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콘 상회 (1)
암월(暗月) 다히트 웨스로웰.
그는 블랙 아워의 추종자들에게 패도적인 지도자였으며 곧 신이였다. 7위계에 다다른 대마도사의 힘 앞에 맞설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런 다히트가 다스리는 블랙 아워가 현재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악명이 드높다고 하나,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쓰고 마탑들과 전쟁을 벌이게 될 줄은 말이다.
“……하르칸에게 보낸 놈들이 실종됐다고?”
“예, 흔적도 없이. 하지만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한 인간이 기절한 채 줄에 묶여 끌려왔다.
다히트가 손을 뻗자 인간이 그대로 끌려와 머리를 잡혔다. 어두운 마력이 피부와 뼈를 넘어 뇌 속을 파고들었다.
<기억전이>
인간이 보고 느꼈던 장면들이 다히트에게 흘러들어 왔다.
본래 이 마법은 시전자가 피시전자에게 일방적으로 기억을 넘겨주는 용도로 만들어졌으나, 블랙 아워에선 여러 연구를 통해 그 반대를 가능케 만들었다.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받기 위해서.
“끄어어…… 끄어어억……!”
마치 영혼이 빨려 나가는 것처럼 인간이 몸부림치다, 곧 축 늘어졌다.
겉모습은 멀쩡했으나 안은 완전히 곤죽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겠지.
편히 죽게 할 수도 있었으나 다히트가 그런 배려를 베풀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다히트가 눈을 감았다.
블랙 아워의 마법사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인간의 기억. 잠시 후, 바르드산맥에 있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의 흔적이군.’
중량이 산맥을 무너뜨리고, 고열이 숲을 불태웠다.
이런 종류의 마법이 화염 계열에 있긴 한데…….
‘생각이 지나쳤나.’
그걸 쓸 수 있을 정도면 하르칸을 죽이라고 보낸 놈들쯤은 한순간에 지워 버렸을 것이다.
‘마법이란 법칙에 얽매인 자’인 마법사와 ‘법칙을 벗어나 마도의 길을 걷는 존재’인 마도사의 격은 말 그대로 천지 차이니.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경우를 생각했을 때 하르칸이겠지.
그 늙은 스승은 복수를 바라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마도사라 할지라도 마력회로가 완전히 조각이 난 이상, 무엇을 하든 벌레의 몸부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루아스교의 성녀.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광신적인 그 여자는 죽은 존재마저 살린다고 전해졌으니.
물론 그런 성녀가 하르칸을 만날 일은 전무했다.
<소멸>
검은 불꽃이 인간의 몸을 뒤덮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재도 남지 않고 사라진 시체. 부하가 내준 수건으로 손을 닦아 낸 다히트가 입을 열었다.
“하르칸, 그 늙은이의 짓인 것 같군.”
“곧바로 추적하겠습니다.”
“됐다, 어차피 죽었을 테니. 실종된 놈들은 찾지 마라. 옛 스승에게 저승 길동무로 줬다고 생각할 테니까.”
4위계 둘과 3위계 하나. 있으나 마나 블랙 아워의 전력엔 차이가 없다.
오히려 하르칸이 다히트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준비한 함정에 대신 빠진 셈이니, 제 할 일을 다한 셈이다.
애초에 하르칸이 범인일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 고지식한 스승은 그런 술수에 능하지 않았다. 거기다 마탑의 동력원을 부술 힘조차 없다. 그건 다히트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찾은 거긴 했지만.
‘나침반이 아깝긴 하지만 스승의 목숨을 거두는 대가로는 딱 알맞군.’
그러한 결론으로 하르칸에 대한 건은 끝을 냈다.
더 이상 죽은 이에게 할애할 시간 따윈 없었으니. 다히트는 생각을 옆으로 치워 내곤 현재에 집중했다.
보헤미른 마탑이 척살대를 구성한 이후, 근처에 있는 지부들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무리 은폐해도 보헤미른을 돕는, 다른 마탑들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일단 후퇴는 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이쪽도 제대로 준비를 갖춰야만 했다. 그걸 위한 새로운 지부가 거의 완성 직전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놈들의 전력을 분산해야 한다.’
그런 뒤에 다히트가 직접 마탑주를 처단하면 상황은 끝.
그다음엔, 블랙 아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범인과 그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숙청하면 된다.
그리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마탑에 몰래 투입했던, 일이 터지자 자취를 감춘 부하까지.
다히트는 겉은 냉정했으나, 그 속은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검은 로브를 두른 마법사가 다급하게 달려와 다히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 보고드립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뭐지?”
“현재 제국 근방에서 완성 직전이었던 지부가, 보헤미른의 척살대에 의해……!”
전멸.
투입한 블랙 아워의 일원들은 모조리 죽었고, 보내 놨던 포션을 비롯한 물품들을 전부 빼앗겼다. 제일 중요한 건, 다히트가 세운 계획이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폐기되었다는 것이었다.
콰직.
의자의 손잡이가 박살 났다. 다히트가 겨우 분노를 삼키며 그들에게 명령했다.
“……전선을 뒤로 물린다.”
시시가각 블랙 아워의 세력권이 줄어든다.
그러나 보고만 있을 다히트가 아니었다. 준비만 갖춰지면 언제든 직접 나서서 마탑 놈들을 찢어 죽이리라.
‘그러니 기다려라.’
마탑과 블랙 아워.
그들 사이에는 폭풍 전야와도 같은 기류가 흘렀다.
그리고 한편, 베르덴은.
“음, 향이 좋군.”
최고급 차를 마시며, 공국의 휴양도시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 * *
잠에서 깨어난 베르덴이 눈가를 비비며 커튼을 열어젖혔다.
창문으로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었고, 아래로 시선을 향하니 활기찬 도시가 보였다.
리비안트 공국 휴양도시, 브리엔테.
블랙 아워를 전부 처리하고 곧장 지도를 펼쳐 이곳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아온 터라 몰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걸로 추적은 피했겠지.’
흔적은 없다. 마을에 베르덴을 본 목격자가 있긴 했지만, 인상착의 하나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을 추적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블랙 아워라도. 하물며 한창 마탑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주력을 보낼 여력은 없을 것이다.
‘가능하면 내 존재 자체를 몰랐으면 좋겠지만.’
책상에 앉은 베르덴은 여관에서 준 아침 식사를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4위계에 오른 것과 새로운 속성과 마법.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진 능력을 갈무리해야만 했다.
우선, 4위계.
1위계와 2위계는 기초. 3위계는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마법이 많은 반면, 4위계는 보다 파괴적이고 다양한 마법이 가득하다.
베르덴에게 부족했던 화력이, 한 차원 위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해결된 것이다.
‘그리고 하르칸이 준 속성과 마법.’
베르덴의 손에 회색 마력이 맺혔다.
이 생소한 마력이 마법이라는 신비를 일으키는 작용은, 수많은 마법 이론을 공부한 베르덴조차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마력의 잔상과 잔상이 연결되어 하나의 형식을 이루곤, 서로 증폭되어 기존에 없던 힘이 발생한다. 그 모습은 마치 별자리와도 같았다.
어떻게 속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마법을 만들어 냈을까.
하르칸의 기억은 답했다. 이것이 그가 걸어온 마도라고.
마법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법칙에서 벗어난 마도사만이 가능한, 일종의 기적이었다. 아무리 마력이 방대하고, 습득한 마법이 많다고 한들 결코 닿을 수 없는.
하지만, 베르덴은 달랐다.
그 또한 역천이라는 기적을 이룬 유일한 존재였으니.
하르칸과 달리 무한한 마력을 가진 마탑의 동력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기적을 일으킨 건 분명했다.
세상의 시점에선 베르덴은 마도에 한 발짝 걸친 존재였다.
그러나 베르덴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마탑의 심장과 마탑주의 컬렉션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으니까.
아직 그의 마도는 시작되지 않았다.
베르덴이 회색 마력을 이리저리 놀리며 생각했다.
‘하르칸이 만든 마법은 개량할 필요가 있겠어.’
하르칸의 다섯 개의 별, 오성(五星).
지금의 수준으론 첫 번째 별밖에 다룰 수 없었는데, 그조차도 소모되는 마력이 너무도 심각했다. 파괴력이 압도적이라고 한들, 이래서야 실전에서 쓰는 건 무리였다.
“거대한 하나보다 여러 개로 나뉘었으면 좋겠는데…….”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했는데 번뜩 떠오르는 건 딱히 없었다.
개량의 방향성을 정하며 천천히 연구할 수밖에. 블랙 아워의 나침반도 해체해야 하고. 이곳 브리엔테는 그런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도시였다.
기지개를 켠 베르덴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럼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뭘까.
그러다 문득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스태프가 보였다. 전 모험가 도적에게 빼앗은 지팡이를 스태프로 재가공한 뒤에 글러트니, 통곡의 기사, 블랙 아워 등과의 전투에서까지 써왔던 무기.
곳곳에 흠집이 나 있었고, 스태프의 보석도 멀쩡하지 않았다.
“새로운 장비라.”
안 그래도 곧 날씨가 추워질 테니 새로운 로브를 맞출 필요도 있었다.
돈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이 도시는 모험가들도 휴식차 많이 오기에 시설도 꽤 좋은 편이고.
할 일을 결정한 베르덴은 곧바로 움직였다.
* * *
아직 오전임에도 거리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평범한 가족, 짐을 옮기는 일꾼, 두툼한 지갑을 들고 대장간으로 향하는 모험가와 고급스러운 마차에 탄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까지.
베르덴도 그중 하나로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디가 좋은지 모르겠군. 누가 안내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다못해 추천하는 상점이라도.
그렇게 턱을 매만지며 두리번거리던 도중, 본 듯한 간판이 하나 보였다.
‘콘 상회?’
파이테 남작령에서 만난 콘라드가 말한 상회였다.
분명 가족 사업이라고 그랬지. 훗날 방문하게 되면 자신의 이름을 대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마침 잘됐다.
베르덴은 주저 없이 콘 상회의 건물로 들어섰다. 카운터로 향하자 근처에 있던 경비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경계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콘 상회에 어서 오십시오. 저희 상회는 일반적으로 도매를 전문으로 하며, 때론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특수한 물건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손님께선 무엇을 주문하러 오셨습니까?”
“아는 사람이 그러더군요. 물건을 구할 일이 생기면 콘 상회에 들르라고.”
“아, 소개를 받으셨습니까? 혹시 그분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콘라드라고 합니다.”
콘라드?
사내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베르덴이 말을 이었다.
“파이테 영지에서 제가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콘 상회에 자신의 이름을 대면, 절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들어 본 적이 있다.
얼마 전, 콘라드가 보낸 편지에서, 파이테 영지로 가던 중 도적과 아인종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를 구해 준 마법사가 있었다고도.
잿빛 머리에 푸른 눈동자, 수려한 외모를 가진 은인.
“혹시…… 애셔 님이십니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가 몸을 세우더니 다시 인사를 전했다, 보다 정중하게.
“제 이름은 콘도르. 콘 상회의 브리엔테 지부를 맡고 있습니다. 제 사촌을 구해 준 은인을 몰라보다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괜찮-”
“아, 이런! 은인을 이렇게 오래 세워 두면 안 되는데. 자, 따라오시지요. 애셔 님을 위해 최고급 차와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후에 원하시는 상품이 무엇인지 차차 얘기를 나눠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콘라드의 말마따나 분명 손해 볼 일은 없을 겁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태생부터 상인 집안인 콘라드가의 가훈.
이 정도의 대접은 당연하고 또 당연했다.
‘콘라드의 가족이 분명하군,’
외모는 별개로, 말이 많은 게 아주 판박이다.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이고 콘도르를 따라 콘 상회의 특별 접대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