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운명 (3)
마도에 이른 5위계 마법사이자 연금술, 마법진 등 다양한 마법 분야와 점성술에 뛰어난 지식을 겸비하고 있는 현인(賢人) 하르칸 다제스트.
수십 년 전, 그는 주변 마법사들의 우상이었고, 동료들에겐 굳건한 버팀목이었다. 거기다 인성도 좋아 사람들을 돕는 걸 좋아했었기에, 시민들도 하르칸을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인해 한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마법에 깃든 신비를 탐구하고 미지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지극히 마법사스러운 집단. 하르칸을 포함한 최초 구성원들은 이를 ‘블랙 아워’라고 명명했다.
“순수한 동기였지. 우린 그저 마법을 보다 깊게 연구하고 싶어 모인 마법사들이었으니. 그런데 하나둘씩 가입하는 마법사가 점차 늘더니, 걷잡을 수가 없더군.”
8명이었던 작은 모임은 몇 년 뒤, 수많은 국가와 권력 집단에게서 주목을 받았다.
하르칸의 친구이자 블랙 아워의 수장인, 6위계 마법사가 이끄는 수백 명의 마법사 집단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작은 국가와 전면전을 펼치더라도 능히 압도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수장은 결코 블랙 아워를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하는 일이 많아졌을 뿐, 본래의 목적을 잃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가 한 제자, 다히트 웨스로엘을 받기 전까지는.
“다히트…… 놈은 영리했네. 철저하게 발톱을 숨기고 순진한 마법사를 연기했지. 우리는 품에 들인 게 뱀 새끼인 줄도 모르고 정성을 다해 길렀네.”
다히트의 성장 한계는 무려 7위계. 수장과 하르칸을 비롯한 마도사들은 그에게 자신들이 쌓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렇게 최초의 구성원들이 중년을 넘어 노년에 다다랐을 때, 다히트는 무려 6위계에 도달했고 차기 수장의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놈은 애초부터 블랙 아워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지. 지금의 블랙 아워가 아닌, 오로지 자신만의 블랙 아워를 손에 넣고자 하는 게 목적이었네.”
현 수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한 전날.
다히트는 암암리에 모은 부하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퇴임식에 참석하러 온 여러 마법사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살해당했다.
뒤늦게 알아챈 최초의 구성원들이 진압에 나섰으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다히트는 이미 7위계에 도달한 초월자였으며, 그에게 동조한 이는 최초의 구성원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참혹했네. 블랙 아워의 수장은 결국 다히트에게 당해 시체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고, 나는 놈에게 마력회로가 난자당했으며, 다른 동료들은 죽거나 중상을 입었지.”
그러나 수장이 비밀리에 만든 탈출구 덕분에 끊겨 가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르칸을 비롯한, 살아남은 최초의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블랙 아워의 추적을 피했다.
무려 수십 년을 지나 지금까지.
“그 후 블랙 아워를 완전히 장악한 다히트는 지금의 블랙 아워를 만들었네.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온갖 사악한 마법사들이 득실거리는 소굴로 만들었지. 그저 마법을 연구하던 모임이 세상에 군림하기 위한 수단으로 뒤바뀐 걸세.”
“운명을 예견해 피할 수는 없었습니까?”
“내가 볼 수 있는 건 운명의 극히 일부분일세,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그래서 나는 기다리기로 했네. 내가 가진 운명의 마지막 변화…… 바로 자네를 말이지.”
쿨럭, 쿨럭!
하르칸이 급히 입을 막았지만 출혈이 너무 극심했다. 손아귀 사이에서 흘러넘친 핏물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없다. 변화가 찾아왔으니 곧 죽을 터. 아마 오늘조차 넘기기 힘들 것이다.
하르칸이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 반지는 오래전에 내가 잃어버린 물건일세. 한 쌍으로 이뤄진 반지였지. 이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제 기능을 낼 수는 없지만…… 그게 자네의 손에 들어가 이렇게 우리가 만났으니, 그야말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러니 부탁하겠네. 다히트와 그에게 동조한 최초의 구성원들을 막아 주게……! 우리가 만든 블랙 아워로 세상을 짓밟지 않도록……!”
수많은 감정이 감긴 절절한 목소리.
베르덴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가는 뭡니까?”
그러자 하르칸이 웃음을 터뜨렸다.
“냉철하군. 내 유언을 남기기에 더할 나위 없어. 그래, 당연히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겠네. 그들을 막아 준다고 약속만 해 준다면, 그 한마디만 해 준다면…… 내가 일궈 온 모든 것을 넘겨주도록 하겠네.”
마법사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들을.
* * *
‘복수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라…….’
잘 이해하기 어려운 신념이다.
베르덴이 바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였으니까.
베르덴이 무심히 하르칸을 주시했다.
동정심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런 정을 느낄 정도로 감성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르칸의 제안에는 관심이 있었다.
마도에 이른 마법사가 저리도 자신 있게 말하는 대가가 대체 무엇일까.
수상하다고 그냥 무시해 버릴 베르덴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얻어 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일단 뭔지 확인이라도 해 보자…… 하는 생각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동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르칸이 당황한 것으로 봐 그가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베르덴이 곧장 마력감지를 펼쳤다.
‘마법?’
상당한 위력의 마법들이 숲을 헤집고 있다.
일대가 불에 타고 무너지며 은폐 마법진에마저 영향을 줄 정도. 이윽고 숲의 태반이 박살 나며 마법진이 기동을 중지했다.
“여기 누구 올 사람 있습니까?”
“전혀. 살아남은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네. 이런 식으로 올 이유도 없고. 그렇다는 건…….”
블랙 아워.
그때, 베르덴의 뇌리에 마을에서 스치듯 마주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세 명이 떠올랐다.
직감에 불과했지만 확신에 가깝기도 했다.
‘하필이면 지금인가.’
수십 년간 도망쳤던 하르칸을 왜 이제 와서 블랙 아워가 찾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닥뜨리게 된다면 분명 하르칸뿐만 아니라 베르덴조차 죽이려 들겠지.
“……싸울 생각인가?”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프를 든 그가 마력을 끌어올려, 적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동굴 입구에서 들리는 발소리.
곧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세 명의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블랙 아워가 말없이 베르덴과 하르칸을 주시했다.
카르딘이 양피지를 꺼내 하르칸의 얼굴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늙긴 했지만 본인이 맞는 것 같군. 한 명이 더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지만.”
“어머? 저 사람, 마을에서 본 잘생긴 남자 아니야? 꺄아! 어떡해, 이거 진짜 인연 아니야? 아니, 운명인가?”
“시끄럽다, 페리스. 사심을 채우는 건 모든 일을 끝낸 후부터다.”
페리스를 쏘아붙인 카르딘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창백한 피부와 정돈된 몸가짐. 그러나 결코 숨길 수 없는 추악한 악의가 시선에서 느껴졌다.
“확인하지. 블랙 아워의 배신자, 하르칸 다제스트가 맞나?”
“배신자? 다히트가 그렇게 말하더냐?”
“존칭을 붙여라.”
카르딘의 마력이 주위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일반인은 감히 숨도 쉬지 못할 압력이었으나 다 죽어 가는 하르칸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물론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저놈은 왜 멀쩡하지?’
무표정하게 서 있는 베르덴. 마법사로 보이나, 나이는 카르딘보다 10살은 더 어려 보였다.
설마 4위계의 마력 위압에 저리 쉽게 저항했을 리는 없을 테고, 특수한 마법 물품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런 의문도 잠시, 하르칸이 말했다.
“존칭은 무슨. 그놈을 키운 사람 중 하나가 나다. 그게 평생의 후회로 남을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여긴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너희 같은 놈들 따위가 눈치챌 정도로, 허술하게 만든 마법진이 아닌데.”
“다히트 님 앞에는, 뭐든 한낱 잡술일 뿐이지.”
카르딘이 손짓하자, 첸이 주머니에서 작은 나침반을 건넸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작은 마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력추적. 블랙 아워에서 생산 중인 ‘인공 아티팩트’다. 여기에 마석을 넣으면 지침이 그 안에 담긴 마력의 주인을 가리키지. 아직 미완성이라 거리에 따른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성능은 보다시피.”
다히트가 하르칸의 마력회로를 망가뜨릴 때 채취했던 마력.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추적이 가능한 걸 보면 상당한 성능이다.
베르덴이 남몰래 눈을 빛냈다.
‘갖고 싶군.’
그런 생각을 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수적으로 열세하기에 당장이라도 선제공격을 하는 게 유리했지만, 그러기엔 상대가 말하는 정보가 흥미롭고 중요해 보인다.
베르덴은 한 발짝 물러나 대화를 지켜봤다.
“하르칸 다제스트. 이렇듯 다히트 님은 언제고 너를 찾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지. 그분께선 패배자의 발버둥 따윈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존재이니.”
“그런데 이제 와 나를 찾는 이유가 뭐지? 갑자기 잠자리가 무서워졌다고 하더냐?”
“……본론으로 들어가지.”
카르딘이 나침반을 첸에게 돌려줬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마탑이 무너졌다.”
“……뭐?”
“말 그대로다. 보헤미른 마탑의 동력원이 폭주해 탑 전체가 기동을 정지했지. 그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은 고농도의 마력에 노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10개의 마탑 중 하나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경악을 넘어 공포로 다가왔다.
주변 국가나 마탑까지 소식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각국의 고위층들이 세계적으로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숨길 정도로.
아마 그 소식이 리비안트 공국까지 닿으려면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야 하겠지. 보헤미른 마탑이 어느 정도 전력을 회복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카르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엔 짙은 분노가 가득했다.
“어떤 개같은 새끼가, 그 모든 걸 블랙 아워에게 뒤집어씌웠다……!”
그 탓에 마탑들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보헤미른 마탑주가 이끄는 척살대가 부순 지부만 해도 벌써 여섯 곳이 넘어간다.
난데없이 공격을 받은 블랙 아워는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철수해야만 했다.
굴욕이었다. 그리고 억울했다.
아무리 사악한 마법사가 많은 집단이라지만, 하지도 않은 일에 죽임을 당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히트 님은 이걸, 블랙 아워를 적대하는 자들이 꾸민 일이라고 확신하셨다. 그래서 정보를 모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추적했지. 그중 하나가 너다, 하르칸 다제스트.”
사실 여기엔 하르칸과 같은 수준의 5위계 마법사가 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보헤미른 마탑주가 날뛰는 탓에 전력을 빼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히트 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르칸은 죽어 가고 있어, 손쉽게 처리할 수는 있겠지만.
“묻겠다, 배신자. 보헤미른 마탑의 붕괴와 너는 관계가 있나?”
“없다. 그럴 만한 힘이 있었으면 진즉에 네놈들에게 썼겠지.”
카르딘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아무리 봐도 그런 짓을 벌이기엔 하르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고, 마탑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놀란 듯 보이기도 했으니.
어차피 범인이든 아니든 죽일 생각이니 딱히 관계는 없지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베르덴이 눈을 깜빡였다.
‘저거 내 얘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