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79화 (79/366)

79화 대행사 (2)

쿠구구구구……!

연회장 바깥에 있는 넓은 정원이 서서히 움직였다.

두 개의 화려한 분수대는 일체 손상도 없이 양옆으로 옮겨졌고 잔디 또한 어느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어느새, 정원 중간에 갈색 흙으로 이뤄진 거대한 공터가 생겨났다. 그 조작 능력에 베르덴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베르덴이 즐겨 쓰는 지형조작과 달리, 이 마법은 훨씬 더 효율이 좋았으며 섬세했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건 기존 위계에 없는 마법이다. 그렇다는 건 법칙에서 벗어났다는 뜻.

페르드라 불린 주석 궁정 마법사는 땅과 관련된 스스로의 마도를 개척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마법전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마법사와 마도사 사이에 존재하는 좁힐 수 없는 간극.

베르덴이 위계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다양한 원소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가능한 것이지, 어느 한 속성에 국한되면 전력은 절반 이하로 내려갈 것이다.

베르덴의 능력은 넓고 방대했으나, 마도사가 마도를 이룬 분야와 비교한다면 그 깊이는 턱없이 얕다.

물론 그렇다고 맥없이 압도당할 리는 없을 테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최소한 5위계에 오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베르덴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무대가 완성됐다.

다른 궁정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새기고 마력을 불어넣자 반투명한 돔이 공터 전체를 감쌌다.

내부의 충격이 외부로 전해지는 걸 막기 위한 용도였다.

그리고 기사 한 명이 다가가 참가자들에게 번호표를 나눠 주었다.

베르덴의 번호는 16번, 끝자리였다.

“오늘은 1차전과 2차전을 치르고, 내일 준결승과 결승을 치른다. 중간에 휴식과 부상을 회복할 시간은 주어지지만 되도록 체력 분배를 잘하는 게 좋을 거다.”

바스티오의 단장, 레이크가 시합의 일정을 설명했다.

베르덴은 시선을 돌려 다른 참가자의 번호를 확인했다.

흉터 투성이 사내는 1번.

그리고 전직 아카데미 교수는 13번이다.

‘13번은 2차전에서, 1번은 결승에서 만나게 되는 건가.’

베르덴의 예상이 얼추 맞은 모양이다.

“1번과 2번! 호명된 참가자는 무대 앞에 서라!”

곧이어 첫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 * *

묵직한 중검을 든 흉터의 사내, 잭.

그 상대는 두 개의 소검을 든 표독스러운 눈빛의 여자, 르위엔.

육체적으로 차이가 컸지만 르위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순한 근력 따위야, 보다 빠른 속도에 맥을 못 추는 법이니까.

그렇게 자신한 그녀가 소검을 빙글 돌리며 히죽 웃었다.

“몸에 그림이 많네? 그럼 몇 개 더 그어도 괜찮겠지, 응?”

“…….”

“뭐야, 과묵한 콘셉트야? 재미없게.”

르위엔의 말에도 잭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심리전이 통하지 않는 건 좀 짜증이 났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뿐이었다.

이윽고 공국의 궁정 마법사가 시작 신호를 울렸다.

기를 활성화해 신체를 강화했다.

바닥을 박찬 그녀가 잭에게 육박하며 몸을 회전했다. 무릎과 어깨를 동시에 노리는 칼끝.

제자리에 서 있던 잭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무거운 충격에 르위엔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지면에 무사히 착지하기는 했으나 손목이 저릿했다.

‘힘이 무지막지하네. 최대한 가깝게 붙어야겠어.’

검의 길이상, 지근거리에선 그녀가 유리하다.

바닥을 차올려 잭의 얼굴에 흙을 뿌리고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접근했다. 그리고 옆구리를 향해 힘껏 소검을 내질렀다.

“느리군.”

“어?”

콱!

강철 건틀릿으로 검날을 움켜쥔 잭이 르위엔을 멀리 집어 던졌다.

겨우 낙법으로 충격을 완화했지만,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는 것보다 잭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어느새 다가온 잭이 르위엔의 목을 잡고는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꺄악!”

구경하고 있던 귀족 영애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다행히 힘 조절은 했는지 얼굴이 뭉개지지 않고 가벼운 타박상으로 그쳤다. 기절한 르위엔을 바닥에 둔 잭이 마법진 밖으로 나왔다.

치열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압도적인 시합.

몇몇 귀족은 꽤나 인상이 깊었는지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눴다.

“흉터가 가득한 역전의 전사라. 겉모습은 그럴듯하군.”

“검술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근력 하나는 뛰어난 모양일세.”

“그리고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제압하지 않는 걸 보아 신사적이기도 하고. 난 이 친구의 우승에 걸도록 하지.”

베르덴이 슬쩍 이야기를 엿들었다.

아무래도 1차전으로 참가자들의 실력을 대충 파악한 뒤, 참가자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내기하는 모양이다.

귀족 아니랄까 봐 오가는 액수가 한두 푼이 아니었다.

시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잭처럼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귀족이 데려온 자들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수준이 높았다.

저마다의 기술과 마법으로 서로 맞부딪치는 광경은 꽤나 재미있었다. 극적으로 역전승을 한 참가자는 귀족들에게서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잠시 후, 13번과 14번의 시합이 진행되었다.

가느다란 지팡이를 손에 든 남자, 루크넌. 그가 단안경을 추켜올리며 상대에게 말했다.

“한 번만 말하겠습니다. 추태를 보이기 싫으면 기권하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코웃음을 친 전사가 침을 바닥에 뱉으며 으르렁거렸다.

“아카데미 샌님 출신 아니랄까 봐, 원. 내가 그런다고 쫄 것 같냐?”

“당신을 생각해서 한 제안이었는데요. 감사를 하진 못할망정, 품위가 없으시군요.”

“품위는 개뿔. 그게 뭐 밥 먹여 줘?”

후웅!

전사가 손도끼를 휘둘렀다.

“여기선 이기는 게 품위야. 우승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너 같은 재수 없는 놈에게 질 수는 없지.”

“쯧쯧. 멍청하기는.”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하다.

무대의 양 끝에 선 둘. 시작 신호가 울림과 동시에 전사가 뒤로 힘껏 팔을 당겼다. 근육이 융기하며 체중이 한쪽으로 치우쳐졌다.

투척술.

전력을 다한 도끼에 맞으면 저렇게 얇은 팔다리 하나쯤은 쉽게 날아갈 터.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기엔 딱이었다.

“맞고 뒈져───.”

<일루전>

갑자기 전사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표적을 놓친 도끼는 루크넌을 스치기는커녕 엉뚱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기묘한 감각에 전사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더 볼 것도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끝내도록 하죠.”

루크넌의 지팡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마치 연주를 지휘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악몽의 절규>

마법이 발동한 순간, 비명을 지른 전사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발광하기 시작했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내 전사가 거품을 문 채 의식을 잃었고, 시합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마법진 바깥으로 나온 루크넌.

그가 베르덴을 향해 과시하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정신 계열이라. 아카데미 교수 출신이라더니 정말인가 보군.’

부여 계열의 하나인 정신 계열.

말 그대로 정신에 작용하는 마법으로, 습득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거기다 4위계 이상의 정신 계열 마법은 범죄에 악용되면 정말로 위험하기에, 별개의 자격증이 없으면 배우는 걸 금한다.

방금 전 루크넌이 보여 준 마법은 4위계.

정신력이 약하면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던 중 문득 옆에서 시선을 느꼈다.

멀리서 로든마이어 백작이 베르덴을 노려보고 있었다. 연회에서 말했던 한마디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만약 베르덴이 패배하거나 힘겹게 이기면 꽤나 꼴사납겠지.

그렇게 되면 그를 시합에 내세운 로든마이어 백작도 창피를 당할 것이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다.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된다. 다음 시합에서 보란 듯이 실력을 증명할 생각이니.

“15번과 16번 앞으로!”

마침내 베르덴의 차례가 왔다.

* * *

베르덴과 한 마법사가 무대 앞에 섰다.

미리 맡겼던 스태프를 기사들이 가져와 베르덴에게 건넸다.

심판을 맡은 바스티오 단장, 레이크가 말했다.

“승패는 상대방의 기절 혹은 항복으로 정하며 고의적으로 죽음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엄벌에 처한다. 사망 또한 마찬가지. 이것은 사투가 아니라 대련이란 걸 명심해라, 애셔 그리고 로빈. 둘 다 이해했나?”

“예.”

“물론입니다, 바실리온 기사단장님.”

“그럼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하라.”

동시에 무대 안으로 들어섰다.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 로빈이 베르덴의 얼굴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시발, 저렇게 생긴 놈이 소울 트리란 걸 토벌했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로빈은 4위계의 마법사였다.

나름대로 온갖 경험을 통해 악착같이 위로 올라왔다. 한계 위계가 4위계에 불과했지만, 그 실력은 같은 위계에서도 뛰어나 주변에 이름을 알릴 정도.

이번 시합에 참가한 것과 더불어 휘에 백작가의 가신으로 들어가게 될 예정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당연히 베르덴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나이는 한참이나 어린데 로빈과 같은 4위계에 다다른 데다가, 외모는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러웠다.

이건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불공평했다.

‘저놈은 사기꾼이 분명해.’

로빈, 그의 마음속에서 열등감과 질투심이란 것이 폭발했다.

제 손으로 직접 저 마법사의 민낯을 까발리고 철저하게 짓밟을 것이다. 그다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이 자리에서 보여 줄 것이다.

위계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평소보다 감정이 과하게 과열되었지만, 로빈의 신경은 오로지 베르덴에게 향해 있었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시작 신호가 들리길 기다렸다.

───시작!

<워터 스피어>

물로 이뤄진 창이 베르덴의 가슴을 노렸다.

적중한다면 연약한 인간의 몸은 손쉽게 뚫릴 것이다. 누가 봐도 상대방의 죽음을 노리고 날린 마법이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닿을 리가 없었다.

촤악!

순식간에 시전된 어스 스피어가 로빈의 마법을 정면에서 부쉈다.

눈을 부릅뜬 로빈이 다급하게 비행을 써서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가 있던 자리의 조금 옆을 지나친 바위의 창이 마법진에 부딪히며 부서졌다.

‘이게 무슨…….’

시전 속도가 말도 안 된다.

거기다 자신의 마법이 저항도 제대로 못 해 보고 그대로 박살 나다니. 애써 당황을 억누르고 고개를 돌렸는데, 베르덴이 사라져 있었다.

‘뒤인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 곧바로 마력방벽을 펼쳤다.

하늘에서 쇄도한 스태프와 부딪치며 굉음이 터졌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쩌적.

“뭣……!”

방벽에 새겨진 한 줄기 금.

고작 마법사가 휘두른 일격에 방벽이 손상되다니. 숨을 삼킨 로빈이 서둘러 마력을 거두고 뒤로 후퇴했다.

‘원소 계열이 아니었나?!’

모르겠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서 재정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베르덴에 의해 멱살을 잡혔다. 마법사가 아까와 같은 위력과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게 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바로 부여 계열 마법.

후웅-!

베르덴이 지상으로 낙하하며 로빈을 휘둘렀다.

저항하려 했지만 부여 마법으로 강화된 근력에 도저히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건 공허한 하늘이었다.

콰앙! 그렇게 등부터 지면에 처박혔다.

“허어억!”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통이 신경을 강타했다.

전신을 바들바들 떨던 로빈이 이내 축 늘어졌다. 당연히 죽은 게 아니라 기절이었다. 자연히 정신을 차리려면 좀 오래 걸리겠지만.

그렇게 이름난 4위계 마법사가 실력을 제대로 보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쓰러졌다. 전혀 원소 계열 마법사답지 않은 전투 방식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베르덴이 가볍게 스태프를 털고는, 1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 만에 마법진 바깥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