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마핵 (3)
베르덴이 재빨리 마력감지를 펼쳤다.
그러자 사방에서 수많은 생명체가 감지되었다. 형태로 보아 전부 다 같은 종류의 거미였다.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온 거지?’
이 정도로 가까이 왔다면 진즉에 느꼈어야 정상이었는데.
그러자 리토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기 거미들은 좀 다르거든. 기척을 숨기는 데 엄청 능하지. 나도 어쩌다 몇 번 물리기도 했고.”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겁니까?”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나.”
태연하게 말하는 리토에게 베르덴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아까 전에 자신에게 했던 충고가 거짓이고, 지금 보여 주는 평소의 모습이 진짜일지도.
베르덴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기분 나쁠 정도로 바글바글하군.’
회색 등딱지와 검은색 다리를 가진 거미가 수백 체. 개중엔 베르덴보다 거대한 놈들도 있었다. 입가에 보라색 침이 뚝뚝 흐르는 걸 보아 독을 가진 모양이다.
베르덴의 목적은 리토의 호위.
혹시 모르니 그에게 보호의 목걸이라도 걸어 주고 싶지만, 아마 리토의 마력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기절하면 더 귀찮아진다.
‘접근하기 전에 끝내야겠어.’
<화염기류>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얇은 거미줄이 삽시간에 불타올랐고, 몸집이 작은 거미들은 그 자리에서 새까맣게 불타 죽었다. 거대 거미들은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 틈에 정신을 집중했다.
<화염역병>
방대한 양의 마력이 집결된 스태프의 보석에서 다섯 줄기의 화염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강렬한 열기에 거대 거미들은 베르덴에게 달려들다가 휩쓸려 재가 되었다.
그에 반해 나무들은 멀쩡했다.
“오, 대단하군! 대부분 다 죽었어!”
짝짝짝.
리토가 옆에서 박수를 쳤다.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이걸로 주변에 있던 적들은 거의 다 처리했다. 그러던 순간, 위쪽에서 기척을 느꼈다.
리토의 뒷덜미를 잡은 베르덴이 자리를 벗어났다.
치이이이익!
위에서 날아온 보라색 독액이 지면을 녹였다. 고개를 들자 하늘에는 거대한 거미줄이 깔려 있었고, 그 중심엔 말 그대로 집채만 한 초거대 거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덟 개의 검은 눈동자가 베르덴과 리토를 포착했다. 새끼들이 많이 죽어서 그런지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저게 거미숲의 주인인 ‘아라네이드’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군. 애셔, 조심하게. 모험가 길드에서 책정한 위험도는 최소 백금 등급이라고 하니까.”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조용히 계시죠.”
리토의 입을 닫게 한 베르덴이 아라네이드를 바라봤다.
아까 전 독액을 날린 걸 보면 원거리 사냥이 특기인가? 땅을 녹일 정도로 독성이 강하니 닿는 건 물론이고 그 연기조차 마시면 안 될 터.
물론 파훼법은 간단하다.
‘독은 불하고 상극이니.’
<인페르노>
초고온의 화염 벽이 아라네이드를 덥쳤다. 독액을 쏘아 보냈으나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놈은 거체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다른 거미줄에 옮겨 붙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미 예상 범위 내였다.
암석의 창이 나무를 분쇄했다.
범상치 않은 충격에 거미숲의 주인이자 사냥꾼이었던 아라네이드가 되레 쫓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베르덴을 향해 육박했다.
콰지직!
흙으로 만들어 낸 거대한 칼날이 아라네이드의 턱 아래에 꽂혔다. 입 주변에 있던 독샘이 터지며 독액이 줄줄 샜다. 본인의 독에 대한 면역이 없는 모양인지 아라네이드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마 발성기관이 있었다면 비명을 질러 댔겠지.
<어스 자벨린> 그리고 <아웃버스트>
마법서로 강화된 대지의 창. 그 후면에 압축되어 있던 바람을 일순간에 폭발시켰다.
허공을 가르며 쇄도하는 그 속도는 기존의 약 두 배 이상이다. 관통력 또한 마찬가지.
퍼엉!
아라네이드의 반응을 넘어서는 속도에 놈의 거대한 배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놈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지만 거기까지였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에 이내 다리가 말리며 숨이 끊어졌다.
리토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거미숲의 주인이 이렇게 죽다니. 페일이 그렇게 말할 만하군. 아주 좋은 구경이었어.”
“이제 가시죠.”
“잠깐, 잠깐. 아라네이드의 사체를 이렇게 두고 갈 수는 없지. 독낭이 터진 건 아쉽지만 저 독니에서 뽑아낸 독으로 그럴듯한 해독제를 만들 수 있거든. 잠시만 기다려.”
리토가 아라네이드의 독을 채취했다.
“음, 품질이 아주 좋군. 그럼 계속 이동하지.”
* * *
아라네이드가 토벌되고 난 후, 베르덴과 리토를 습격하는 거미들은 없었다.
마력감지를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청객이 다가오는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안전하게 거미숲을 통과하자, 거미줄이 사라진 깨끗한 숲이 나타났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이제…… 아, 그래! 저쪽으로 가면 목적지야.”
이제 안전한 장소인지 리토는 과감하게 발을 디뎠다.
‘나이에 비해 체력이 강하군.’
그를 뒤따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공터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무너지고 부서진 돌기둥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적?”
“오래된 유적이지. 워낙 외진 곳에 있어서 지금까지 나 외엔 어느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어. 그리고 저기 유적 중심을 잘 보라고.”
리토가 가리킨 곳에 시선을 향했다.
풀에 둘러싸여 있는 한 꽃이 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젠플라워(Rozenflower). 우리가 흔히 쓰는 마력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정순하고 농밀한 마력을 품고 있지. 저걸로 대량의 마력수를 만들어 쓰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제작할 수 있어.”
그야말로 연금술사를 위한 꽃이다.
보통 성장하기 전에 뜯어 먹히거나 다른 식물에게 양분을 빼앗겨 죽기에 자생하기가 극도로 어려운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오래된 유적은 로젠플라워에게 있어서 요람이나 다름없었다.
“저 새를 잘 봐.”
새 한 마리가 지면에 내려앉았다.
로젠플라워의 마력에 이끌린 모양. 새가 종종걸음으로 유적에 다가간 순간.
쩌억!
돌조각이 움직이더니 새를 강타했다. 어찌나 충격이 강했는지 피와 깃털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광경에 베르덴이 눈을 부릅떴다.
“저거…… 설마 골렘입니까?”
“그것도 천연 골렘이지.”
골렘(Golem).
고농도의 마력이 담긴 물체를 핵으로 삼아 태어나는 아인종. 주로 돌이나 금속 같은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떤 생식 작용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핵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고대에는 골렘을 만들어 경비용으로 쓰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실전된 기술이었는데, 최근 아티슨 마탑이 일부 복원에 성공해 작은 형태의 골렘을 만드는 걸 성공했다고 마탑에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나저나 저게 천연 골렘이라는 말은…….’
“설마 저 로젠플라워가 핵입니까?”
“정답이야.”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골렘을 죽일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도 정답이지. 하지만 골렘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어. 바로 핵을 본체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거지!”
그러나 어느 정도 떨어뜨려야 하는지는 모른다.
인간이 인간마다 다르듯, 골렘도 골렘마다 성질이 다르니까.
“만약 끝까지 쫓아온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래서 자네를 데려왔지. 골렘을 처리할 방법의 가짓수는 많아. 예를 들어 자네가 저 핵을 들고 비행을 써서 멀리 날아가면 되는 일이지. 뭐,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그렇게 해도 죽지 않으면…… 별수 없이 로젠플라워를 부술 수밖에.”
흐음, 베르덴은 생각했다.
핵을 부수지 않으면 골렘은 아무리 파괴해도 끊임없이 재생한다. 아무리 베르덴이라고 해도 직접적으로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법은 있지.’
핵을 들고 도주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리고 이 방법은 일반적인 마법사에겐 무리다. 4위계 중에선 오로지 베르덴만이 가능한 방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계획대로 하시죠.”
“계획?”
* * *
리토가 로젠플라워를 채집하는 동안, 베르덴은 골렘의 시선을 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베르덴은 낮게 비행하며 골렘의 일격을 피해 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렸다간 골렘의 경계가 분산되어 핵에 가까이 있는 리토를 노릴 터.
후욱! 골렘의 팔이 지나가며 거센 바람이 불었다.
마력방벽이나 염동력으로 막아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질량. 한 번이라도 직격하는 순간 목숨이 위험하다. 그러나 마치 미래를 예측하는 듯한 베르덴의 움직임에 골렘의 팔은 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거암강타巨巖强打>
콰아앙! 거대한 암석이 측면에서 골렘의 몸체를 부쉈다.
사방으로 흩어진 유적의 파편. 하나, 핵에 있는 마력에 의해 다시금 모여들며 원래의 형상을 되찾았다. 골렘에겐 체력이란 게 없으니 그저 시간 벌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골렘을 부수어 이목을 끌고 있던 중, 리토가 소리쳤다.
“다 됐다!”
로젠플라워를 깔끔히 뽑아내는 데 성공한 리토가 미리 얘기했던 대로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핵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 골렘이 등을 돌렸다.
뒤에서 날아온 마법에 두 다리가 박살 났다. 여러 개의 벽이 솟아올라 와 골렘의 앞길을 막았다. 얼마 안 가, 다리가 수복된 골렘이 벽을 때려 부수며 리토의 뒤를 쫓았다.
콱! 베르덴이 스태프를 땅에 꽂았다.
그러자 일대가 갈라졌다. 거대한 진동에 무게중심을 가누지 못한 골렘. 휘청거리다가 다리 한쪽이 작은 틈새에 빠져 버렸다.
지반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베르덴이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넘쳐흐른 마력이 눈동자에서 피어올랐다.
쿠구구구구……!
땅이 움직인다. 이내 골렘 발밑의 지면이 세로로 갈라졌고 서서히 그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 이곳에 떨어지면 골렘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니까.
<지형조작>
콰드득! 순식간에 틈새가 벌어졌다. 결국 지지대를 잃은 골렘이 중심을 잃고 허공에 떠올랐다. 가장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흙이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어둠 속으로 추락하여 사라지는 골렘. 몇 초 뒤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차례 진동이 울렸다. 베르덴은 이번엔 역으로 지면을 움직여 틈새를 억지로 닫아 냈다.
“후우…….”
땀방울이 턱끝에 맺히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베르덴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마력을 한 번에 소모한 터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감이 몰려왔다. 일전에 통곡의 기사가 있던 갱도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때, 멀리서 베르덴의 마법을 지켜보던 리토가 다가왔다.
그러곤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아주 미친놈이었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