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63화 (63/366)

63화 마핵 (2)

하얗게 센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꼬장꼬장하게 일그러져 있는 눈.

낡고 허름한 갈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베르덴의 얼굴을 이리저리 쳐다봤다.

“자네가 그 애셔라는 놈인가?”

“그렇습니다.”

“잘생겼네. 내 젊을 적을 보는 것 같아. 첫인상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어루만졌다.

“이미 들었겠지만 내 이름은 리토 바르슬란. 사회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천재 연금술사지. 안으로 들어와라.”

말투가 경박한 듯하면서 진중하고, 몸짓은 가벼우면서도 위엄이 있다.

이렇게 모순된 태도를 동시에 보여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라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괴팍하긴 하군.’

베르덴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리토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최고급 증류기부터 시작해 막자사발, 가마솥, 마력수를 비롯한 각종 연금술 전용의 기구가 사방에 산적해 있었다.

전혀 정리가 안 된 게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어지른 걸 본 듯한 기분이었다.

“보기 좀 더럽긴 해도 내 식대로 정리한 거니까 건들지는 마라. 뭐, 자네도 명색이 마법사라면 이해하겠지.”

와르르르르.

리토가 책상 위에 있던 잡동사니를 싹 쓸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곤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나에 대해서 페일에게 들었나?”

“간략하게 들었습니다. 공국 제일의 연금술사라고.”

“끌끌끌, 그렇지. 그리고 페일은 괴팍한 노인이라고도 했을 거고. 그런데 그걸 알고서도 다른 연금술사 말고 날 찾아왔으니 뭔가 특별한 걸 의뢰하고 싶다는 말이겠지? 자, 어디 보여 주게. 그 작은 공간가방에서 꺼내 봐.”

베르덴이 허리춤에 매단 공간가방에서 페일에게서 구입한 재료들을 꺼냈다.

최상급 마석, 요르단의 손톱, 루트밀의 손, 마력꽃의 뿌리와 꽃잎 등 재료 전체를 슥 둘러본 리토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이거 참 오랜만에 보는 구성품이군. 그렇다는 건 그것도 구해 온 건가?”

“여기 있습니다.”

만드레이크 추출액.

그걸 책상 위에 올려 두자 리토가 잽싸게 낚아챘다. 뚜껑을 열고 길게 냄새를 맡았다.

“오, 확실한 진품이야. 이건 나도 손에 넣기 어려운 건데, 대체 이걸 어디서 구했지? 어디 공작 자제나 왕족이라도 되나?”

“말해야 합니까?”

“아니, 필요 없어. 중요한 건 만드레이크 추출액이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지. 마핵이라! 늘그막에 이걸 다시 만들게 되다니, 역시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야.”

리토가 실실 웃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진심으로 즐거운 듯 보였다.

‘흥미가 있다니 다행이군.’

그러니 제작비 대신 터무니 없는 요구 조건을 걸진 않겠지. 만에 하나 베르덴이 거절하기라도 하면 마핵을 제조할 기회가 사라질 테니.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응? 하나 더?”

이번엔 샐러맨더의 심장을 꺼내 놨다.

심장이 뽑힌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미약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샐러맨더까지? 이거 참,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군. 그래, 그걸로 뭘 만들고 싶은데?”

“포션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 심장의 주인은 글러트니.

거한을 죽이고 흔적을 지워 추적을 끊어 냈지만 무턱대고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다. 이걸로 무기를 만들었다가 눈에 띈다면 들킬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먹어서 없앤다.’

그렇게 하면 깔끔하게 끝난다.

누가 오든 이미 배 속에서 소화된 걸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포션이라. 이걸로 신성력에 훨씬 뒤떨어지는 회복 포션 따위를 만들긴 아까운데…… 자양 강장제 쪽이 좋다고 보는데?”

“그럼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다른 건 또 없지? 호, 마핵하고 샐러맨더의 심장으로 만든 활력제라.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하겠군. 하지만 그 전에!”

리토가 베르덴을 가리켰다.

“제작비는 선불이야.”

“얼맙니까?”

“돈으로 받을 생각 없어. 내가 이래 검소하게 살아도 모아 둔 재산이 엄청 많거든. 뭐, 페일에게 이미 들었겠지만.”

“그럼 뭘로 드리면 되겠습니까?”

글쎄, 뭐가 필요할까?

리토가 음흉하게 수염을 어루만졌다.

“애셔, 4위계 마법사지만 실력은 그 이상이라고 페일이 입 아프게 얘기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딱히 겸손을 떨 필요는 없었다.

그야 사실이니까. 블랙 아워의 4위계 마법사 다수를 상대로 손쉽게 승리하기도 했으니.

당당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리토가 히죽 웃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자만? 또는 오만? 아니면 교만인가?”

“셋 다 아닙니다.”

“그렇군. 흠흠, 자네가 어떤 마법사인지 대강 알겠군그래. 자신의 실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라, 요즘 것들하고는 달리 꽤 싹수가 있군.”

후루룩.

리토가 근처에 있던 정체 모를 차로 목을 축였다. 그러곤 베르덴을 보며 말했다.

“내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바로 동행이지.”

동행?

“저기 뒤쪽에 거미숲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 너머에 내가 겨우 찾아낸 희귀 재료가 있는데, 나 혼자서는 도저히 가져올 수 없어서 말이야. 거미숲도 자주 오가기엔 위험하기도 하고. 안 그래도 페일에게 믿을 만한 놈을 구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자네가 온 거지.”

“그 재료를 구해 돌아올 때까지 호위하면 되는 겁니까?”

“그리고 오가는 길에 말동무도 포함해서.”

그게 전부라면 전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최소 수억 엘크에 버금가는 제작비를 아끼는 셈이니까. 더군다나 외부의 위협을 배제하는 것이니, 베르덴의 특기인 마법을 적극 활용하는 일이라는 거다.

이 좋은 조건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동행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할까? 날이 저물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리토가 주섬주섬 장비를 챙겼다.

그의 허리춤에는 가지각색의 포션이 매달려 있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호신용 포션이었다. 베르덴보다 큰 공간가방을 등에 멘 리토가 활짝 웃었다.

“자, 후딱 갔다가 후딱 오자고.”

* * *

거미숲.

리토가 말한 그 이름답게 숲 전반에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거미줄에 맺힌 이슬이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보는 것과 달리 가끔 나들이하기 좋은 숲이지. 큼지막한 거미가 득실거리는 건 나도 좀 그렇지만. 자네는 곤충 좋아하나?

“거미는 곤충이 아닙니다.”

거미는 절지동물이다.

큰 분류로 따지면 벌레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곤충은 아니다.

리토가 미간을 찌푸렸다.

“쩝, 내가 종종 써먹는 농담인데 내가 당해 버렸군. 세상엔 거미가 곤충인지 벌레인지 모르는 놈들이 많거든. 알아봤자 어디 쓸데도 없으니까. 그래서 거미를 곤충이라고 하면 그 몰상식함을 비웃어 주는 게 내 취민데…… 자네가 빼앗아 버렸어.”

“그걸 모른다고 몰상식하기까지야…….”

“맞아, 그건 좀 너무했지. 그래서 이 농담을 들은 사람들이 대부분 기분 나빠 하더군.”

리토가 끌끌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대화에 두서랄 게 없을 정도로 주제가 난잡했지만 베르덴은 거기서 다른 걸 느꼈다.

‘자유롭군.’

몸짓과 말투에 여유가 가득하다.

페일의 말마따나 초연하다. 돈이고 뭐고 오로지 자신이 즐거운 것에만 흥미를 갖고 움직이는 인간. 마탑에서도, 공국에서도 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애셔, 자네가 마핵을 만들려는 이유는 뭐지? 다른 마법사들처럼 마법적인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선가?”

“……대답해야 합니까?”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뭐, 그렇게 되면 말동무를 해 주겠다는 자네와 나의 약속을 깨게 되는 것이고, 나도 마핵을 만들어 줄 이유가 사라지는 거지. 제작 도중에 콱 이상한 걸 넣을 수도 있는 거고. 왜냐? 자네가 약속을 안 지켰으니까.”

“…….”

리토의 논리에 베르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제 성장을 위해서죠.”

“왜? 위대한 마법사가 되는 게 꿈이라서?”

물론 그것도 있다.

한 명의 마법사로서 세상에 인정받는 건 어릴 적부터 이어 온 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목표를 위한 발판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순수한 마법전으로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짓밟는 것 그리고 피로 세워진 마탑의 위상을 끌어내리는 것.

그를 위해선 베르덴은 강해져야 한다.

물론 그 증오와 복수심이 가득한 속마음을 리토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베르덴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

리토가 베르덴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수염을 긁적이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하나 더 묻지. 위대한 마법사가 되면 뭘 할 생각이지? 꿈을 이룬 다음엔 어떤 꿈을 꿀지 생각한 적이 있었나?”

“그건…….”

만약 복수를 이루는 날이 온다면, 그리고 성공한다면.

‘……나는 뭘 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맞겠지.

너무도 높은 목표이기에 그저 하늘을 향한 계단을 오르는 것에 전념했다. 하늘 너머의 하늘까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베르덴이 침묵했다.

그 정적에 리토가 쯧쯧 혀를 찼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각자의 이상을 꿈꾸지. 대부분은 좌절하고 현실에 타협하고,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꿈을 이루고 그리고 그 후엔 뭘 하는지 아나?”

“…….”

“전부 달라. 누구는 여자들을 꼬시며 육욕적인 삶을 살고 있고, 누구는 제자를 기르며 후학을 양성하지. 강대한 힘을 휘두르며 탐욕적으로 살기도 하고, 타인을 도우며 이타적으로 살기도 해. 가족을 만들고 자식을 키우는 일도 흔하지. 여기서 공통적인 게 뭔지 알아? 전부 다 새로운 꿈을 가졌다는 거야.”

하지만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한다면.

“살아갈 의욕을 잃게 되지. 죽을 때까지 그저 살아가거나, 무욕적으로 변해 감정을 잃고, 비관하며 자살하기도 해. 인간은 언제나 꿈이 있어야 하는 존재거든. 애셔, 갑자기 내가 왜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나?”

“모르겠습니다.”

“꿈을 말할 때의 자네의 눈, 아주 활활 불타오르더군.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분명 꿈을 이루기 위해 아주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화톳불의 빛이 너무 밝으면 주변에 있는 걸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것까지 전부 태우고 남김 없이 사그라지지……. 크흐흠, 이거 말을 많이 했더니만 목이 타는군.”

리토가 시원한 물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묵묵부답인 베르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끌끌끌, 아주 꿀 먹은 병아리가 되셨구만. 내가 한 말이 그리도 정곡을 찔렀나?”

“조금 생각하게 되기는 하더군요.”

“좋은 현상이군. 뭐, 급할 필욘 없어. 자네는 젊으니 생각할 시간이 많아. 조금 더 느긋하게 해 보라고. 그래야 나처럼 이렇게 자유로운 노후를 즐길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리토는 농담스럽게 말을 끝냈다.

베르덴은 생각했다.

방금 전 그가 한 말…… 그건 확실히 베르덴의 의표를 찌르는 말이었다. 처음 만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어쩌면 그것이 리토 바르슬란이라는 연금술사의 본질이 아닐까 싶었다.

그때, 리토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 근데 내가 그 말을 했었나?”

“……?”

“거미숲에는 주인이 있어. 아주 집채만 한 초거대 거미가 이 숲의 주인이지. 그놈 자식들도 어지간한 사람만 하고. 여러모로 최대한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야.”

“그런데 갑자기 왜 그 말을……?”

“내가 실수했다. 얘기하다가 놈의 영역권에 들어와 버렸어.”

뭐?

사사사삭. 베르덴의 감각에 무수한 소리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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