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수도 리드론
비행정에서 보낸 시간은 평온했다.
이따금씩 의심이 깃든 시선을 보내던, 카이네라는 마법사가 내부를 안내해 준 뒤로는 로든마이어 저택에서 보내던 시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식사는 요리사들이 알아서 차려 주는 데다가, 비행정 내부에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니까.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덕분인지 강도 높은 훈련을 하다 벽의 일부가 파손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수복되었다.
이 비행정 자체가 하나의 마법 물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후우.”
간단히 몸을 푼 베르덴이 옆으로 시선을 향했다.
두 기사단이 훈련용 무기를 들고 차례대로 서로 간단한 대련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육체적으로 보나 기술적으로 보나 바스티오 기사단 쪽이 로드론 기사단보다 평균적으로 한 단계 이상 앞섰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방어에 치중된 검술이다. 내 무기술로는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하겠어.’
물론 마법을 사용하면 다르겠지만.
베르덴은 대련을 유심히 관찰했다.
단순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배울 게 하나둘씩 보였다. 이런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바스티오의 기사와 시선을 마주쳤다.
적대감…… 은 아니고 의심을 하는 듯한,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날이 바짝 서 있군.’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모험가도 용병도 아닌, 출신이 불분명한 마법사인 베르덴. 설령 로리엔에서 온 보고가 사실이라 한들 제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게 사람이니까.
‘어쩌면 진실이라고 믿기에 그러는 걸지도.’
무엇보다 이들은 기사였으니.
베르덴이 공국에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더욱 경계심을 세우는 것일 수도 있었다.
뭐, 애초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괜한 걱정이지만.
베르덴은 시선을 무시하고 자기 개발에 치중했다.
거기다 기존에 하던 훈련에 더해, 레이크 단장에게 직접 허락을 받아 느긋하게 비행정의 내부를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성은 대충 이 정도인가.”
마력으로 그려 낸 비행정의 마법진.
수십 개의 마법진이 서로 연결되고 연계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동력실의 것은 볼 수 없었으나 대략적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난 며칠간 시간을 투자한 결과였다.
언제 다시 이런 전략용 비행정에 탑승할 수 있을지 몰랐기에, 연구자로서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로든마이어 백작의 제안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
‘당장 어딘가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지.’
지식과 경험은 삶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쌓고 또 쌓다 보면 언젠가 하늘에 닿는 법. 베르덴은 그러한 이치를 이미 깨우친 지 오래였다.
이내 날이 저물고 베르덴이 침대에 누워 잠을 정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승무원이 문을 두들겼다.
“애셔 님, 곧 수도 리드론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벌써 도착인가.
공국에서 가장 빠른 비행정이라고 자신할 만하군.
베르덴이 갑판으로 올라갔다.
서서히 고도가 내려가며 구름을 빠져나오자, 저 멀리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도시가 빛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레이크가 물었다.
“어떤가, 공국의 수도는. 아름답지 않나?”
“다른 도시들과는 확연하게 다르군요.”
베르덴은 단 한 번도 한 나라의 수도에 방문해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다른 도시나 영지와의 차이를 보다 더 실감할 수 있었다.
“옛날에 막 독립했을 때는 저것의 반조차 되지 않았네.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활기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지. 이렇게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워.”
레이크의 시선이 드높은 왕성으로 향했다.
그의 두 눈에는 존경과 숭상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곧 착륙장에 도착할 걸세. 정박 직전에는 보호용 마법진을 꺼 두니, 넘어지지 않도록 충격에 대비하게.”
“알겠습니다.”
* * *
착륙장의 경비는 삼엄했다.
바스티오 기사단과 로드론 기사단 그리고 승무원도 예외는 없이, 철저한 신분 조사를 마치고서야 비행정에서 내릴 수 있었다.
실었던 물자와 군마까지도 남김없이 검수를 진행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레이크 단장님.”
“수고하게.”
“특이 사항 없습니다. 수도에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로든마이어 백작 각하.”
“음.”
각자 경비를 거치고 출구로 나왔다.
그 앞에는 검은색 말이 이끄는 호화로운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마차를 타고 이동할 걸세. 수도에 있는 백작의 별장으로 갈 예정인데, 착륙장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좀 있으니 화장실이 급하면 미리 갔다 오는 게 좋을 거야.”
“저는 괜찮습니다.”
“백작, 자네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묻지 마라.”
“그럼 됐군. 바로 출발하면 되겠어.”
레이크와 베르덴이 마차에 탑승하자 마부가 고삐를 내리쳤다.
흑마(黑馬)가 발굽을 지면에 내리찍자 바깥의 풍경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그런 마차의 주위를 바스티오 기사단은 무리 없이 호위하고 있었다.
베르덴이 마차의 벽면을 톡톡 두들겼다.
‘이렇게나 빠른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니. 비행정과 마찬가지로 마차 자체가 하나의 매직 아이템인가.’
부품 하나하나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그게 전부 합쳐진 이 마차의 값은 수십억은 가볍게 호가하겠지.
베르덴이 진지한 눈으로 마차를 관찰하고 있자, 레이크가 말했다.
“마법사답게 매직 아이템에도 관심이 많은가 보군. 이 마차는 아티슨 마탑에 주문 제작 한 걸로, 공국에도 보유하고 있는 귀족은 거의 없네.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다고 해도 주문을 받아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상품을 보다 비싸게 만드는 건 희귀성.
물건을 한정된 숫자만 만들어 경매를 통해 더욱 가치를 올리는 것이야말로 아티슨 마탑이 마케팅을 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천문학적으로 비싸긴 했으나 그 이상으로 성능이 뛰어나며,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명성이 올라갈 정도라 구매자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아티슨이 내놓은 상품은 하나같이 부유한 권력자들의 입맛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말했다.
“지금 충분히 만끽하는 게 좋을 거다. 공국의 귀족 중에도 이 마차를 타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공왕 전하의 성격이 아니었다면 구경조차 하지 못했겠지.”
“성격……?”
“하하, 그렇긴 하지. 몰래 하는 말이지만 공왕 전하께서는 성격이 급하… 크흠. 참을성이 좀 부족한 편이시지, 호기심도 강하시고. 그걸 모르는 귀족은 없지만 그렇다고 소문내지는 말고 일단은 혼자만 알아 두게.”
참을성이 없다라.
베르덴은 그 충고를 머리 한편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리드론의 성문에 도착했다.
멀리서 마차와 바스티오 기사단의 문장을 확인한 병사들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대로 수도에 입성하고부터 마차의 속도를 최대한 낮추었다.
베르덴이 창문 너머로 수도의 풍경을 바라봤다.
공국의 대행사가 가까워지는 탓인지, 물건을 옮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관광을 하러 온 여행객들로 거리가 북적거렸다.
거리 곳곳에는 노점상이 열려, 시민들이 저마다 먹거리를 하나씩 들고 다니고 있었다.
‘이게 수도인가.’
코헨과는 정반대로 활기가 넘친다.
휴양도시 브리엔테와 비슷한 분위기였으나 인구수는 이곳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거리를 구경하고 있자 마차는 상점가로 들어섰다.
무기와 방어구부터 시작해 마법 물품, 연금술, 액세서리 등 갖은 종류의 상점이 가득했다. 베르덴으로선 꽤나 관심이 가는 거리였다.
그때, 로든마이어 백작이 말했다.
“구경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녁 전까지면 상관없다. 레이크, 잠시 마차를 멈춰도 괜찮겠지?”
“이 마차를 반환하기까지 시간은 넉넉하니까……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거리로 내려선 베르덴이 슬쩍 백작에게 시선을 향했다.
‘오늘따라 상당히 호의적이군.’
며칠간 봐 온, 백작의 무심한 성격과는 딴판이다.
아마 대행사의 시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베르덴은 백작에게 있어 상품을 안겨 줄 귀한 인재니까. 이해득실을 따졌을 때, 적당히 호의를 베푸는 것이 얻을 게 많다는 판단일 터.
‘뭐, 나야 좋은 일이지.’
베르덴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례차례 상점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 * *
무기 중에 베르덴이 원하는 물건은 없었다.
애초에 도검류는 사용할 일이 없는 데다가, 스태프 쪽에는 좋은 게 있긴 했지만 가성비가 매우 떨어졌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블루 미스릴 스태프와 비교했을 때, 가격은 3배 가까이 비싸면서 성능은 티끌만큼 높은 정도.
이런 걸 돈 주고 사는 건 호구 잡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액세서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방어구에선 수확이 있었다.
포레스트 와이번의 가죽으로 만든 부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발에 딱 맞는 데다가 신축성까지 좋다. 준수한 물리 저항력과 속성 저항력은 덤이다.
마법 물품은 아니라 마법적인 효과는 없었으나, 움직임이 한결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다.
가격은 6,700만 엘크.
그리 비싸지도 않고 싸지도 않은 적당한 액수였다. 곧바로 카드를 긁어 지불했다.
그렇게 볼일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타 목적지로 향했다.
수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깔끔한 저택.
로든마이어 백작이 거주하고 있는 자택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배정된 방에 들어갔다.
그러곤 공국의 대행사에 대해 생각했다.
‘9일 뒤에 대행사가 열린다고 했으니, 연회는 12일 후인가.’
귀족들이 공왕에게 3일간 보고를 하고, 그다음 날 바로 연회가 개최된다.
베르덴이 참가하는 건 연회의 셋째 날부터. 대행사의 시합이 시작되는 날, 화제의 인물인 자신을 극적으로 등장시킬 생각인 것 같다.
기본적인 예절은 마탑에서 배워 대충 알긴 하지만, 약간의 긴장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직접 한 국가의 왕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고, 연회 자체에 참석하는 것도 처음이니까.
‘최근 들어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군.’
그만큼 마탑에서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는 뜻인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염력으로 문을 열자, 경직된 얼굴을 한 백작가의 하인이 나타났다.
“배, 배, 백작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저도 자, 잘은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과하게 떨린다.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지만, 뭘 물어봐도 하인은 모른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뭔가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할 수 없이 베르덴은 하인의 뒤를 따라 3층 구석에 있는 방 앞에 섰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하인이 재빠르게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베르덴이 이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제야 왔나? 기다리다 돌아가시겠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람과 허리춤에 검 한 자루를 찬 채 그 곁을 지키고 있는 호위. 두 명 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베르덴을 불렀다던 로든마이어 백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적대적인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베르덴이 조심히 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구긴, 이 나라의 주인이지.”
주인?
그 순간, 베르덴의 뇌리에 레이크의 충고가 스쳤다.
리비안트 공왕 특(特), 참을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