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백작의 의뢰 (2)
‘저게 3위계라고?’
그럴 리가 없다.
오우거를 처리한 마법은 무려 4위계 중위에 있는 마법. 지형을 조작해 벽을 만들어 낸 것 또한 3위계의 마력량으론 턱도 없다. 마력감지를 그렇게 넓게 펼쳤는데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그렇다는 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의미다.
어째서 백작 각하를 속였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로메오! 프렌! 길을 뚫어라!”
발칸의 지휘 아래, 수색대가 약해진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나 쉽사리 추적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시야에 보이진 않지만 놈들이 포기하지 않고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숲을 탈출할 수가 없다. 그러다 피해가 확산되기 시작하면,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될 테니.
어쩔 수 없다.
“클라크! 그걸 준비해라!”
“아, 예! 단장님!”
“애셔! 혹시 마력감지로 공터 같은 장소를 찾아 줄 수 있겠나?”
“해 보겠습니다.”
베르덴은 곧바로 적합한 위치를 물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진 오두막이 세워져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방향을 틀어 오두막에 도착한 수색대. 클라크가 품속에서 마법 물품을 꺼냈다.
‘휴대용 마법진?’
마석을 활용한 일회용 마법 물품.
아티슨 마탑에서 특별 제작 되는 것으로 개인 간의 사적 거래가 불가능한 물건이다.
클라크가 스위치를 누르곤, 휴대용 마법진을 지면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주위에 마력의 원이 생기더니 마법적인 문자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폐와 보호의 마법진인가.’
지금 상황에 적합한 마법진이다.
다만, 베르덴의 기준에선 마법진의 성능이 부족해 보였다.
“이걸로 됐…… 자, 잠깐!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설명할 시간이 없다.
클라크를 무시한 베르덴은 마력의 실을 뽑아 마법진에 침투시켰다. 막혀 있는 벽을 뚫어 경로를 더 단순화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문자를 따로 추가로 새겨 넣었다. 효율성과 성능을 동시에 높인 것이다.
본래라면 이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엑시드를 착용한 베르덴에겐 이 정도 멀티태스킹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 어?”
클라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구축되고 있는 마법진을 도중에 수정하는 게 가능하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마법사의 관점에서는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성됐다.
반투명한 돔이 오두막과 그 주위를 감쌌다. 후에 수색대를 쫓고 있던, 백금 등급 모험가를 비롯한 몇몇 놈이 어슬렁거리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서야 수색대는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발칸이 베르덴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성공한 모양이야. 그런데 아까 같은 행동을 하기 전에는 귀띔부터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앞으론 그러겠습니다.”
“……좋아. 그럼 일단 휴식을 취하며 계획을 세우도록 하지. 이 숲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도 하고.”
발칸이 사로잡은 브레넌을 끌고 오두막에 들어섰다.
그리고 당황했다.
“바, 발칸 단장?”
“베일론 자작님?”
실종되었던 1차 수색대와 베일론 자작.
그들이 오두막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 *
‘이래서 마력감지에 잡히지 않았던 건가.’
베르덴이 바닥을 둘러봤다.
오두막 안에 새겨져 있던 은폐와 보호 마법진. 1차 수색대가 지니고 있던 휴대용 마법진 덕분에 자작 일행은 겨우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베일론 자작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로든마이어 백작님께서 단장을 보낼 주실 줄이야.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됐군. 겨우 빠져나갈 수 있겠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발칸의 물음에 자작이 답했다.
“……카제르단 능선에 있는 마을을 떠나 백작가에 돌아가려던 중, 숲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비명 소리 말입니까?”
“그래서 구하러 갔지. 영주민을 보호하는 건 귀족의 의무이지 않나. 여기가 백작령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런 생각도 있긴 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자작에겐 수행원들이 있었으니까. 몇 번이나 타 영지에 방문하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자신을 지켜 준.
그런데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우리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어. 시끄럽게 들리던 비명마저도 갑자기 사라졌지. 그리고 거기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나무……?”
“그래, 불길한 느낌이 드는 회색 나무였다. 나는 수행원들에게 주변을 샅샅이 조사해 보라고 했지. 그런데 갑자기 오싹한 기운이 뒷목을 스치더군.”
자작 일행들은 위험을 직감했다.
안전을 위해 서둘러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나무로 위장하고 있던 트런트들이 길목을 막기 시작했고, 백색 눈동자를 한 놈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분투했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발칸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놈들은 우리들을 죽이지 않고, 회색 나무 앞에 던져 버리더군. 그러자 회색 뿌리가 움직이더니 우리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건…… 뭐랄까.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게, 생명력 자체를 흡수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
몸을 옭아맨 뿌리는 너무도 단단해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생명력이 다한 수행원이 하나둘씩 죽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죽음에 이르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1차 수색대가 나타나 그들을 구출했다.
옆에 있던 로드론 기사단의 부단장이 설명을 보충했다.
“그렇게 추적 끝에 자작님과 수행원 둘을 구할 수 있었지만…… 도저히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트런트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백색 눈동자 중에 강한 놈들이 많더군요.”
“백금 등급 모험가까지 있는 것 같던데.”
“예, 그 외에도 오우거나 리프쿼치 같은 위험한 아인종이나 마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브레넌, 케한, 세르간이 희생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멸했을 겁니다.”
“뭐?”
발칸이 브레넌을 가리켰다.
“브레넌이 죽었다면…… 여기 있는 브레넌은 뭐지?”
“그 회색 나무는 죽은 자들을 부릴 수 있는 걸로 보인다. 생명력이 전부 빨아먹힌 내 수행원들도 백색 눈동자가 되어 우리를 공격했지. 그리고 놈들을 죽이면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군.”
“그렇다면 되살릴 방법은…….”
“없다. 이미 죽었으니까. 저건 그 나무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으득. 발칸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부하의, 기사의 고결한 희생을 이딴 식으로 더럽히다니……!
“분노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은 앞을 생각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다.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지?”
자작의 물음에 발칸이 답했다.
“본래 실종자들을 구하는 대로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잡음 없이 이 숲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됩니다. 죽은 사람을 조종한다니, 자칫 피해가 어떻게 확산될지도 감히 예측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
“여기서 섬멸하겠습니다.”
콰득! 발칸이 브레넌의 숨통을 끊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하얀 무언가가 빠져나가더니, 육체와 함께 소리 없이 사라졌다.
백색 눈동자를 한 인간. 어쩌면 되살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기에 힘을 조절했지만, 죽은 자라면 망설임은 없다.
로드론 기사단장, 부단장 그리고 휘하 기사들과 베일론 자작 및 그 수행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데 질문이 좀 늦었다만, 저자는 대체 누군가?”
자작이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상대는 귀족. 베르덴은 예를 갖춰 대답했다.
“애셔라고 합니다.”
“로든마이어 백작 각하께서 고용하신 마법사입니다. 이 친구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호오, 그거 놀랍군.”
마지막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힘을 숨기고 있던 마법사까지. 전력은 충분하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검을 쥔 발칸이 수색대…… 아니, 토벌대에게 말했다.
“목표는 회색 나무. 방해물들은 백작 각하의 영토에서 모조리 지워 버린다. 페리스와 고븐 그리고 수행원들은 자작님 곁을 지키고.”
“예, 단장님!”
다음으로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애셔, 자네는 독단적으로 움직여도 좋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발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우거가 한 방에 쓰러지던 광경을 떠올렸다.
“자네가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쉽게 당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우리와 손발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 따로 움직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지. 그러니 우리가 시선을 끄는 동안, 자네는 그 회색 나무의 위치를 찾아내어 이 신호탄을 터뜨려 주게. 그럼 곧바로 달려가겠네. 하지만 도중에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합류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토벌을 시작한다.
* * *
로든마이어 백작가는 검술의 명가로 유명하다.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온, 세대가 지날수록 발전을 거듭한 고유의 검술. 공국의 검사 중 서열을 따지자면, 현 로든마이어 백작은 겉모습과 달리 상위에 해당하는 강자였다.
중년에 나이에 이르러 육체가 약해졌다고 한들, 그 노련함은 젊었을 적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 백작의 직속 기사단인 로드론이 강하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백작가에서 고유 검술의 일부를 물려받았으며, 충성심 또한 가슴속에 충만했으니. 그중 기사단장 발칸은 다른 기사들과는 격이 달랐다.
서걱! 촤아아악!
발칸의 검이 번쩍이며 적들을 베어 갈랐다. 목이 떨어진 백색 눈동자들의 시체가 사라졌다.
벌써 그 혼자 처리한 숫자만 삼십이 넘어갔다.
<워터 자벨린>
클라크의 마법. 거대한 물의 창이 적들을 휩쓸었다.
무지막지한 수압으로 인해 놈들의 육체가 터져 나갔고, 그 근처에선 부단장의 창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마수와 고블린들을 꿰뚫었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순조롭군.’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회전한 발칸이 머리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다.
“왔나.”
백금 등급 모험가.
자신의 부하들이 맞서기엔 버거운 상대다. 그러니 단장인 자신이 직접 처리할 수밖에. 놈을 죽이면 회색 나무가 가진 전력이 크게 떨어질 터.
카앙!
발칸의 검과 모험가의 화살이 격돌했다
* * *
홀로 떨어진 베르덴은 하늘에서 숲을 바라봤다.
회색 나무가 과연 어디에 숨어 있을까. 뿌리를 움직였다고 하니, 트런트라는 이형종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게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더 찾기 어려울 터.
‘그렇다면.’
베르덴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처음으로 펼치는 전력을 다한 마력감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마력이 빠르게 소모되었지만, 이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강화된 감각이 범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인지했다.
‘찾았다.’
베르덴은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지면으로 낙하하는 그가 스태프를 뻗었다.
<어스 자벨린>
거대한 바위의 창.
그 엄청난 파괴력에 숲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바람을 움직여 자욱해진 흙먼지를 치워 버리자, 베일론 자작이 말했던 회색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불길한 느낌이 드는군.’
다른 나무들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기이하게 느껴진다.
베르덴은 지면으로 내려갔다. 근처에 숨어 있던 백색 눈동자들이 하나둘씩 회색 나무를 감싸듯 나타났다. 그중엔 오우거의 어깨에 있던 마법사도 있었다.
발칸이 준 신호탄을 쏘아 올릴 때.
하지만 베르덴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서 토벌대까지의 거리가 꽤 있기도 하고, 급하게 이동을 강행하다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 처리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파지지직!
베르덴의 스태프에서 푸른 전류가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