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77화 (77/366)
  • 77화 리비안트 공왕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저 노인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을 터였다. 왕을 사칭하는 건 어느 나라나 중죄 중의 중죄에 속하니까. 수도 리드론에선 더더욱.

    베르덴이 무릎을 꿇으려 몸을 숙이자 권위적인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그만. 겉치레에 불과한 예의는 필요 없으니 어서 앉도록.”

    “……예.”

    근처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레 앉아 공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공왕이 턱을 쓸며 베르덴을 유심히 살펴봤다.

    “분명 애셔라고 했었지. 혹시 마탑 출신인가?”

    아카데미와 마탑.

    마법사로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은 이 두 곳이 전부다.

    아카데미는 주로 성년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이다.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그 재능과 본인의 의향에 따라 진로를 정하게 된다.

    마르테스에서 만난 이리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에 반해 마탑은 나이에 관계없이 재능만 있다면 들어갈 수 있다.

    실질적인 전문 지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장소로, 제각기 천재라고 불렸던 사람이 득실거린다. 그만큼 인재가 많다는 뜻이다.

    거기서 두각을 드러내면 마탑주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내 이론을 훔쳐 간 마탑주의 세 번째 제자, 루커드 매니악스처럼.’

    순간 격해진 감정을 차분히 억누르고, 공왕의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베르덴이 마탑 출신이란 걸 알 리가 없을 테니 그냥 찔러본 것일 터.

    역천을 이룬 베르덴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었다면 진즉에 이름을 날렸을 테니까. 소거법으로 남은 건 마탑뿐이다.

    베르덴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차분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흠, 아카데미 출신도 아닐 테고. 이거 참 궁금해지는군.”

    공왕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깃들었다.

    “자네가 공국에서 해낸 일들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업적은 아니지. 물론 전부 자네 혼자 이룬 것은 아니겠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데 아카데미도 마탑 출신도 아니다라…….”

    말을 멈추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소리 없이 침대를 톡톡 두들기던 손가락이 멈춰 섰다.

    “혹시 출신이 어디인가?”

    가벼운 질문이었으나 분위기는 급변했다.

    실재하는 힘이 아닌 공왕의 존재 자체가 발산하는 위세. 베르덴은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한 나라의 왕.’

    단순히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와는 다르다.

    이건 수백만 명을 이끄는 지배자로서의 품격이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억지로 무릎 꿇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 굴종하게 만드는 존재감.

    심약한 사람은 공왕 앞에서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아니었다.

    상식에 맞는,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긴 하겠지만 마탑주도 왕도 황제도, 그 어떤 존재이든 간에 감히 그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왕의 위세에 당당히 맞서며 공왕에게 답했다.

    “저는 줄곧 산속에서 스승님과 함께 지내 왔습니다.”

    고아 출신으로 스승님에게 주워져 제자로서, 자식으로서 자라 왔다는 이야기. 베르덴이 만들어 낸 거짓된 과거였다.

    이게 타인이 가장 납득할 만한 배경이었으니까. 독학했다고 하면 믿기는커녕 더욱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낼 테니.

    그러자 공왕이 물었다.

    “스승이라……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간혹 스승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반’이라고 부르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반 스승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본명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스승님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리셨습니다.”

    공왕이 호위를 맡고 있는 노인, 엔드릭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재야에 숨은 마법사라. 그럴듯한 이야기야.’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베르덴의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었지만 신빙성이 없는 이야긴 아니었다. 실제로 고명한 스승에게 교육을 받고 세상으로 나오는 제자들이 있었으니.

    제대로 된 이름이나 이명이라도 알면 좋겠지만 제자조차 들은 적이 없다니 어떻게 알아볼 수도 없고.

    물론 캐내 봤자 나오는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야 베르덴도 모르니까.

    공왕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자네 같은 마법사를 길렀으니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하겠어.”

    그것을 끝으로 공왕은 집요하게 베르덴의 출신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애초에 심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인물인지 정말로 궁금했기에 찾아온 것이었으니까. 다만 대화를 나누면서 그 호기심이 더 깊어진 게 문제긴 하지만.

    공왕이 시계를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음, 시간이 별로 없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 말입니까?”

    그럼 지금까지 한 대화는 뭐였지?

    “바스티오의 단장에게 이미 들었겠지만, 비행정까지 움직이며 자네를 수도로 불러들인 이유는 이번 시합의 흥행과 소울 트리 토벌에 대한 치하를 위해서다.”

    물론 공왕 본인의 호기심이 가장 컸다.

    며칠 더 기다릴 수 있는 참을성이 부족했으니까. 그 덕에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호위인 엔드릭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서 이런 성격을 고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이 리드론엔 꽤나 많은 귀족이 모인 상태다. 내게 영지에 대한 보고를 올린 후, 즐겁게 연회를 즐길 예정이지. 거기다 이번 연회에 애셔라는 화제의 인물이 나온다고 알고 있는 터라 무척이나 기대감을 품고 있다.”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젊은 마법사.

    누구라도 흥미가 가지 않을 리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흥미보단 의심이 더 크겠지만.

    정치에 뼛속까지 물든 귀족들은 베르덴을 검증하려 들 것이다.

    단순히 미지의 강자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다름 아닌 공국의 재산을 사용해 치하를 내리는 것이니 철저하게 확인하려고 하겠지.

    마땅히 귀족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였고 베르덴으로선 당연히 거쳐야 할 절차였다.

    “자네의 입장에선 별로 좋지 않겠지. 귀족이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하나 다 대응하자니 귀찮아 죽겠고.”

    “…….”

    “하하, 표정을 보니 아주 질색인가 보군. 그래서 생각했지. 그럴 바에 차라리 크게 한판 벌이는 게 어떤가 하고 말이야.”

    대행사의 시합.

    거기서 베르덴은 귀족들이 데려온 자들과 맞붙고, 모두 앞에서 그 힘을 증명할 것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이미 로든마이어 백작이 손을 쓴 모양이더군. 그 친구도 참 눈치 하나는 빨라 가지고…… 뭐, 힘들게 자네를 설득하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이래저래 김이 빠져. 그런 의미에서 자네에게 하나 제안을 하고 싶은데.”

    “어떤 제안입니까?”

    “대행사의 시합에 참가하는 인원은 총 16명. 형식은 토너먼트로, 이틀에 걸쳐 진행이 된다.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한 시합 방식이지. 하지만 그러다 보니 명확한 단점이 하나 생기더군.”

    순서가 무작위인 터라 결선에서 접전을 펼쳐야 할 강자들이 1차 또는 2차 시합에서 맞붙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야 후반부에서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더 큰 자극이 앞설수록 그보다 약한 자극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공왕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본인이 직접 정하는 게 어떤가 하고 말이다.

    눈치 볼 것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 국가의 왕이었으니까.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시합 순서를 내 임의대로 몰래 정할 생각이다. 최대한 점진적인 자극을 위해서 말이야.”

    “……그래도 되는 겁니까?”

    “들키면 귀족들에게 불평 좀 듣겠지만, 화려한 볼거리를 위해서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베르덴이 엔드릭에게 슬쩍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공왕이 마음먹은 이상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지. 이렇게 되면 자네는 시합에서 강자들과 연이어 맞붙게 되는 거니까. 거절해도 충분히 이해는 해. 물론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공왕이 은근히 베르덴을 도발했다.

    베르덴은 딱히 아무런 생각도 들지는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공왕의 제안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시합에서 1위를 할 생각으로 온 거니까.

    아직 글러트니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지금, 베르덴은 보다 큰 보수를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오, 정말인가? 하하, 이거 참 말이 통하는 친구라 아주 기쁘군. 꽤나…….”

    “전하, 이제 왕성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엔드릭의 말에 공왕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공왕이 베르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만약 전부를 납득시킬 만한 힘을 보여 준다면, 특별한 상을 내리도록 하지. 그러니 부디 좋은 모습을 보여 줬으면 좋겠군, 애셔여.”

    그 말을 남기고 공왕과 엔드릭이 저택에서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로든마이어 백작 방으로 들어왔다.

    “무사히 대화를 끝낸 모양이군.”

    “…….”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갑자기 전하께서 찾아오실 줄은 몰랐으니까. 이렇게 예측이 불가능하게 움직이시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작게 헛기침을 한 백작이 베르덴에게 공왕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슬쩍 물었다.

    사족은 치우고 공왕의 제안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자, 백작이 진심으로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네가 시합에서 1위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군.”

    ……대체 뭘 받길래 저리도 집착하는 건지, 원.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를 않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9일이 지났다.

    * * *

    왕성의 회의실에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중심에 앉아 있는 리비안트 공왕과 그의 양옆을 차지하고 있는 네 명의 행정가. 이들 모두가 각 영지에 대한 실적을 확인하고, 직접 영주의 평가를 내리는 심사관이었다.

    “그럼 시작하지.”

    공왕이 대행사의 시작을 알린 순간.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한 귀족이 걸어 들어왔다. 동남쪽에 있는 영지를 다스리는 리딜리안 백작, 그의 보좌관인 필베인 자작이었다.

    자작이 공왕에게 예를 갖추고는 의자에 앉았다.

    귀족이라고 해도 견디기 어려운 압박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공왕의 목소리가 회의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필베인 자작, 겨울 산불로 인해 바쁜 리딜리안 백작을 대신해 왔군.”

    “그, 그렇습니다. 전하.”

    “영주로서 책무를 다하는 건 훌륭한 일이지.”

    공왕의 칭찬에 자작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심사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그런데 대응이 많이 늦었군. 고지대에 위치한 리딜리안 영지의 특성상, 산불을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무려 4일이 지나서야 움직였다니.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 그게…….”

    “그리고 모험가 길드와 아인종 토벌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고, 작년에 비해 농업 생산량이 15% 가까이 떨어졌군. 영지 내에 있는 도시의 성장률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낮고. 뭐, 전자는 흔한 일이니 넘어가겠지만 나머지는 큰 문젠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필베인 자작?”

    대행사는 단순히 보고서를 읽는 게 다가 아니다.

    보다 면밀하게 영지를 파악하여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공작위에 있을 시절, 가장 거대한 영지를 다스렸던 리비안트 공왕. 어지간해서 그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얼마 후, 필베인 자작이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아주 탈탈 털린 모양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에 다른 귀족들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윽고 다른 귀족들도 공왕에게 직접 심사를 받았다.

    몇몇은 잘 넘겼는지 싱글벙글했지만 대부분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그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저었다.

    ‘귀족으로 사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군.’

    이어 그의 차례가 다가왔다.

    회의실로 들어와 자리에 착석하자 공왕이 작게 감탄하며 백작을 바라봤다.

    “영지 상태가 훌륭하군. 예상했던 것보다 전체적으로 앞서 있어. 범죄율도 해가 지날수록 감소하는 추세고. 이런 지표는 꽤나 오랜만이군.”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대규모 실종 사태가 일어난 원인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군.”

    예상했던 지적이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러 영지를 거쳐 수백 명이 실종된 사건으로,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짧은 시간에 원인을 규명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그걸 해내는 게 영주의 책무가 아닌가?”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다른 영지와 달리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고, 사라진 실종자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시간만 주신다면 분명 누가 벌인 짓인지 확실하게 원인을 규명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백작이 자신 있게 답했다.

    턱을 쓸며 고민하던 공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

    로든마이어 백작의 심사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가 경험한 역대 대행사 중에서도 가장 좋은 평가였다. 충분히 영지 평가 1위를 노려 볼 만한 정도.

    ‘거기다 대행사의 시합에서 애셔가 1등을 한다면…….’

    1위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시합의 결과 또한 평가에 일부분 들어가니까.

    백작이 내심 미소를 지으며 몰래 주먹을 콱 움켜잡았다.

    그런 와중에 심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 그렇게 대행사의 첫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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