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방주
베르덴은 아주 간단히 말했다.
모르트 대신 돈 줄 테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거기에 염력으로 가볍게 위협하자 베딘과 니스는 머리가 떨어질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채업 문제는 이걸로 끝났다.
다시 공방에 찾아가자 공방을 청소하고 있는 모르트가 보였다.
“아! 오셨습니까! 마법사님! 자 자, 들어오시죠.”
모르트가 의자를 가져와 베르덴을 앉혔다.
급하게 차도 끓여 왔는데 영 식기의 상태가 별로라 입에 대지는 않았다. 헛기침을 한 모르트가 입을 열었다.
“크흠, 콘도르가 사람을 보냈더군요. 애셔라는 이름의 마법사 한 분이 갈 테니 극진히 모시라고. 하하, 진즉에 말씀 좀 해 주시지…….”
콘 상회는 모르트에게 있어서 훌륭한 중개소였다.
덕분에 사람과 대화하다 마찰을 일으킬 일 없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면 돈이 들어오는 간단한 구조로 삶을 연명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없다면 모르트는 성격 탓에 제대로 장사도 못 하고 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극진히 모시라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 마법사인 것도 좀 걸리고.
안 어울리게 미소를 짓고 있는 모르트를 보며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주문받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원하는 매직 아이템이 뭔지 말씀만 해 주시죠.”
베르덴이 원하는 건 스태프와 로브.
스태프는 둔기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해야 하고, 보다 많은 마력을 담을 수 있어야 했다. 현재 예산 내에서 만들 수 있는 마법 물품은 그 외의 능력이라면 베르덴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의 실력이 마법 물품의 효과를 훨씬 웃돌았으니까.
“무기로 쓸 수 있는 스태프라. 알겠습니다. 그럼 로브는 어떤 걸로……?
“체온 유지가 되는 걸로 부탁합니다. 내구성도 좋으면 더할 나위 없고요.”
“그럼 마수의 가죽이 좀 필요하겠군. 적당히 효과도 부여하고…… 좋습니다. 그럼 전부 다 해서 얼마냐…….”
모르트가 안경을 쓰고 계산기를 두들겼다.
“재료비 3,120만 엘크에다가 인건비 1,330만 엘크…….”
“인건비?”
“인데! 빚을 대신 갚아 주시고 제가 흠씬! 얻어맞을 뻔한 걸 막아 주셨으니 재룟값만 받는 걸로.”
모르트가 슬쩍 눈치를 봤다.
총액은 얼추 예상한 금액의 범위 내였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르트가 숨을 내쉬었다. 잔금을 지불하고 공방을 나섰다.
한 3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으니 느긋이 기다려야겠지.
어차피 할 일도 산더미처럼 많았다. 근처 대장간에서 공구를 구입한 베르덴이 여관으로 향했다.
* * *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베르덴은 하르칸의 마법을 연구하면서도 블랙 아워에게서 빼앗은 나침반을 분해하고 해석했다.
하나같이 난해한 것들이라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방에 틀어박혀서 집중을 하니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회색의 마력이 잔상을 남기며 공명했다.
이내 빛이 잠깐 번쩍이더니 소리 없이 사라졌다.
‘871번째 패턴도 실패. 그럼 다음은…….”
하르칸이 만든 속성, 베르덴이 성신(星辰) 속성이라 이름 지은 회색의 마력은 잔상이 남긴 패턴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여 줬다.
하르칸의 기억을 토대로 패턴을 분석해 보기도 했으나, 주체가 되는 마력회로가 서로 다르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무작위로 패턴을 시험했다.
조금만 위치가 달라도 다른 패턴으로 인식되다 보니 경우의수가 무한에 가까웠다. 이미 1,000번에 가까울 정도로 시도했지만 아직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머지 하나는 끝냈으니 다행인가.’
나침반 분석은 끝났다.
복잡한 기계식 구조는 그 안에 담긴 마법진과 마석을 연결하기 위한 구조였다. 그중 특히 중요한 건 마법진의 구조였다.
‘마력 증폭을 여기에 이용하다니, 기발하긴 하군.’
생물이 가진 마력은 서로 비슷해 보여도 아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주인에게 돌아가려는 특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 양이 클수록 더.
마력 감지를 펼치고 난 뒤에, 별다른 노력 없이 마력이 회수되는 것도 이러한 원리다.
이 나침반은 그걸 이용했다.
마석을 넣고 마력을 안에 가둔 다음, 마법진이 이를 증폭한다. 안에 갇힌 마력은 자연스레 특성을 띠게 되고, 그와 연결된 나침반의 지침이 그 방향을 가리킨다.
언뜻 보면 쉬운 원리이지만, 그를 이루기 위한 구성은 상당히 복잡했다.
일단 마법진을 정확히 본떠 옮겨 놨으니 또 분석해야 한다.
숙제를 하나 해결하니 숙제가 하나 더 늘었다.
‘근데 조립 언제 다 하지.’
부품만 수백 개.
잊어버리지 않게 순서대로 놓긴 했지만 앞이 막막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한숨을 쉬며 공구를 들고는 재조립을 시작했다.
이윽고 자신의 마력을 넣은 마석을 넣어 작동하자, 다행히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었다.
문득 바깥을 보니 해가 밝아 있었다.
분명 시작하기 전에도 해가 중천에 떠 있었는데. 거울을 보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 쉬다 와야겠군.”
바깥 공기가 필요하다.
여관을 나선 베르덴은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슬슬 마법 물품도 완성될 때니 브리엔테를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중,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정장을 입은, 흑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착각했나 싶었지만 지금 베르덴의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리스너.”
사내가 미소 지었다.
“방주에서 왔습니다.”
* * *
방주. 글러트니와 적대하고 있는 집단.
그 이름에 피로가 확 달아났다.
신경을 곤두세운 베르덴이 리스너를 보며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안광에 맺힌 마력에 리스너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셔 님. 해코지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글러트니의 박사를 죽이셨으니 저희는 한배를 탔다고 볼 수 있죠.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고요.”
“왜 날 찾아왔지?”
“대화를 나누면서 얘기해 드리죠.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베르덴이 침묵하자 긍정이라고 해석한 듯 리스너가 맞은편에 앉았다.
느긋한 태도로 음료까지 주문한 그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자, 그럼 어디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까요.”
“접근한 이유부터 말해.”
손에 맺힌 마력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것이 단순히 위협용이 아니란 걸 리스너는 알고 있었다.
“저희는 지난 몇 년간 박사를 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잘 숨어 다니는 통에 찾을 수가 없었죠. 글러트니 내부에서도 급진적이고 독선적인 인물이라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박사가 이름도 모르는 마법사에게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연구 일지까지 몽땅 불타 버렸다고도.”
방주가 해야 할 일을 베르덴이 대신 해 준 셈이다.
그 자그마한 보답으로 그의 정보가 글러트니에게 최대한 늦게 들어가도록 철저하게 막았다.
베르덴이 가늘게 눈을 떴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롭니다. 마르테스와 그 주변에 있는 도시까지 포함해, 글러트니에 속한 자를 전부 제거했습니다. 애셔 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그 탓에 글러트니가 더 깊이 숨어 버렸지만, 박사의 죽음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죠.”
그 후, 방주는 베르덴을 멀리서 주시했다.
직접 감시하지 않고 그 행적을 따라 뒤에서 움직였다. 너무 돌발적인 부분이 많아 중간에 놓치기도 했지만, 결국 이렇게 찾아왔다.
“…….”
그 말을 들은 베르덴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적을 파악당하는 것. 페일의 경우에는 정보상이니 이해는 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고.
그러나 방주는 다르다.
제대로 된 정체도 모르는 조직에게 미행당하는 건, 그걸 본인 앞에서 떠벌리며 느긋하게 구는 리스너의 태도가 베르덴은 몹시 불쾌했다.
설령 베르덴을 위해서 글러트니를 막아 준 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애셔 님……?”
“조용히.”
화아악! 베르덴의 몸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이 유형화될 정도로 높은 밀도의 마력. 실질적인 물리력을 갖게 된 마력이 주위에 영향을 주었다.
쩌적.
카페의 유리가 갈라지고 지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대한 마력이 리스너에게 오로지 집중되었다.
전혀 상정하지 못한, 그 위압적인 마력에 리스너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베르덴의 청안이 리스너를 차갑게 주시했다.
“어떻게 날 미행했는진 모르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지. 지금 이후로 내 뒤를 캐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상당히 불쾌하니까.
베르덴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리스너는 진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베르덴이 마력을 거뒀다.
마력의 중압감은 사라졌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스너가 굳은 얼굴을 풀고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먼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후에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리도록 하죠.”
리스너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근거 같은 건 없었으나, 미행하지 말라고 각서 같은 걸 쓴다고 해서 실질적인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마법을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경고는 했으니 당장은 이대로 넘어갈 수밖에.
물론 이후에 선을 넘으면 그때는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리스너가 슬쩍 물었다.
“그럼…… 대화를 이어 가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감사합니다.”
짝!
리스너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손뼉을 쳤다.
“그러니까 종합해서 말하자면, 방주 내부에는 애셔 님에게 호의적인 시선이 많다는 겁니다. 박사를 제거한 것도 그렇지만, 특히 그 행적에 대해서요.”
리스너가 말을 이었다.
“애셔 님, 당신은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게 방주와 무슨 상관이지?”
“글러트니는 섭식을 통해 인간은 한층 더 진화할 수 있다는 구시대적인 이념을 내세우고 있지만, 저희 방주는 다릅니다. 방주의 이념은 좀 더 뿌리에 가깝죠.”
인간이란 적응하는 생물.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
“인간은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 이것이 언제나 변하지 않는 방주의 이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애셔 님은 이념에 적합한 분이십니다. 가능하다면 바로 방주에 들어오라고 권유하고 싶을 정도로.”
“거절하지.”
모험가 길드도 안 들어갔는데 정체가 불분명한 집단에 발을 디딜 이유가 없다.
그런 베르덴의 단호한 거절에도 리스너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이념에 맞는 인물이란 게 날 찾아온 이유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방주 내에서 후보를 모집하는 일도 하고 있거든요. 적합한 인재를 찾았는데 못 보고 지나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애셔 님이 당장 방주에게 들어올 마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온 건 전해 드릴 게 하나 있어서 그렇습니다.”
리스너가 다 마신 음료를 옆으로 치우곤, 작은 액세서리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은색 팔찌가 들어 있었다.
“‘리커버리’ 시리즈 중에서 상급품입니다. 마력 재생 속도와 더불어 체력 및 상처 회복을 가속화해 주죠. 약소하긴 하나 저희를 대신해 박사를 처리해 주신 보답입니다.”
베르덴이 팔찌를 바라봤다.
리키버리 중 상급품이라면 최소 7,000만 엘크는 될 터. 마력을 소모해 상처와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은 극히 한정되어 있기에 시세가 꽤나 높다. 신성력에 비해 효과가 미미할지라도.
베르덴은 무턱대고 받는 대신, 리스너에게 물었다.
“호의가 과한 거 같은데. 이념에 맞는 인물이란 게 그렇게 방주에게 중요한 건가?”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애셔 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드물게 글러트니와 적대했던 분이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이후로도 그럴지 모르고요.”
리스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물건을 전달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만약에라도 저희 방주와 얘기를 나눠 볼 생각이 있으시다면! 늦어도 한 달 안에 북서쪽에 있는 도시, 로리엔으로 오십시오.”
“로리엔?”
“예, 로리엔. 악마의 숲이 있는 도시죠. 거기서 기다릴 테니 꼭 찾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혹시 그 외에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지금 답해 드리죠.”
질문이라.
베르덴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왜 방주와 글러트니는 서로 적대하는 거지? 단순히 이념 차이인가?”
“이념이 가리키는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글러트니는 어떤 종족보다 뛰어난 신인류를 만들어 구인류를 지워 버리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방주는 결코 인류를 버리지 않는다. 숱한 시련을 넘어 인류를 이끌 선장이 될 사람을 찾고 키우는 것.
“그것이 저희의 이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리스너는 떠났다.
베르덴과 방주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그걸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