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백작의 의뢰 (1)
1차 수색대가 보낸 정보에 따르면, 베일론 자작은 카제르단 능선 아래에 있는 마을을 나선 이후에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수색대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2차 수색대가 향할 곳은 당연히 마을밖에 없다. 거기서 필요한 단서를 찾은 다음에 신속하게 움직일 계획이었다.
베르덴은 기사 한 명과 동승했다.
백작가에서 특별히 훈련한 군마라 그런지, 속도가 비행 마법을 쓴 것보다도 빨랐다. 그 흔들림은 승마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긴장을 놓으면 튕겨 나갈 정도.
‘그런데 이 마법사는 대체 뭐지?’
기사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본래라면 뒷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잡아 균형을 유지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애셔란 마법사는 어딜 잡기는커녕 아예 거꾸로 앉은 채,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흔들리는데 떨어지지 않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마법사라고 했으니 어떤 마법이나 매직 아이템을 사용한 거겠지.’
기사는 관심을 끊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베르덴은 주변을 바라보며 룬의 반지, 엑시드의 효과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게 고등으로 분류된 룬 문자 배열인가.’
모든 감각의 강화.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도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식별할 수 있으며, 지금처럼 말을 타는 도중에도 한결같이 육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등 느껴지는 세상이 달라졌다.
마법의 정밀도나 반사 신경 또한 마찬가지.
엑시드를 마력회로에 각인함으로써 베르덴은 마법적인 능력뿐만이 아닌, 인간 자체로서 한 단계 성장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전에서 얼마나 유용할지 기대되는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맥 바로 아래에 있는 목책을 두른 작은 마을.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근육질의 군마를 본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수군거렸다.
“흩어져서 자작님과 수색대와 관련된 단서를 찾는다. 셋은 말을 지키고, 나머지는 2인 1조로 움직여라.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신호탄을 터뜨리도록.”
“예, 단장님.”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사단장 발칸이 홀로 남은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자넨 나하고 같이 가지.”
“알겠습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되도록 수색대에 협조해 달라고 했으니, 굳이 지금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발칸과 함께 마을을 거닐며, 실종자들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성과는 있었다.
잠시 후, 기사들이 들은 정보를 한데 모았다.
“숲속에 망가진 마차가 한 대 있다라. 특징을 들어 보니 베일론 자작님이 타고 가셨던 마차인 걸로 보이는군.”
“1차 수색대도 마을에 말을 맡기고 그곳으로 향한 모양입니다. 현지인들이 겁을 먹어 안내해 줄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 복잡한 위치는 아닌 것 같으니 찾는 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알겠다. 우리도 마을에 말을 맡기고 전부 도보로 이동한다.”
위치가 숲속이니 군마를 타고 가면 오히려 기동성이 떨어질 터. 감히 백작가의 군마를 건드릴 멍청이는 없을 테니, 마을 사람들에게 맡겨도 문제는 없다.
그렇게 베르덴과 기사들이 마을을 나서기 직전, 지팡이를 든 노인이 길을 막아섰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걸세.”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발칸이 묻자, 노인이 지팡이로 마을을 주욱 가리켰다.
“나는 여기서 무려 70년을 살았네. 이곳 카제르단 능선 일대는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훤히 꿰고 있지. 위험한 아인종이나 마수도 없는, 내가 나고 자란 이 마을은 아주 평화로웠어. 그런데…… 그런데, 최근부터 숲이 이상해졌네.”
“숲이?”
“숲이 소란스럽네. 새, 사슴, 멧돼지, 고블린 할 것 없이 생명을 가진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단 말이네. 마을 누구도 그걸 아는 사람은 없지만, 나는, 나만큼은 느낄 수 있지.”
노인이 몸을 떨었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숲이 울고 있네, 죽음을 앞에 둔 아이처럼. 그러니 휩쓸리고 싶지 않다면…… 그냥 돌아가는 게 이로울 걸세. 사라진 사람들은 잊고 말이야.”
노인은 몸을 돌려 마을로 향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발칸이 입을 열었다.
“……출발하지.’
고작 마을 노인의 몇 마디 말로 실종자들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기사들의 가슴 한편에는 뭔지 모를 꺼림직함이 남아 있었다.
* * *
기사들이 대형을 이뤄 일제히 숲을 내달렸다.
기운으로 신체를 강화한 그들의 속도는 말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마법사인 베르덴과 클라크는 비행으로 하늘을 통해 움직였다.
‘숲이 울고 있다라…….’
베르덴은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숲을 내려다봤다.
산에 빼곡하게 들어찬 침엽수들. 고요한 분위기는 여타 숲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만약 엑시드가 없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기사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베르덴의 감각에는 기묘한 느낌이 잡히고 있다.
뒷목이 서늘한 게, 오싹하다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 숲에 뭔가 있다.’
베르덴은 그렇게 확신했다.
곧이어 부서진 마차가 있다는 장소에 도착했다.
발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일이 심각해졌군.”
대체 무엇에 습격당했는지 마차의 절반가량이 사라져 있었다.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걸 보면 폭탄이나 마법인 것 같은데…… 근방을 수색해 봤지만 마차의 잔해 외에는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이렇게 흔적이 없다니……. 애셔, 백작 각하께 듣기로는 마수나 현상 수배범을 추적해 처리했다던데, 그 추적술 좀 보여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원래 그러려고 온 거니까.
<마력감지>
베르덴이 마력을 퍼뜨렸다.
그러자 클라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하, 뭔가 했더니 마력감지로 추적을 한다고? 마법사로서 기본도 못 배웠나? 그리고 그런 식으로 범위를 넓히면 마력이 순식간에 고갈될 텐데, 그때 습격이 오면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클라크, 그만.”
“아니, 단장님도 아시잖습니까? 1위계인 마력감지로 저희조차도 찾지 못한 흔적을 발견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단장님!”
“백작 각하께선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애셔를 고용하셨다. 마력감지로 인해 마력 고갈이 일어나면 우리가 챙기면 그만일 터. 할 말이 있으면 추적을 끝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발칸은 클라크의 불만을 일축했다.
베르덴은 그들을 무시하고 마력감지의 범위를 더욱더 넓혔다. 감각이 강화된 탓인지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흘려보낼 필요 없이 대부분 읽어 내는 게 가능했다.
‘……이건?’
실종자의 흔적을 찾아낸 건 아니었다.
베르덴이 주목한 건 숲 그 자체. 그중 몇몇 나무에게서 기이하리만치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이건 일반적인 식물에게서 느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찾은 건가?”
“설마 찾았을 리가…….”
“찾진 못했지만 다른 걸 발견했습니다. 이쪽입니다.”
스태프를 든 베르덴이 앞장섰다.
비행 마법을 써서 기민하게 나무 사이를 지나쳐 가는데, 발칸이 봐도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뛰어난 반사 신경과 마법 조작 능력이야. 비행 마법 하나만큼은 클라크보다 우수하겠어.’
수색대가 베르덴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베르덴이 멈춰 섰다. 그제서야 발칸은 숲에 만연한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나무를 노려보던 그가 발걸음을 옮기자, 뿌리가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발칸을 덮쳤다.
“역시 트런트였나.”
서걱!
섬광이 번쩍이더니 나무의 뿌리와 몸통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백작가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만큼 재빠른 검격이었다.
트런트를 베어 낸 발칸이 혀를 찼다.
“이런 대낮에 트런트라. 이해가 안 되는군. 트런트라는 나무 형태의 이형종은 햇빛을 싫어해 어둡고 습한 지역에서만 발생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 근방에서 흘러들어 온 건가?”
베르덴이 물었다.
“이 근방이라면?”
“모르나? 공국에서 꽤 유명한데 말이야. ‘악마의 숲’이라고 모험가 길드와 공국에서 법적으로 접근을 금지한 숲인데, 한낮인데도 어두워서 트런트가 자생하기 좋은 장소라고 하더군.”
‘악마의 숲?’
들어 본 적이 있다.
브리엔테에서 만난, 방주에서 온 리스너에게서 말이다.
“하지만 트런트 때문에 자작님과 1차 수색대가 실종됐다고 하기엔 이유가 빈약하다. 부서진 마차의 흔적을 봐도 그렇고. 분명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
그때,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베르덴과 발칸이 거의 동시에 반응했으며, 뒤따라 클라크와 기사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와라.”
발칸이 난폭한 기세를 내뿜었다.
숲 안쪽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윽고 숨어 있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레넌?”
그는 실종된 1차 수색대 기사 중 한 명이었다.
* * *
‘저게 실종된 기사라고?’
베르덴이 대답 없이 우뚝 서 있는 브레넌을 바라봤다.
곳곳에 흠집이 난 갑옷, 핏기가 가신 하얀 피부와 혼탁한 백색으로 물든 눈동자. 무기는 어디다 두고 왔는지 검집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브레넌에게서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저 사람은…… 아니, 저건 인간보단 언데드에 더 가까웠다. 저런 종류의 언데드가 있다고는 전혀 들은 바가 없어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보통 상태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브레넌,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
“대답해라, 브레넌!”
상관의 명령에도 브레넌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발칸이 직접 브레넌에게 다가가자, 그제서야 반응을 보였다.
“브레넌, 어서 상황을…….”
후웅!
브레넌이 발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주먹을 붙잡은 발칸이 그대로 브레넌을 끌어당겼다.
콰앙!
턱을 후려친 팔꿈치. 이어서 뒷목을 잡아 복부를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갑옷이 일그러졌고, 그대로 짓눌러 지면에 처박았다.
브레넌을 제압한 발칸이 그의 목덜미에 손을 대었다.
“……맥박이 있는 걸 보니 언데드는 아닌 것 같은데,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클라크, 혹시 아는 게 있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백작가에 연락을…….”
“발칸 경.”
베르덴이 주위에 시선을 향했다.
사사삭. 사삭. 풀에 스치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온다. 하나가 아닌, 집단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이 주위에 모여들고 있었다.
하나같이 브레넌과 같은, 백색의 눈동자를 한 아인종, 마수, 짐승, 인간 등이 서서히 다가왔다.
발칸은 고심했다.
이 자리에서 상황을 정리할지, 아니면 잠시 후퇴할지.
결국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실종자들이 브레넌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구해 낼 방법을 찾는 게 최우선이니. 저항하는 브레넌의 팔과 다리를 재빨리 묶고는, 어깨에 둘러메었다.
“전원 후퇴한다! 교전을 피하고 퇴로를 확보하는 걸 우선해라!”
“제가 뚫겠습니다!”
<파도>
클라크의 마법에 전면에 있던 놈들이 양옆으로 휩쓸려 나가떨어졌다.
기사들은 인간을 제외한 적들을 베어 넘기며 이동했고, 베르덴은 후열에서 추적자들의 접근을 마법으로 차단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쩌어엉!
“큭……!”
멀리서 화살이 날아왔다.
가까스로 발칸이 검면으로 막아 내긴 했으나, 그 충격을 흘리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곧이어 흉수가 나타났다.
더러워진 백금의 플레이트를 목에 걸고 있는 궁수였다.
“모험가까지 당한 건가……!”
“단장님! 저기 앞에!”
쿵. 쿵. 쿵.
거체의 오우거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다 놈의 어깨에는 지팡이를 든 인간 마법사까지 있었는데, 베일론 자작의 수행원 중 한 명이었다.
‘퇴로가 막혔다.’
이걸 뚫고 나가려면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할 터. 거기다 이어지는 추적을 따돌리지 못한다면 근처에 있는 마을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몇 초간 대치하며 발칸이 판단을 내리려던 순간.
<스톤 크랙>
집채만 한, 날카로운 암석들이 오우거에게 쇄도했다.
자작의 수행원이 얼음 구체로 막아 내려 했으나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그어어어어어억!]
────콰과과광!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린 오우거. 그 질긴 가죽에도 불구하고, 신체의 태반 이상이 날아가 버린 놈이 기우뚱 중심을 잃으며 지면에 쓰러졌다.
그 여파로 자작의 수행원이 튕겨져 나갔다.
백금 등급 모험가가 베르덴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활을 쏘기도 전에, 지면에서 거대한 벽이 솟아올라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마법……?”
클라크는 아니다. 수색대의 시선이 자연스레 뒤로 향했다.
아무렇지 않게 스태프를 어깨에 올린 베르덴이 말했다.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