듀켈은 몇몇 시답잖은 질문들을 하고는 다른 요리를 찾아 자리를 떠났다. 후작가라 그런지 확실히 다른 귀족 자제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준결승이 다가왔다.

    * * *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베르덴과 잭이 준결승 상대를 가볍게 눌렀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뒤, 3위와 4위가 결정된 후에 결승이 시작되었다. 마법진 안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잭이 나지막이 물었다.

    “결승도 적당히 할 생각인가?”

    “시간을 끌 생각은 없습니다.”

    베르덴이 당당히 답했다.

    잭이 지금까지와의 시합 상대와는 다르다고 해도 자신 있었다.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하지.”

    순간 잭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살기가 아닌, 가진 힘을 다하겠다는 전력이 느껴졌다. 가볍게 볼 상대는 아니다. 베르덴도 그에 대답하듯 마력을 끌어 올렸다.

    달라진 기류.

    관객들이 숨을 죽였고, 레이크가 시작 신호를 울렸다.

    ───콰앙!

    직전 시합들과는 다르게 먼저 돌진한 잭.

    멀리서도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의 육중한 움직임이었다. 베르덴은 스태프에 번개를 부여함과 동시에 스태프에 저장된 마력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잭의 검과 부딪칠 시점, 마력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아아아!

    마법진이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 푸른빛이 번쩍이며 잭이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났지만, 상처는커녕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역시 근접전으로 상대하는 건 무린가.’

    베르덴이 최대한으로 위력을 끌어 올린 근접 일격으로도 고작 이 정도.

    역시나 적당히 상대할 만한 자가 아니었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잔류 번개가 낮게 뇌명을 지르며 궤적을 따라 잔상을 남겼다.

    시작과 동시에 벌어진 예상외의 충돌.

    그 화려한 개전(開戰)에 귀족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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