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51화 (51/366)
  • 51화 악마의 숲 (2)

    “하하, 외형적으로 완벽하게 변장을 했는데 어떻게 저인 줄 아시고 마력감지를 쓰셨는지……. 마법사이신데 굉장히 감이 좋으시군요.”

    리스너가 베르덴의 반대편에 마주 앉았다.

    그 순간에 종업원의 복장이 아닌 다른 옷으로 바뀌었는데, 거기에 카트 밑에서 음식을 꺼내 식탁 위에 차려 놓으니 영락없는 손님이 되어 있었다.

    ‘마법 물품의 일종인가?’

    아니면 아티팩트일지도.

    외형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다니 꽤나 활용성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안 바꾸는 건가?”

    “왜 브리엔테에서 본 얼굴을 제 본모습이라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뭐, 그쪽이 취향이시라면 남자로 바꿔 드릴 수는 있지만-.”

    “…….”

    “농담입니다. 분위기 좀 풀어 보려고 그런 거니 마력은 좀 거두어 주시죠.”

    리스너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크흠, 일단 제 외모 얘기는 나중에 하고 식사부터 하시죠. 여기 주방장이 꽤 솜씨가 있습니다.”

    리스너가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고있던 베르덴은 작게 한숨을 쉬며 식기를 들었다.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후식으로 나온 차와 케이크를 앞에 두고, 리스너가 작은 장치를 식탁 위에 올렸다.

    “……아티슨 마탑의 마법 물품인가?”

    “잘 아시는군요. 이건 아티슨 마탑에서 고가에 판매하고 있는 ‘노이즈(Noise)’라는 아이템입니다. 가격만큼이나 성능 또한 뛰어나죠.”

    보헤미른 마탑이 원소 계열에 특화된 곳이라면, 아티슨 마탑은 각종 마법 물품, 매직 아이템 제작에 전문화된 곳이다.

    노이즈를 작동하자 흘러나온 마력이 주변 공기를 일그러뜨렸다.

    이걸로 베르덴과 리스너의 대화는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리스너가 손에 깍지를 끼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먼저,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군요. 솔직히 말해 애셔 님이 로리엔에 오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방주에 신입을 모집하는 제 관점에서 애셔 님은 적합한…… 아니, 뛰어난 인재시니까요.”

    적합하다.

    그것이 불과 한 달 전에 방주에서 내린, 리스너가 보는 베르덴에 대한 평가였다.

    그러나 브리엔테에서 베르덴과 만난 리스너는 곧바로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위압한 그 방대하고 깊은 마력…… 물론, 그 정도의 마력량을 가진 존재는 세상 곳곳에 널려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강대한 마법사로 이름을 날린 자들이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잿빛 마법사는, 적어도 마력량만큼은 그들과 비견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

    정확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나이에 있을 수 없는 재능인 건 확실하다. 이후의 성장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가 방주에 들어올 생각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터. 이 자리는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포석이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죠. 어떤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방주의 기원? 아니면 방주의 목적? 장황해서 싫으시다면 질문답 형식도 좋습니다. 애셔 님이 여기에 오셨다는 건 방주에 대해 알고 싶은 점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반드시 방주에 대한 질문이어야 하나?”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물론 너무 많은 질문에는 전부 대답할 수 없다는 점,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방주에 대한 정보를 제외하면, 그가 하려던 질문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묻지.”

    베르덴이 차로 목을 축이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악마의 숲, 거기에 대체 뭐가 있지?”

    햇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암흑의 숲.

    그곳에서 느낀 불길함은 간단히 무시하고 지나칠 만한 게 아니었다. 물증이 없기에 그저 기분 탓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회색 나무.

    분명 그와 관련된, 지금의 베르덴을 위협할 만한 무언가가 악마의 숲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로든마이어 백작과 페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의미한 정보는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뭔가 알고 있었더라면 자작이 실종되는 일조차 없었을 테니까. 현재로서 베르덴에게 단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리스너가 유일했다.

    질문을 받은 리스너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이내 작은 감탄을 내뱉으며 더욱 짙게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숲이라…… 어째서 그걸 저에게 물어보시는 거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단순히 감입니까? 애셔 님은 증거주의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렇다고 직감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

    거기다 질문하는 데 어떤 비용이 소모되는 것도 아니고.

    “대답은?”

    “하하, 아까도 말했지만 애셔 님은 감이 굉장히 좋으시군요. 네, 대답해 드리도록 하죠. 어차피 애셔 님과 여기 로리엔에서 만난 건 그 악마의 숲과 깊은 관련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방주의 이념과 목적에 대해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념과 목적?”

    리스너가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었다.

    “저번에 말했다시피 방주의 이념은 ‘인간은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라고 했었죠. 하지만 그 시련이란 건 결코 간단한 게 아닙니다. 작게는 본인의 목숨, 크게는 도시나 한 국가, 더 크게는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죠.”

    “…….”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는다면 필연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되는 거지요. 훗날 인류를 이끌 ‘선장’에 걸맞은 존재가 말입니다.”

    리스너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힘이 실려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베르덴이 느낀 바는 달랐다.

    “……그 말은 악마의 숲에 있는 것도 시련의 한 종류라는 건가?”

    “정답입니다.”

    “만약 시련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듯이,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다.

    베르덴의 물음에 리스너가 찻잔을 내려놨다.

    “죽을 겁니다. 때론 마을이 몰살하고, 도시가 무너지며, 한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겠죠. 어쩌면 세계까지.”

    “그게 방주가 말하는 이념인가?”

    “애셔 님,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인류라는 나약한 ‘종’을 위한 집단이지, 모든 인간의 수호자가 아닙니다. 저희가 하는 일은 후보를 찾아 시련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보다 뛰어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 결코 방패막이가 되어 인간을 평화 속에서 도태시키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원인 모를 한기를 느낄 만큼.

    베르덴이 리스너의 눈을 바라봤다.

    “수많은 인간이 죽는다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방주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련은 저희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위험이죠. 방주는 그러한 위험들을 분석하고 예측해서 어디에서 뭐가 일어날지 특정한 뒤, 그곳으로 방주의 후보들을 이끌 뿐입니다.”

    베르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 말은 방주의 정보망이 세계 전역에 펼쳐져 있다는 뜻과 같았으니까. 그만한 세력을 가지고도 여태껏 세상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에 한층 더 경계심을 높였다.

    ‘어쩌면 블랙 아워보다 위험할지도.’

    당장 베르덴은 지금의 태도를 유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무조건적으로 적대하지 않으면서 일정 이상 거리를 두기로. 정체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저쪽에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까.

    “그래서, 그 시련이 뭐지?”

    “그건 답할 수 없습니다. 방주가 원하는 선장은 갑작스러운 시련조차 극복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후보들에게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미처 싹이 자라기도 전에 짓밟혀서야 본말전도니까요.”

    틈틈이 후식을 먹어 치운 리스너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애셔 님은 주로 의뢰를 통해 보수를 받아 자기 개발에 힘쓰시더군요. 아, 이건 브리엔테에서 애셔 님을 만나기 전에 수집한 정보이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약속한 대로 그 이후로 애셔 님의 뒤를 캐는 일은 전혀 없었으니.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제안이라기보단 일종의 의뢰라고 볼 수 있지요.”

    리스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애셔 님, 이번 시련에 도전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시련은 방주가 정한 후보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요. 저희의 목적은 인류를 이끌 구원자의 육성이지, 방주의 세력을 키우는 것 따위가 결코 아니니까요. 설령 방주의 후보가 아니라고 해도 시련에 도전할 기회는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드리는 제안은 아닙니다.”

    “기존에 있던 후보는?”

    “본래 이번 악마의 숲에 있는 건 ‘그녀’를 위해 준비된 시련. 그러나 사람 한 명이 더 추가되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시련이라고 해서 홀로 극복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본디 인간이란 협력과 상생을 원동력으로 삼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녀?’

    그리고 그다음 말에 베르덴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의뢰를 받을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군.”

    “하하, 글쎄요. 저는 제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먼저 이걸 보시죠.”

    리스너가 작은 가방과 투명한 액체가 담긴 약병을 책상 위에 올렸다.

    “애셔 님에게 드릴 보수는 보다시피 총 두 개. ‘공간가방’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만드레이크 추출액’입니다.”

    공간가방은 공간 확장이 부여된 가방 형태의 마법 물품이다.

    공간 계열은 전격 계열과 마찬가지로 상위 속성에 위치한 마법. 공간의 크기나 무계 한계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최소 억 단위의 가치를 품고 있다.

    딱히 큰 짐이 없는 베르덴은 최하급에 해당하는 것일지라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

    “잠깐. 방금 뭐라 그랬지? 만드레이크라고?”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건 그 만드레이크에서 뽑아낸,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도 100%의 추출액이죠.”

    “……확인해 봐도 되나?”

    “그럼요. 얼마든지.”

    베르덴은 약병의 마개를 열었다.

    삽시간에 퍼져 나가는, 상쾌하면서도 쓰디쓴 냄새. 그저 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청량감이 가슴 속에 퍼져 나갔다.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진품.

    ‘어떻게 이걸…….’

    마탑에서 독점하고 있는 물건이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그렇기에 베르덴은 리스너의 다음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원하신다면 이 두 개의 보수를 선불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

    베르덴이 말없이 마개를 닫았다.

    톡톡톡톡.

    책상을 손가락으로 빠르게 두들기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공간가방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만드레이크 추출액을 보수로 내걸 뿐만 아니라 선불로 준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군. 대체 무슨 속셈이지?”

    “부족한 신용을 쌓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 주셨으면 좋겠군요. 저희 방주는 애셔 님에게 호의를 품고 있으나 애셔 님은 그런 저희를 의심하고 계시니, 무릇 아쉬운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보수를 갖고 시련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걸 감안하고 드리는 겁니다.”

    리스너와 베르덴의 시선이 교차했다.

    “저희는 인도할 뿐,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보수를 갖고 시련에서 도망치시든 어떻든 간에 선택은 오롯이 애셔 님의 자유입니다.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공간가방과 만드레이크 추출액은 잘못된 투자를 한 셈 치지요.”

    하지만.

    “힘을 추구하는 자에겐 더한 강함을, 믿음을 가진 자에겐 더한 신념을. 시련을 극복한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 전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애셔 님이 무엇을 꿈꾸고 계시는지는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만, 단언하건대 시련은 그를 위한 계단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시련이다.

    인간은 도전하고 극복함으로써 스스로 진화한다. 그 과정에서 위험이 따르는 건 당연하며 그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건 고작 한 줌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는 자에겐 기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그저 도태될 뿐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기에 자신들을 이끌어 줄 ‘선장’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방주가 탄생한 이유다.

    리스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리엔에서 기다리시다 보면 곧 시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알고 싶지 않아도 말이죠. 그러니 거절하실 생각이라면 곧장 이 도시를 떠나는 게 좋으실 겁니다. 분명 휘말리게 되실 테니.”

    “…….”

    베르덴은 침묵으로 답했다.

    히죽 웃은 리스너가 손을 가볍게 휘젓더니 브리엔테에서 봤던 남성의 외모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력의 본질이 흐트러지다 이내 전혀 다른 형태로 변했다. 외형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한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럼 안녕히.”

    베르덴은 떠나가는 리스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지막에 리스너가 보여 준 기예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으나, 지금 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베르덴이 앞에 있는 작은 약병을 응시했다.

    ‘만드레이크 추출액.’

    타고난 재능에 따라 흡수율이 다르며 복용하면 할수록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지지만, 단순히 마시는 것만으로도 마력량이 증가하며 마력회로가 확장된다.

    어떠한 노력이나 부작용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고위 영약 중 하나인 ‘마핵(魔核)’의 핵심 재료.’

    어느 모로 보나 ‘성장’을 원하는 마법사에겐 보물 그 자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효과만큼이나 입수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완전히 자란 만드레이크가 아니면 아차 하는 순간에 시들어 버리니, 인공 재배라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품종이다.

    그렇게 한 해 자연에서 발견되는 만드레이크의 수는 세계적으로 평균 14개.

    열 개의 마탑에서 하나씩 독점하며 나머지가 겨우 시중에 풀리는데, 그마저도 권력자들의 손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평생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헤미른 마탑에선 최상층에 보관했던 터라 베르덴조차 본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쌓아 온 지식으로 만드레이크의 특징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걸 선불이라며 어떠한 담보도 없이 자신에게 넘기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이군.’

    리스너가 말한 방주의 이념과 목적 그리고 의의.

    어렴풋이나마 방주란 조직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대체 그들이 인류를 구원함으로써 무엇을 얻게 되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베르덴이 등받이에 몸을 누였다.

    “……선택이라.”

    보수를 갖고 냉큼 도망치든가, 아니면 시련에 도전하든가.

    전자를 고르면 어떠한 손해도 없이 이 귀한 보수들을 얻게 된다.

    대신 방주와의 관계도 끊기게 되겠지. 기껏 보인 호의가 완전히 무시당한 것이니. 손익만 따진다면 베르덴으로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먼저 방주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

    만드레이크 추출액 이상의 것을 줄 수 있다는 리스너의 말에 상당히 흥미가 생겼다. 그만큼 방주에서 보인 호의가 그에게 있어 매력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법사로서의 자존심.’

    보수만 갖고 시련이 무서워 도시에서 도망친다니, 얼마나 추한 모습일까.

    베르덴은 자신의 마법사 인생에 그런 오점 따위 결코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그 길을 걷는 순간 언젠가 같은 상황이 왔을 때 또다시 같은 길을 가게 될 뿐이니.

    그래서 선택했다.

    보다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선택지를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내 성장을 위해서.’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얼마 후, 시련이 다가왔다.

    * * *

    투사(鬪士) 바르델.

    그는 백금 등급의 모험가로 숱한 격전을 겪어 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지금의 상황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이형종이라니……!”

    “줄기! 줄기부터 잘라!”

    “루드니아! 뭐 해! 빨리 몽땅 불태워 버려!”

    숲 전체가 트런트의 소굴이다.

    모험가들이 각기 뭉쳐 대응하고 있긴 했지만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나무들이 꿈틀거리며 나무줄기를 뻗어 왔다.

    그걸 잡아챈 바르델이 역으로 나무를 당긴 다음, 단칼에 양단해 버렸다.

    “발밑을 주의해라! 수가 좀 많긴 하지만, 기습만 주의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

    본래 실종된 모험가들을 찾으러 나선 거지만, 이 숫자로는 화력이 부족하다.

    로리엔으로 돌아가 대책을 세우고 모험가뿐만 아니라, 용병을 포함해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끌어모아야 한다.

    특히 마법사를.

    사아아…….

    그러던 그때, 숲 깊숙한 곳에서 짙은 귀기가 느껴졌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주변의 트런트를 몰살한 바르델이 침을 삼키고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이번엔 또 뭐냐……!’

    그리고 나타났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기어오는 회색의 뿌리들. 그런데 그 끝에 무언가 감겨 있었다.

    “저, 저거, 사라진 모험가들 아니야?”

    “올리? 쟤 올리잖아!”

    뿌리 끝에 실종된 모험가들이 감겨 있었다.

    순간 살아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들 전부가 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으며 하나같이 눈동자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으니.

    ‘잠깐, 죽은 시체를 다루는 뿌리라면……?’

    생각났다.

    눈을 부릅뜬 바르델이 곧장 소리쳤다.

    “소울 트리(Soul Tree)다! 절대 시체들과 마주치지 마라! 마법사들은 당장 퇴로를 만들고, 다른 놈들은 마법사 지켜! 누구든 좋으니 당장 도시로 가서 지금 상황을 전해라!”

    소울 트리.

    생명체를 붙잡고 그 생명력을 양분 삼아 자라는 이형종. 막 태어났을 때의 위험도는 트런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모험가 길드가 책정한 종합적인 위험도는 무려 특수 개체에 버금간다.

    ‘이렇게나 많은 시체라니, 설마 그동안 실종된 모험가를 전부 잡아먹은 건가!’

    기를 집중한 바르델의 눈엔 정확히 보였다.

    일반적인 트런트의 세 배쯤 되는 크기에, 각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수많은 시체가. 만약 정신이 약한 자가 다가간다면 죽은 자들이 지르는 비명에 일순간에 정신이 파괴될 것이다.

    저게 도시로 가면 어떻게 될까.

    분명 참극이 일어난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바르델 혼자서 이 전부를 죽일 순 없다.

    하지만 모험가들이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겠지. 그는 살아남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검날에 맺히기 시작했다.

    ‘버틴다.’

    도시에 모험가들이 도착하고, 구원군이 올 때까지.

    설령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르델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모험가였으니까.

    바르델에게 다가온 수십 마리의 트런트와 회색 뿌리에서 내려오는 백색 눈동자들.

    이윽고 놈들의 입이 열리더니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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