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소울 트리 (3)
“하아압!”
서걱.
트런트의 몸체를 반절 베어 내자 검붉은 핵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이어 마법사가 날린 마법의 화살이 핵을 깨부쉈다. 한바탕 트런트를 사냥한 모험가들이 땀을 잔뜩 흘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허억, 허억. 다 죽인 건가?”
“이 근방은 그런 것 같아.”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트런트의 무리는 상당히 위험했다.
몸통을 박살 내거나 하지 않는 이상 잘 죽지도 않기에, 힘을 아끼려면 핵만을 노려야 했다. 그 때문에 모험가들의 집중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다시금 주변을 둘러봤다.
쌓이고 쌓인 트런트의 사체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아무래도 더 올 기미는 없어 보였다. 겨우 한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려던 중, 엄청난 진동이 지면을 뒤흔들었다.
“가, 갑자기 뭐야?!”
“요즘 트런트는 지진도 일으키나? 시발, 숲이 뭐 이따위야!”
다시 일어서서 힘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트런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사방이 어둠에 휩싸였다. 반사적으로 모험가들이 고개를 위로 올리자, 모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가린 거목, 가지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시체.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불길한 나무의 그림자가 숲 전체를 덮고 있었으니까.
“저게 소울 트리……?”
“야야야야, 저렇게 크단 말은 없었잖아! 시발, 저걸 어떻게 토벌해?! 저기다 검 휘둘러 봤자 이쑤시개밖에 더 되겠냐고!”
이들 중에 사선을 넘지 않은 모험가는 없었으나, 소울 트리의 거대함은 그 자체로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전력을 다해 봤자 뿌리 몇 개나 벨 수 있을까.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헛웃음만 짓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그때, 난데없이 노랗고 불그스름한 기류가 휘몰아쳤다.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화염의 폭풍. 그 열기는 한참이나 멀리 있는 모험가들의 피부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주변 숲을 불사지른 그것이 이내 소울 트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오, 맙소사…….”
모험가들은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 * *
소울 트리는 오래전부터 지하에 몸을 숨기며 먹잇감들을 사냥했다.
모험가 길드가 여러 차례 수색대를 보냈음에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아무리 샅샅이 뒤진들 땅 아래까지 살피는 건 무리였으니까.
그렇게 소울 트리는 살아남았고, 지하에서 뿌리를 뻗어 숲 일대를 점점 장악하고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갔다.
악마의 숲이라고 명명된 뒤엔, 인간을 먹이로 삼는 건 거의 불가능해지면서 여러 아인종이나 짐승을 양분 삼아 천천히 그리고 안전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현재.
수십 년간 여러 차례 성장을 거친 소울 트리는 마지막 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그를 넘기 위해선 수천을 아득히 넘는 생명체가 필요했다.
[부족하다.]
그래서 소울 트리는 악마의 숲 바깥에 분신체를 보냈다. 보다 많은 양분을 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트런트와 백색 눈동자를 이끌고 영역을 확장하며, 생명체가 많이 살고 있는 장소로 나아가고 또 나아간 끝에 도시 로리엔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제 완전한 성장이 머지않았다.
[……?]
그렇기에 소울 트리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하에 있던 본체가 왜 바깥으로 끌려 나오게 됐는지. 그것도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던 지면과 함께 말이다.
* * *
지형조작으로 광활한 지하 공동을 통째로 바깥으로 뽑아 버리고, 마지막으로 소울 트리가 심겨 있는 거대한 흙기둥을 단단히 고착시켰다.
이걸로 방패는 빼앗았다.
‘무게가 무게다 보니 마력이 좀 들었군.’
전신을 휩싸는 탈력감.
베르덴이 숨을 내쉬며 피로를 털어 냈다. 물론 그 시간을 소울 트리가 기다려 주지는 않았다.
끼기기기긱.
소울 트리의 가지가 풀어지며 백색 눈동자들이 움직였다.
포레스트 와이번 그리고 트윈 헤드 오우거와 같은 마수와 상위 아인종. 거기다 개중에는 베일론 자작을 구하러 갔을 때 봤던 백금 등급 모험가인 궁수와 자작의 수행원들까지 있었다.
분신체에서 다루던 백색 눈동자들을 본체가 회수한 모양.
피융! 화살이 베르덴이 있던 허공을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다섯 마리의 포레스트 와이번이 날아올라 베르덴에게 돌진했다. 거기다 소울 트리가 내뻗은 수십 개의 가지까지.
수적으로 완전한 열세다.
그러나 베르덴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확실히 이제까지 상대해 왔던 것과 차원이 다른 크기지만 그것뿐이니. 이미 백색 눈동자를 포함한 소울 트리의 공략의 계산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베르덴의 눈에 푸른빛이 명멸했다.
<폭풍>
휘몰아치는 대기.
가지에 매달린 시체들이 요동치며 날아오던 포레스트 와이번이 그대로 휩쓸렸다. 물론 소울 트리 자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거라면 어떨까.’
<인페르노>
붉은색을 넘어선, 초고온의 노란 화염의 벽이 허공에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폭풍에 휘말렸고, 꺼지지 않는 불은 산소를 더욱 불태워 역으로 바람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4위계 합성 마법, 화염폭풍.
화아아아아악!
어두운 밤하늘이 훤히 드러나며 그 여파에 주변 숲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울 트리가 방패로 삼을 트런트를 불러들였으나 기둥을 오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화염의 기류가 호흡기로 파고들어 백색 눈동자들은 그대로 전신이 불타 소멸했다.
위력이 위력이니만큼 적지 않은 마력이 소모되긴 했으나, 한순간에 소울 트리가 갖고 있던 수적 우위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끄떡없군.’
그에 반해 소울 트리는 거의 멀쩡했다.
속성 자체에 내성이 있는지 불에 그슬리기만 할 뿐, 눈에 띄는 피해는 없어 보였다.
그때, 소울 트리의 몸체가 벌어졌다.
마치 인간의 입처럼.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원한이 가득 담긴 망자의 절규가 화염폭풍을 흩어 버렸다.
순간 느낀 통증에 베르덴이 귀를 잡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어 보니 베르덴 자신의 목소리였다.
[왜 굳이 증명하려고 하는 거야? 다른 마법사들을 죽이고 얻은 힘 따위를.]
[포기해. 포기하고 편하게 살아.]
[그냥 도망쳐. 네가 저걸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환청인가?”
마력으로 청각을 닫아도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들려왔다.
분명 소울 트리가 내뱉은 비명 소리와 관련이 있겠지. 거슬리긴 했지만 이런 것 따위에 흔들릴 베르덴이 아니었다.
<거암강타>
────콰아아아앙!
막대한 질량과 중력으로 가속화된 속도.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에 막아 낸 뿌리가 부러졌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통하는 건가. 터무니없는 내구성이지만 상황은 확실히 베르덴이 우세했다.
왜냐하면 소울 트리는 정신 계열을 다루는 이형종이었으니까.
일반인 만 명은 망자의 절규로 단번에 정신을 파괴할 수 있었지만, 정신력이 강한 강자 한 명을 상대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 줄 트런트와 백색 눈동자마저 완전히 무력화된 상황이니.
결국 당장 소울 트리가 할 수 있는 건 견고한 본체로 상대가 힘이 빠질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는 것뿐.
그러나 베르덴의 마력은 너무도 깊고 방대했다.
게다가 소울 트리의 적은 베르덴만이 아니었다.
마법 폭격이 일어나고 있는 전투 그 아래, 재빠른 움직임으로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핏빛검, 레이라. 그녀가 피처럼 붉은 기운을 뿜어 대며 하늘로 도약했다. 검 끝에 모인 기운이 실처럼 흐트러지며 내려가 소울 트리에 닿았다.
그토록 단단했던 껍질이 쩍 하고 갈라졌다.
베르덴이 염력으로 흙더미를 띄우자 레이라가 그곳에 안착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경쟁자니까요.”
“경쟁자?”
“이건 제가 극복해야 할 시련입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길 생각은 없으니 단념하시길.”
레이라가 다시금 소울 트리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녀에 비해 둔하기 짝이 없는 뿌리들은 갑옷을 스치지도 못했다. 남아 있던 몇몇 시체가 주변에서 시끄럽게 비명을 질렀음에도 레이라의 움직임은 느려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멋대로군.’
리스너가 분명 시련이라고 해서 홀로 극복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했었는데.
뭐, 그렇게 나온다면 베르덴도 마음대로 할 뿐이다. 보아하니 눈먼 마법에 휩쓸려 죽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 * *
두꺼운 나무껍질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울 트리라고 할지라도, 위험도가 특수 개체에 버금간다고 할지라도 이 개체는 아직 성장을 마치지 않았다. 거기다 앞에 있는 두 인간과는 상성조차 맞지 않았다.
트런트를 불러 방패로 삼을 수도 없고, 양분을 소모해 백색 눈동자를 만들어도 곧바로 죽는다.
여태껏 잘 숨어 있던 본체는 완전히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놈들의 정신을 흔들어도 미동조차 없다.
[위험하다.]
나무껍질을 재생하고 있긴 하나, 이대로 가다간 안쪽에 숨겨 둔 핵마저 파괴될 거라고 소울 트리는 직감했다.
생명이 가진 본능은 생존.
소울 트리는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내기로 했다. 설령 다시금 힘을 쌓는 데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걸린다 할지라도.
수백 개의 가지 끝에서 시체들이 자라난다.
이윽고 그 시체의 눈과 입이 열림과 동시에 소울 트리가 다시 한번 본체를 움직였다.
무자비한 마법과 붉은 검이 방해를 해 왔지만, 소울 트리는 필사적으로 평생 동안 쌓아 온 모든 양분을 소모해 망자의 절규를 토해 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숲 전체에 메아리처럼 비명이 울려 퍼졌다.
베르덴도, 레이라도, 바르델과 다른 모험가들도, 성벽에 서 있던 경비병들과 로리엔에 있던 모든 시민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소울 트리가 만들어 낸, 절망이 가득한 악몽에 빠진 것이다.
이걸로 대부분의 양분을 소모해 소울 트리 본체는 움직일 수 없었지만 시체들은 달랐다.
백색 눈동자를 번뜩인 놈들이 느릿느릿 악몽에 빠진 그들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 * *
어느 순간, 베르덴은 눈을 떴다.
활활 타오르고 엉망이 된 공간이 시야에 비쳤다. 그런 그의 앞엔 보헤미른의 마탑주가 압도적인 위압감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1위계 따위가 한계를 벗어나다니. 확실히 놀랍긴 하지만 결국 거기까지겠지.”
그때, 베르덴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마탑을 희생양 삼아 역천을 이루고, 숱한 전투와 위험을 넘고 넘어 마법사로서 아득히 성장한 자신이 마탑주와 맞닥뜨리고 결국 정면에서 패배한 기억이.
그러자 신체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전신의 마력회로는 산산이 찢겨 나갔으며 심장마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설령 기적처럼 살아난다고 해도 마법사로서의 생명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마탑주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그 사실은 가히 절망 그 자체였다.
“베르덴, 네놈은 한계를 넘어선 한계조차 벌레와 다를 바가 없다. 너 같은 버러지 따위에게 마탑이 입은 손실만──.”
“이건 꿈이군.”
“뭐?”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망이었던 몰골이 어느새 깨끗함을 되찾았다. 그가 당황하고 있는 마탑주의 앞에 다가섰다.
“1위계 따위가…… 정신에 착란이라도 온 건가?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도 나에게 발끝도 미치지 못한 게 믿기지가 않는가 보지?”
“믿을 수가 없지.”
콱!
베르덴이 오른손으로 마탑주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살에 손톱이 파고들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미래의 내가 너한테 진다는 게.”
“끄으윽…… 네, 네놈이 감히이!”
콰아아아아!
손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마탑주의 머리를 그대로 불태웠다. 후련하긴 했지만 어차피 가짜는 가짜. 손을 털어 내며 마탑주의 남은 몸뚱이를 쳐다봤다.
“기다리고 있어라.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아무것도 모른 채 블랙 아워와 서로 전력을 낭비하면서, 만능이란 이명에 얽매여 언제까지고 오만하게 말이다.
물론 현실의 마탑주에게 들릴 일은 없겠지만.
가짜 시체를 일별하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있던 공간이 저 멀리 사라지고 어둠이 다가왔다. 그 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자, 베르덴은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시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깜짝이야.”
콰지직!
스태프가 시체를 박살 냈다. 그 너머에 있는 소울 트리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까 전과 달리 눈에 띄게 뿌리의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다.
‘방금 전 악몽이 마지막 수단이었나.’
레이라를 보니 아직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것인지 생각보다 강력한 정신 계열의 능력인 것 같다. 하긴 악몽에서 느꼈던 그 감정과 기억 그리고 고통은 전부 현실처럼 느껴졌으니.
물론 베르덴에겐 일절 통하지 않았지만.
베르덴이 스태프를 겨냥했다.
거의 힘을 다한 소울 트리는 미약하게 흔들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여전히 두꺼운 나무껍질은 굳건했다. 단순한 마법으로 저걸 뚫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하르칸이 남긴 마법, 유성을 쓸 수는 없다.
근처에 있는 레이라를 비롯한 모험가들이 휩쓸릴 뿐만 아니라, 그 숨길 수 없는 흔적에 블랙 아워가 추적을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니.
‘그러니.’
베르덴이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 방대했던 마력이 일부 바닥을 드러내며 한 줄기 벼락이 날아가 구름에 스며들었다.
쿠르릉.
뇌운(雷雲).
번개를 품은 구름이 낮게 울부짖었다.
베르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그래도 부족해.’
더욱 마력을 끌어모았다.
한계까지 확장된 마력회로에서 통증이 일며, 주체할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이 제어를 벗어나려고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러던 순간 베르덴이 푸른 눈을 번뜩였다.
파지직!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번개가 구름에 스며들었다.
생명체에 한해, 현재 베르덴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강력한 마법이며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
짙은 청색의 구름에서 수천 개의 번개가 요동쳤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스태프를 들어 정확히 소울 트리의 몸체를 겨냥했다. 억지로 닫아 놨던 문을 열어젖히며 마법을 풀어 헤쳤다.
세 개의 낙뢰가 합쳐진 푸른 빛줄기.
<삼뢰적멸三雷寂滅>
번쩍!
소리보다 빠르게 빛이 추락했다.
콰과과과과과!
엄청난 열과 빛이 사방에 퍼졌다.
뇌격보다 방대한 에너지를 담은 번개가 소울 트리의 그 단단한 몸체를 서서히 파괴했다. 까맣게 그을린 나무껍질과 뿌리 그리고 가지와 시체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윽고 직격당한 몸체 중앙이 허물어졌다. 그렇게 생긴 틈새 아래에서 보라색 빛이 흘러나왔다.
‘저 안에 핵이 있나 보군.’
확인할 필요도 없다.
베르덴이 손을 튕기자 한 줄기 불꽃이 점멸하며 구멍 안쪽으로 사라졌다.
<호염>
내부에서 빛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