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대행사 (1)
연회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베르덴은 공국의 수도 리드론을 관광했다.
한 나라의 수도인 만큼 다른 도시보다 월등히 큰 시장 규모. 어쩌면 유용한 물건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점가부터 시작해 구석에 있는 골동품점까지 천천히 구경했다.
하지만 베르덴의 마음에 드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희귀한 재료로 만든 검과 갑옷 같은 비싼 장비들은 많은데, 베르덴 수준의 마법사가 유용하게 쓸 만한 건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마법사 장비는 수도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더 좋은 장비로 바꾸려면 제작을 맡기거나 어디 경매장에서 구할 수밖에 없겠군.’
다음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준 신분 보증서 덕분에 가치가 높은 서적들을 무료로 대여할 수 있었다.
베르덴은 부여 계열 마법에 대한 책을 몇 권 빌려서 저택으로 가져왔다.
책상 앞에 진득히 앉아 빠르게 책장을 훑었다. 정신 보호, 저항 강화 등 갖은 종류의 부여 마법이 실려 있었으나, 베르덴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찾았다.’
부여 계열의 4위계 마법, 엘레멘탈 인챈트(Elemental Enchant).
사물에 원소 효과를 부여하는 것으로, 원소 마법이 4위계 상위에 오르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다.
마법 자체가 그리 희귀한 건 아니었기에 조만간 서적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왔으니 이참에 독학할 생각이었다.
책을 세 번 정독한 베르덴이 스태프를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 해 보는 마법이다 보니 곧바로 성공할 수는 없었지만 마력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며 아홉 번째 시도에 돌입한 순간.
<번개 속성 부여>
파지지직!
스태프의 보석에 전류가 발광했다.
궤도를 따라 잔상을 남기는 푸른 빛줄기. 이 부여 마법은 로드론 기사단과 훈련을 하며 갈고닦은 무기술과 함께 큰 시너지를 일으킬 것이다.
화려한 마법 이펙트에 베르덴이 작게 미소 지었다.
“효과도 효과지만 대행사의 시합에서 퍼포먼스를 보여 주기엔 딱이겠어.”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마법에 적응하면 끝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회의 날이 다가왔다.
* * *
호화로운 왕성의 연회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맛좋고 신선한 음식들이 주기적으로 교체되었고, 최고급 와인의 향기가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대화를 나누는 고위 귀족들.
곳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결코 시끄럽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귀족이 아닌 자들은 분위기를 망칠라 조용히 구석에서 음식을 즐겼다.
오늘은 연회가 열린 지 바로 3일째가 되는 날.
이미 유명한 가수와 배우가 함께 공연을 하여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심야 무도회를 통해 연회를 즐겼다.
지금까지의 연회는 귀족들의 사교 활동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대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시합이 있었으니까.
마침내, 연회의 주최자가 등장했다.
“리비안트 공왕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리비안트 공왕과 그의 아내.
그리고 자식인 1왕자가 또한 그 뒤를 따랐다.
“2왕자께선 안 보이시는군.”
“원래 사교 활동을 싫어하시는 분이시잖나. 일찌감치 왕위 상속권을 포기하고 정무에만 매달리시니.”
이윽고 공왕이 발걸음을 멈췄다.
왕가의 등장에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는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취했다.
공왕이 손짓하자 고위 귀족부터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계단 위에서 공왕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얼굴을 보니 연회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모두 잔을 들게.”
연회는 회의와 같은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겉치레는 짧게 하고 본론을 중시하는 것이 공왕의 성격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한 공왕이 잔을 높이 들었다.
“공국을 위해.”
───공국을 위해.
진정한 연회의 시작.
각자의 입맛에 맞는 술 한 잔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렇게 서서히 분위기가 오르고 모두의 이목이 빠짐없이 집중되었을 때, 공왕이 말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도시 로리엔에 소울 트리라는 이형종이 나타났다. 위험도는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괴물로, 자칫하면 로리엔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까지 멸망할 수도 있었지. 하나 피해는 매우 경미했다. 바로 그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한 마법사가 있었지.”
모두가 공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분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흉악한 언데드인 통곡의 기사를 토벌했으며, 실종된 귀족의 목숨을 구한 데다가, 로리엔에서 소울 트리를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젊은 마법사.”
그때, 정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잿빛의 머리를 하고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한 사내. 그 신비스러운 외모에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누군가는 감탄하고 또 누군가는 경악했다.
그런 베르덴을 공왕이 직접 가리키며 소개했다.
“마법사 애셔. 이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별이다.”
* * *
‘소개가 좀 거창한데.’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지만 뭐랄까, 얼굴에 금칠을 한 기분이다.
특히 새로운 별이라는 대목이 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주위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공왕의 목소리 덕분인지 아니면 분위기 덕인지 모르겠으나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귀족이기에 이런 표현에 익숙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베르덴이 붉은색 융단 위를 거닐었다.
수십 개의 시선 속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공왕 앞, 계단 아래에 도착한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익숙지 않은 인사법이었으나 타인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어색하진 않았다.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저자가 특수 개체를 토벌했다고?”
“정확히 하게. 특수 개체가 아니라,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이야.”
“……그게 그거 아닌가?”
“허, 분명 4위계에 이르렀다고 들었는데 어려도 너무 어리군.”
“역시 보고에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닌가?”
“설마. 그런 걸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전하께 고했을 리가…….”
호기심에서 짙은 의심으로 뒤바뀐다.
작은 불씨가 장작을 타고 활활 타오른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의 상황에 공왕은 내심 흡족해하고는 모른 척하곤 귀족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의 걱정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애셔를 대행사의 시합에 참가시키기로 결정했지. 물론 본인의 동의는 받았다. 안 그런가, 로든마이어 백작?”
“그렇습니다, 전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향했다.
언제 손을 쓴 거냐고 따지는 듯한 따가운 눈초리를, 백작은 태연하게 무시했다.
“그럼 애셔에 대한 소개도 끝났으니 다음 차례로 넘어가도록 하지.”
공왕이 손을 튕기자 연회장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온몸이 흉터 투성이인 사내를 필두로, 귀족과 비슷한 몸가짐을 한 남자와 표독스러운 눈빛을 한 여성 등.
이들 모두가 귀족에게 고용된 시합의 참가자였다. 베르덴을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이 일제히 공왕에게 예를 갖췄다.
“작년보다 의기가 대단해 보이는데. 그럼 한 명씩 차례대로 자기소개 좀 부탁하지. 그리고 시합에 대한 각자의 포부도 말해 줬으면 좋겠군.”
공왕이 어느 한 명을 가리켰다.
그러자 참가자는 당당하게 자신의 내력을 밝혔고 그렇게 하나둘씩 소개가 이어졌다. 베르덴이 참가자들의 얼굴을 조용히 살폈다.
‘경력이 화려하군.’
모험가, 용병, 아카데미의 선생 등 하나같이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던 자들이다.
특히 단안경을 쓴 전직 아카데미의 선생 그리고 공화국에서 활동했다는 흉터 투성이 용병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둘이 시합의 마지막을 장식할 베르덴의 상대가 될 것 같았다.
이윽고 베르덴의 차례가 왔다.
“마지막으로 애셔, 자네만이 남았군. 소개는 아까 전에 끝냈으니 포부라도 말해 주는 게 어떻겠나?”
“알겠습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딱히 심사숙고하며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확실하게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여기 있는 모두에게 보이면 그뿐이다.
베르덴이 고개를 들고는 청명한 눈으로 공왕을 직시했다. 그리고 단언했다.
“적당히 끝내겠습니다.”
그 순간 연회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 * *
“오만한……!”
한 백작이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귀족이 손수 고용한 자는 그의 얼굴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자존심이고 곧 자랑이었다. 전적이 화려한 호위일수록 그렇다.
이 정도 되는 인물을 품에 넣고 있다고, 다른 귀족에게 부러움을 받으며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대행사의 시합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면 실질적인 가문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르덴의 발언은 귀족들의 심기를 긁기 충분했다.
최선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적당히 하겠다니! 그것은 참가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귀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 자신감인지 자만감인지 구분이 안 되는군.”
“자기 혼자서 소울 트리를 토벌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닌가? 분명 핏빛검이 아니었다면 이도 저도 못 하고 죽었을 것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저자 혼자 해낸 건 없지 않은가? 비르온에선 도살자가, 로리엔에선 핏빛검이 함께했으니. 이거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군.”
“실제로 타인에게 빌붙어 명성을 높이려는 자도 있으니…….”
연회장의 분위기가 들끓었다.
귀족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프라이드에 도전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왕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자신에게만 보일 정도로 올라간 입꼬리. 저 미소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누가 오든 간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훌륭하다.’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이렇게까지 고조하다니.
몇몇 귀족은 화난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짙은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게 보인다. 흥행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공왕은 베르덴을 보며 내심 침음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태생적으로 반골의 기질이 있다. 품에 넣긴 글렀군.’
그의 행적을 살펴봤을 때,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모험가 길드가 아닌, 그레이에서만 활동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 어딘가에 소속되어 행동이나 규율을 강제당하는 것을 싫어할 터.
억지로 손에 넣으려 하면 분명 도망칠 것이다. 아니, 도망치면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특출난 마법사란 존재는 재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대개 상식을 벗어났으니. 본인이 바라지 않는 이상 결코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왕으로서의 직감으론, 베르덴이란 마법사는 군림하되 지배받지 않는 자로 보였다.
‘물론 시합에서 지면 끝이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이곳에서는 더더욱.
만약 애셔가 진다면 허세 가득한 마법사로 여겨질 것이다. 그가 해 왔던 모든 일들이 폄하되고, 이뤄 낼 모든 것들이 거짓으로 치부되겠지.
과연 어떨까.
“페르드.”
“부르셨습니까, 전하.”
마도에 이른 5위계 마법사이자 공국의 주석 궁정 마법사, 페르드 다니안스.
“무대를 만들어라.”
전에 말했던 것보다 더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