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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75화 (75/366)
  • 75화 초대 (3)

    기, 마력, 신성력.

    이 세 가지에서 파생되는 위압감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저 존재감으로 상대의 정신을 억누르고 육체마저 짓누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이 나약한 자를 제압하기엔 충분하나, 수준에 오른 강자를 위압하는 데는 거의 효과가 없다.

    레이크는 그런 강자 중 하나로서, 지금까지 숱한 강자를 상대해 왔다.

    그중엔 마도에 이른 마도사도, 손끝에서 피워 낸 기운만으로 집채만 한 바위를 양단하는 검사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넘지 못해 절망하는 벽. 그러한 벽을 넘어선 자들은 하나같이 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나, 결국 승리한 건 레이크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냐, 이 감각은.’

    마치 바다와 같다.

    전신을 휩싸는 마력의 압박감은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다. 그런데 마력 위압을 통해, 한순간 느껴졌던 깊이가 너무도 이상했다.

    레이크조차 밑바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라니.

    ‘……그릇이 다르다.’

    어쩌면 그가 만난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잠재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레이크라고 해도 실수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 애셔란 마법사는, 적어도 세상에 널리고 널린 천재와는 다른 존재임이 분명했다.

    숨을 삼킨 레이크가 옅게 웃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증명이군.’

    뭘 해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공왕 전하께서 품에 안으려고 하실지, 우호적인 관계만을 맺으실지, 아니면 싹이 자라기 전에 잘라 버리려 하실지는 잘 모르겠으나 생각지도 못한 수확인 건 분명했다.

    이걸로 레이크가 할 일은 끝났다.

    공왕 전하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으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증명은 여기까지다.

    레이크가 서서히 기를 끌어올렸다.

    고요한 마력의 바다에 거대한 파문이 일며, 그를 위압하던 마력이 사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 *

    성질이 다른 두 개의 힘이 서로 충돌했다.

    주변의 공기가 흔들리며 이내 식탁과 찻잔이 박살 나거나, 정원의 잔디가 흩어지는 등 물리적인 영향이 가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레이크를 주시했다.

    ‘마력 위압이 전혀 안 통하는군.’

    휴양 도시에서 리스너를 위압했을 때보다 수준이 한 단계 높이 올랐는데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위압하고 있는 마력을 역으로 밀어냈다.

    이게 공왕 직속 기사단의 단장인가.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표정이 약간 흔들리는 게 다라니.

    역시 웬만큼 격차가 벌어지지 않은 이상, 단순히 마력량으로 찍어 누르는 건 마력 낭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나저나.

    “이걸로 증명은 된 겁니까?”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 마법까지 쓸 필요는 없어진 것 같다.

    베르덴과 레이크가 동시에 마력과 기를 줄이자 중압감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러던 그때, 공중에서 날아온 누군가가 정원에 난입했다.

    “단장님! 괜찮으세요?!”

    저택을 나섰을 때, 베르덴을 노려보던, 은빛 갑옷을 입은 여자 마법사.

    그녀가 심상찮은 힘의 충돌을 느끼고 급하게 비행을 써서 날아온 모양이다. 이어 뒤따라온 바스티오의 기사들과 로드론의 기사들이 각자가 모시는 단장과 백작의 안위를 살폈다.

    그중 바스티오 기사들은 무기에 손을 올려 두고 있었는데, 명확하게 베르덴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레이크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으니 진정해라, 카이네.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

    “……알겠습니다.”

    카이네라 불린 여성 마법사가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동시에 기사들도 각자 무기에서 손을 떼었다.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네, 로든마이어 백작. 그리고 애셔. 그래도 다행히 필요한 대화는 거의 다 한 것 같군. 그럼 둘 다 언제쯤 수도로 출발하고 싶나? 가능하면 오늘 밤 늦게나 내일 일찍이면 좋겠는데.”

    그러자 백작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내일 출발하자는 무언의 시선이 전해졌다.

    “……내일로 하죠.”

    “좋네. 그럼 내일 출발하는 걸로 하지.”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식사 시간은 끝이 났다. 레이크와 백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들을 지나치고는 저택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든마이어 백작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식탁은 박살 났고, 방금까지 쥐고 있던 찻잔은 손잡이만 남아 있었다. 베르덴과 레이크의 힘이 서로 충돌한 결과였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백작이 손잡이를 집어 던졌고, 레이크가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미안하군.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쳤어. 추후에 배상을…….”

    “쟤는 내가 잡았다.”

    “……응?”

    “이번 대행사의 시합은 내가 1등이다.”

    이미 레이크의 말은 백작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 로든마이어 백작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레이크가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저렇게 좋은 건가. 하긴 저 정도면 핏빛검 같은 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1위는 따 놓은 당상일 테니.”

    “저 남자가 정말로 소울 트리를 토벌한 게 맞을까요? 아무리 봐도 믿기지가 않는데요.”

    옆에 있던 카이네가 물었다.

    레이크는 이해가 된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좀 어려 보이긴 하지?”

    “전부 다요.”

    액면 그대로의 나이라면 한창 마법을 체득하고는 서서히 실전에 적용하고 있어야 할 시긴데. 벌써 그 단계를 아득히 넘어서,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괴물을 토벌하는 경지라니.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그래서 보다 정확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동료들도 같은 생각이고요.”

    카이네가 주먹을 쥐었다.

    명령만 내린다면 당장 베르덴과 마법전을 벌이기라도 할 것처럼. 부하들을 둘러본 레이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대였다.

    “이해는 하지만 안 된다, 우리는 저 마법사를 무사히 데리고 오라는 전하의 명을 받았으니. 어떠한 마찰도 허가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검증은 충분히 마쳤다.”

    “네?”

    “그러니 괜한 걱정 말고 내일 당장 떠날 채비를 하라. 혹시나 부족한 물자 있으면 백작가에 말해 미리미리 챙기고. 이만 해산.”

    단장의 명령에 기사들은 마지못해 자리를 떠났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베르덴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같은 마법사로서 용납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이크는 생각했다.

    카이네는 강하다.

    땅과 물. 두 속성을 5위계까지 깨우쳤으니. 측정된 한계 위계에 다다랐지만 아직 성장할 여지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여러 실전과 훈련을 통해 경험을 쌓았기에, 같은 수준의 원소 마법사보다도 훨씬 강했다.

    ‘하지만 애셔를 이길 수 있을까?’

    그가 알기로, 애셔의 위계는 4위계.

    무려 1위계나 차이가 났지만 섣불리 누가 승리할지 단정할 수 없었다. 그가 통상적인 4위계 마법사를 아득히 벗어난 건 확실하니까.

    거기다 변수라는 게 존재하기에, 상상만으로는 승패를 쉬이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레이크가 가진 직감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끝 모를 잠재력을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는데도 강자의 반열에 오른 애셔에게 말이다. 카이네가 이걸 듣는다면 분명 자신이 이긴다고 화를 냈겠지.

    ‘부하들이 이렇게 믿지 못하는데 과연 귀족들은 어떨까.’

    안 봐도 뻔하다.

    애셔는 주목받을 것이고 의심받을 것이다.

    호기심을 느낀 귀족들이 그를 시험하려 들겠지. 어리고 잘생긴 외모에 속아 그 안에 숨겨진 깊이를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분명 대행사에 큰 소란이 일리라.

    ‘전하께서 좋아하시겠군.’

    * * *

    다음 날 아침.

    떠날 채비를 마친 베르덴은 로든마이어 백작 그리고 로드론 기사들과 함께 레이크를 따라 저택을 떠났다.

    베르덴은 바스티오 기사단의 말을 얻어 탔는데, 상위 품종인 데다가 특수한 훈련까지 마친 군마의 속도는 비행에 버금갈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정이 정박되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 엄청난 크기군.’

    수백 명은 거뜬히 실을 정도.

    곳곳에 새겨진 방위 마법진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비행정의 중심에서는 거대한 마력 반응이 느껴진다.

    분명 동력 역할을 하는 마석이겠지.

    마탑도 비행정을 보유하고 있지만 선착장은 따로 있었기에 말단인 베르덴은 가까이 갈 기회조차 없었다.

    평생 동안 하늘에 떠 있는 비행정만 봐 왔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눈을 빛내고 있는 베르덴에게 레이크가 다가갔다.

    “이 배의 이름은 ‘리시드(Recede)’라고 하네. 공국이 보유하고 있는 비행정 중 가장 빠르기에 붙여진 이름이지.”

    “그래서 충격을 보호하는 마법진이 많은 거군요.”

    “허, 마법진도 볼 줄 아나? 이거 참 다재다능한 마법사군. 보아하니 비행정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원한다면 안내해 주지. 옆에 있는 카이네가.”

    “……네? 저요?”

    옆에 있던 카이네가 눈을 깜빡였다.

    “단장인 내가 할까?”

    “그건…… 아니죠.”

    “그럼 됐군. 출발하면 베르덴을 친절히 안내해 주게. 제군들, 전부 승선하라!”

    승무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든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비행정에 싣고 사람들이 갑판 위로 올라갔다. 베르덴과 로든마이어 백작을 비롯한 전원이 탑승하자 집채만 한 크기의 마석이 기동했다.

    엔진 역할을 하는 마법진에 마력이 흘러들어 가면서 리시드가 서서히 부상했다.

    후우웅.

    어느새 구름 위로 올라갔다. 이어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구름을 빠르게 지나쳐 갔으나 마법진 덕분에 비행정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거센 바람은커녕 어떤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로든마이어 백작이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그러고는 벽 한가운데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리시드를 타는 건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독립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군. 아마 내가 이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반대편에 있었지. 자네는 엉망인 몰골로 검을 잡은 채 벽에 멍하니 기대어 있었고. 왜, 갑자기 그때가 그립나?”

    “하, 그립긴 무슨. 리시드의 태반이 박살 난 터라, 하마터면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칠 뻔했는데. 솔직히 말해 생각조차도 하기 싫군.”

    “그때 리시드에 타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지.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고. 뭐, 그렇다 해도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테지만.”

    로든마이어 백작과 레이크가 서로 대화를 나눴다.

    맥락으로 보아 22년 전 리비안트 공국이 독립했을 때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베르덴은 물론이고 카이네조차 잘 모르는 과거였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레이크가 고개를 뒤로 향했다.

    “나는 백작과 잠시 얘기 좀 더 나누도록 하지. 카이네?”

    “……네, 단장님.”

    레이크와 백작이 떠나자, 카이네와 베르덴 둘이 갑판 구석에 남았다.

    어색한 기류 속에서 카이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장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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