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55화 (55/366)
  • 55화 소울 트리 (4)

    사방은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팔과 다리에 묻은 피가 질척거렸다.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레이라는 그때와 같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역시 싸늘하게 식은 부모님과 남동생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어둠이 꿈틀거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날카롭고 섬뜩한 손. 그것이 레이라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저항하려 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과거와 같이 두려움에 떠는 게 전부였다.

    치이이익-!

    이내 타들어 가는 격통이 얼굴에 느껴졌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레이라의 귓가에 인간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주 속에서 한껏 발버둥 쳐 보거라.’

    악마.

    평범했던 레이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박살 낸 존재였다.

    * * *

    파직.

    세상에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곧바로 의식을 되찾은 레이라가 반사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에 타고 있는 소울 트리를 발견했다.

    놈이 발산하던 불길한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늦었나.’

    방금 본 기억은 소울 트리가 보여 준 과거의 악몽이겠지.

    고작 환상 따위에 당했다는 생각에 레이라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팔짱을 낀 채 소울 트리를 바라보고 있는 베르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또한 악몽을 봤을 텐데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혹시 정신을 보호하는 매직 아이템이나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악몽에서 탈출한 거죠, 그렇게나 빨리?”

    소울 트리의 악몽은 대상에게 절망적인 미래나 과거를 보여 줌으로써 정신을 뒤흔든다.

    거기에 집어삼켜지면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되며, 그 상태로 양분이 되어 서서히 생명력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물론 베르덴에겐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두려움을 품을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당장 마탑주를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의 자신은 가능하다. 이건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확신이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결코 바라지 않는 절망을 보여 주는 악몽 따위는 베르덴의 정신을 조금도 흔들지 못한 것이다.

    “대답이 됐습니까?”

    “……예, 조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가 소울 트리를 올려다봤다.

    활활 타오르는 거목의 일부가 쩍 갈라지더니 하얀 무언가가 하늘 위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아, 뭔가 떠오른 듯한 레이라가 검을 당기며 자세를 잡았다.

    혈섬(血閃).

    거대한 붉은 검기가 거목을 향해 날아갔다. 핵이 부서진 소울 트리의 껍질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에,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양단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틈새에서 방금 전 보았던 하얀 것이 무더기로 솟구쳐 올랐다.

    “저건…….”

    “기록에 적혀 있길, 소울 트리는 죽으면 양분 삼은 생명의 영혼을 뱉는다더군요. 그렇게 빠져나간 영혼들은 자유를 되찾고 성불한다고도.”

    물론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울 트리에서 벗어난 무수한 그것이 하늘로 사라지며 새하얀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걸 보면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투두둑! 투둑!

    약해진 거목의 뿌리가 본체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끊어지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고착화된 흙기둥에 약한 충격을 보내자 순식간에 무너졌다. 기우뚱 기울어진 거목은 결국 바닥으로 추락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나라를 절망으로 물들이는 나무, 소울 트리(Soul Tree).

    토벌 성공.

    * * *

    우두머리를 잃은 트런트들은 본능에 따라 악마의 숲 깊숙한 곳으로 되돌아갔다.

    수백 마리를 죽였음에도 아직 숫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언제고 토벌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휴식을 취할 차례였다.

    지친 모험가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숲을 빠져나갔다.

    그 옆엔 바르델도 있었다. 무기도 없고 지친 상태라곤 하지만 백금 등급 모험가답게 도중에 트런트에게 죽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레이라와 베르덴.

    그 둘은 다른 이들과 조금 떨어진 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시련은 이걸로 끝인 겁니까?”

    “아마 그렇겠죠. 시련이 두 번 연속으로 일어났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시련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을 많이 소모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상처 하나 입지도 않았고.

    하지만 만약 베르덴과 같은 마법사가 없었다면.

    레이라 혼자서는 소울 트리를 토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하에 숨어 있는 놈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소울 트리는 분명 도시 하나는 쉽게 절멸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긴 했다.

    ‘하긴, 원래 나를 위해 준비된 시련이 아니라고 했으니.’

    상대적인 거겠지.

    그때, 레이라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그쪽 이름을 모르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드러웠다.

    후보로서 같이 시련을 극복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레이라는 베르덴을 경쟁자로서 보고 있었으니.

    ‘아마 시련이 끝났기 때문이겠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사람처럼 목소리가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베르덴이 레이라의 투구를 바라봤다.

    “마법사 애셔입니다.”

    “애셔…… 들어 본 적이 없는 걸 보니 최근에 방주의 후보가 되셨나 보네요.”

    리스너의 제안을 받지 않았으니 후보가 아니다. 물론 굳이 그 사실을 레이라에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베르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후보들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저와 당신을 포함해 이곳 리비안트 공국에서 활동하는 후보는 4명이에요. 규칙상 누군지 발설할 수는 없지만요. 애초에 모르기도 하고요.”

    ‘이 나라에 후보가 두 명이나 더 있는 건가.’

    이번 소울 트리 토벌에는 베르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터라, 레이라가 가진 실력을 전부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움직임이나 검기를 보면 도살자 갈리아크보다도 훨씬 강한 건 분명했다.

    과연 다른 후보들도 이 정도 실력을 갖고 있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전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레이라의 태도에 베르덴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일행들은 겨우 숲을 빠져나갔다.

    저 멀리 하늘에서, 어둠이 점차 걷히며 동이 트기 시작했다. 꼬박 새벽을 내리 전투를 벌인 것이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모험가들이 숨을 내쉬었다. 토벌대를 기다리고 있는 도시의 경비병, 기사와 모험가들이 성벽에서 그들을 보며 환호했다.

    “바르델 씨다! 투사가 살아 있어!”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부상자가 있는 것 같으니 빨리!”

    소울 트리의 크기는 도시에서도 보일 정도였기에,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소울 트리가 마지막에 내지른 망자의 절규에 전부 악몽에 빠지긴 했지만, 다행히 정신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의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불에 탄 거목에서 빠져나온 하얀 영혼들이 하늘을 훤히 밝히는 것을. 그 광경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 참…… 우린 별로 한 게 없는데.”

    “그냥 있어. 가만히 있기만 해도 반은 간다니깐.”

    소울 트리는커녕 트런트만 잡아 댄 모험가들은 낯간지러웠지만, 그냥 환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토벌대에 참가하긴 한 거니까.

    가서 받을 보수만 생각하기로 하며 도시를 향해 다가갔다.

    * * *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리스너가 시계를 봤다.

    본래 방주에서 예상하고 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때에 시련이 끝나 버렸다. 그것도 도중에 어떠한 희생자도 나오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이거…… 아무래도 예상이 크게 빗나간 것 같군요.”

    리스너의 말투는 여전히 여유로웠으나, 사실 내심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소울 트리는 정신계를 다루는 이형종.

    그러나 강철 이상의 경도를 지닌 나무껍질과 수많은 트런트 그리고 양분 삼은 생명체를 조종하는 능력이 있기에 특히나 까다로운 상대다.

    설령 그것들을 뚫는다 할지라도, 소울 트리의 악몽은 어지간해서 벗어날 수 없다.

    현 방주의 후보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레이라조차 자칫하면 정신이 붕괴될 수도 있었으니. 아무리 강인한 육체와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정신 그 자체를 단련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그러했다.

    만약 방주가 없었더라면 소울 트리는 로리엔을 집어삼키고 완전한 성장을 이룩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 도시 4개 정도는 전멸했겠지. 희생자는 최대 43만. 그 절반이라 할지라도 공국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의 피해다.

    괜히 모험가 길드에서 위험도를 특수 개체에 버금간다고 기록한 게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봤을 때, 아무리 완전한 성장을 이루지 않은 개체라곤 하나, 악마의 숲에 있던 소울 트리는 이렇게나 쉽게 토벌당할 정도로 약한 위협이 아니었다.

    물론 수많은 인간이 목숨을 구원받은 건 박수 쳐야 마땅할 일이다.

    다만, 여태껏 시련이 이 정도로 간단히 끝난 적은 없었기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이것이 고작 한 마법사에게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에 더더욱.

    ‘4위계 마법사, 애셔.’

    그가 다루는, 여태까지 확인된 원소만 총 6개.

    하물며 부여 마법까지 다룰 줄 알며 근접전 또한 여타 마법사와 달리 뛰어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모든 장점의 기반이 되는 방대한 마력까지.

    리스너는 확신했다.

    자신이 아는 세계의 인재들, 저 나이대의 마법사 중에 감히 애셔과 견줄 실력자는 없다고.

    과거를 전혀 알 수 없는, 스승조차 불분명한, 마치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천재 마법사라.

    “애셔……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리스너의 물음은 조용히 허공에 흩어졌다.

    * * *

    소울 트리가 토벌된 후, 로리엔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까스로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혹시 모를 위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기에, 체력을 회복한 투사 바르델을 필두로 여러 모험가와 로리엔의 기사단이 악마의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험가 길드에서 직접 소울 트리의 잔해를 수습하는 데 나섰다.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산산이 박살 나긴 했지만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이기에 쓸 만한 소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몫은 소울 트리를 직접 상대한 베르덴과 레이라의 것이었다.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적어도 며칠은 지나야 확인이 가능할 터.

    소울 트리의 토벌 보수를 받아야 하는 베르덴은 어쩔 수 없이 로리엔에 남아야 했다. 그는 소모한 마력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하르칸이 남긴 마법을 연구하거나, 리스너가 준 만드레이크 추출액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베르덴을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음식값은 안 받겠습니다! 도시를 구해 준 은인에게 식사 정도는 대접해 드려야죠!”

    “…….”

    “갓 구운 빵입니다! 한번 드셔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다음에 오실 때 또 챙겨 드리겠습니다!”

    “…….”

    “방금 만든 레몬에이드예요! 저기 엄마가 갖다 주래요!”

    “…….”

    그저 식사거리를 포장하러 나왔을 뿐인데, 어느새 양손에 음식이 가득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물어보니, 로리엔의 신문에 도시를 구한 사람들이라며 레이라와 애셔의 이름이 올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베르덴의 외모가 눈에 띄는 터라 금방 특정된 것이라고.

    딱히 불쾌해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베르덴이 강대한 마법사임을 증명한다면 그 이름이 세계 전역에 퍼질 테니까. 이 정도야 거쳐 가는 길이었다.

    ‘그보다 이 많은 음식을 어떻게 처리하지.’

    먹어 치우는 건 불가능하다.

    베르덴은 소식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식가도 아니었으니. 아마 이걸 혼자 먹는다면 음식 절반은 식어서 맛이 없어질 게 뻔했다.

    ‘그럼 나눠 주면 되겠군.’

    베르덴은 고민하다 이내 숙소로 가던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는 교회. 언제나 기부를 환영하는 곳이니 처치 곤란한 음식 기부도 받아 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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