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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39화 (39/366)

39화 운명 (2)

마을에 대해 알고 싶다면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특히 여러 사람과 자주 맞닥뜨리는 식당이나 여관의 종업원이 그렇다.

식사를 마친 베르덴이 한가히 시간을 때우고 있는 직원을 불렀다.

“네, 손님. 더 주문할 거 있으세요?”

“이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 누굽니까?”

베르덴이 10만 엘크짜리 지폐 한 장을 식탁 위에 올렸다.

무려 직원의 반달 치 월급에 준하는 거금. 팁이라고 치기엔 너무도 많은 돈이었지만, 이미 직원의 눈은 돌아간 지 오래였다.

고용주에게 들킬세라 냉큼 돈을 주머니에 넣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쪽 외곽에 브랜 아저씨라고 계시는데, 뛰어난 사냥꾼이기도 하지만 술꾼으로도 유명해요. 특히 도수가 높은 걸 좋아하세요.”

술꾼이라.

돈을 준다고 해도 거절할 수도 있으니, 기호 식품으로 호의를 사는 편이 좋겠지. 쓸 만한 정보였다.

베르덴이 다시 한번 같은 지폐를 꺼내 직원 앞에 보였다.

“가장 좋은 술을 파는 곳이 어디죠?”

* * *

과일 향이 첨가된 보드카.

마을에서 파는 것치곤 꽤나 비싸긴 했지만, 이런 데 돈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돈이란 쓰라고 있는 거니까. 그게 반드시 써야 할 때라면 더더욱.

돈은 결국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순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베르덴이기에 그에게 구두쇠 같은 면은 없었다. 그렇다고 물 쓰듯 낭비하는 성격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이건 투자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넉넉히 보드카 두 병을 사 외곽으로 향했다.

다른 건물들과 떨어져 있는 낡은 집. 주위에 동물 가죽을 말리고 있는 걸 보아 사냥꾼의 집이 확실했다.

다가가 문을 두들겼다.

“……누구요?”

“의뢰를 하러 왔습니다.”

“의뢰?”

문이 열리자 미약한 술 냄새와 특유의 짐승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불쑥 얼굴을 내민 브랜이 베르덴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봤다.

“처음 보는데…… 그래서 내게 무슨 볼일이요?”

“바르드산맥을 안내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마을에서 제일 뛰어난 사냥꾼이라더군요.”

“뭐, 그렇긴 합디다. 이래 봬도 한때 모험가 출신이었으니, 야생동물 잡는 건 쉬운 일이지. 그런데 산맥을 안내해 달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찾을 게 있습니다.”

물론 찾는 게 무엇인지 말은 하지 않았다. 그야 베르덴도 모르니까.

브랜이 턱을 쓸며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소. 그런데 보수는 뭘로 줄 거요?”

베르덴이 봉투를 열어 보드카를 보여 줬다.

눈을 동그랗게 뜬 브랜이 값비싼 술에 시선을 멈추곤, 침을 꼴깍 삼켰다.

“선금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수도 따로 챙겨 드리죠.”

이게 선금? 그리고 보수도 더 챙겨 준다고?

보드카를 받은 브랜이 문을 쾅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가죽옷부터 시작해, 활과 화살까지 완전무장을 한 브랜이 밖으로 나왔다.

“당장 가시죠, 손님.”

말투까지 바뀌었다.

역시 돈은 협상에 있어 최고의 수단이었다.

* * *

반지가 가리킨 장소가 대체 어디 있을까.

간단한 곳에 숨겨져 있지는 않겠지. 만약 그렇다면 산을 이 잡듯이 돌아다니는 사냥꾼들이 진즉에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브랜의 말로는, 이곳에서 10년 넘게 사냥꾼 짓을 하고 있는데, 딱히 뭔가 특별한 것이 발견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럼 먼저 동굴과 절벽부터 확인한다.’

아무리 사냥꾼이라고 해도 절벽을 오르진 않으니까. 동굴 안에 어떠한 장치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었고.

자신이 손수 제작한 지도를 가지고 온 브랜이 특정되는 장소를 몇 짚었다. 의욕이 넘치는 사냥꾼을 앞세우고 베르덴이 뒤따랐다.

모험가 출신이란 게 진짜인지, 가파른 곳을 올라도 그리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브랜이 살짝 뒤를 돌아봤다.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고 있음에도 베르덴은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허공에 몸을 띄운 채로.

‘마법사였다니. 비행을 쓸 정도면 최소 3위계 이상인가?’

스태프를 떡하니 매고 있는데, 신비스러운 외모와 보드카 때문에 정신이 팔려 못 알아봤다.

나이도 젊고, 외모도 좋고 재능까지 타고나다니. 딱히 질투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근처에서 멧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옆으로 화살을 겨누었는데, 어느새 날아간 바람의 칼날이 멧돼지의 목을 잘랐다. 눈을 깜빡이는 브랜에게 베르덴이 말했다.

“주변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길 안내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앗, 넵.”

브랜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고블린과 짐승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곧 사라졌다. 전 동 등급 모험가인 브랜의 태도는 갈수록 더 정중해졌다.

* * *

베르덴과 브랜의 동행은 며칠간 이어졌다.

아침에 출발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강행군. 바르드산맥에 있는, 이렇다 할 동굴과 절벽은 대부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노련한 사냥꾼인 브랜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틈틈이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며 조는 게,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며칠 쉬어야 하나. 아니면 다른 사냥꾼을 고용하든가.’

마력감지를 넓게 펼쳐도 잡히는 게 없으니, 원.

반지를 끼고 움직여 봐도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 찾을 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다.

“여기 잠시 계시죠.”

브랜에게 말을 남긴 베르덴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라간 그가 산맥을 굽어봤다.

유심히 살펴봤지만 역시나 전부 나무들뿐이었다.

‘……확 뒤엎어 버리면 반응이 오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자신은 그 정도로 미친 마법사가 아니었다.

고개를 저은 베르덴이 한숨을 내쉬었는데…….

‘잠깐.’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연두색 숲 사이사이에 몸을 숨기고 짙은 녹색을 띠고 있는 나무들이. 그것 자체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지만 배치 간격이 눈에 익숙했다.

허공에 대고 마력의 실로 나무들의 위치를 어림잡아 하나씩 이어 봤다.

“……은폐 마법진.”

그것도 자연과 완전히 일체화되는 고등급의 것이었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틀렸다.

여기 산맥과 산맥 사이에 있는 숲 전체가 반지가 가리키는 장소였다.

‘이렇게 거대한 마법진이라니.’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보헤미른 마탑주라고 해도 혼자서 작업한다면 최소 2주 이상은 걸릴 법한 규모였다.

지상으로 내려간 베르덴이 브랜에게 말했다.

“찾았습니다.”

“……예?”

“여기 추가 보수입니다. 전 볼일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시죠.”

50만 엘크라는 돈을 받은 브랜.

뭔가 개운치 않았지만 고용주가 찾았다고 했으니 이 지옥 같은 길 안내는 끝이라는 소리다. 당장 집에 가서 술이나 마시며 잠이나 잘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작별 인사를 건넨 브랜이 쏜살같이 사라지고, 베르덴은 마법진의 중심으로 향했다.

짙은 녹색 나뭇잎을 지닌 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기가 요추인가.”

확신한 베르덴이 가볍게 손을 풀고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아무리 마법진에 대해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베르덴조차 긴장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도중에 잘못되면 이 숲 전체를 갈아엎지 않는 이상, 영영 마법진을 파훼할 수 없다.

‘예상 시간은 1시간.’

마법진을 파고드는 한 줄기 마력.

베르덴이 작업을 시작했다.

* * *

잠에서 깬 하르칸이 낡은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갈수록 몸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다.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겨 기절하듯 잠들고, 눈을 뜨면 격통이 먼저 반겨 온다.

비척거리며 책상 앞으로 향했다. 직접 제조한 포션을 잡아, 단번에 들이켜고 나서야 고통이 잦아들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약을 복용했음에도 손 떨림이 가라앉지 않는다.

더 이상 몸이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견뎌라, 하르칸.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니까…….’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방을 나섰다. 천장이 없는 넓은 공간. 언제나 그랬듯 소파에 몸을 누이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운명을 읽을 수 있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가 수십 년간 반복해 왔던 일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제와 달랐다.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잿빛 머리와 청명한 눈동자를 지닌 사내가 입구에 서 있었다.

“무, 무슨?!”

어떻게 침입자가! 왜 마법진이 반응하지 않았지?!

하르칸이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회로가 망가져 본래의 실력을 낼 수는 없었지만, 방심한 상대를 같이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정도는 되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하르칸이 소리쳤다.

“네놈……! 블랙 아워에서 왔느냐?!”

‘블랙 아워? 그 범죄자 집단이 갑자기 왜 나오지?’

고개를 갸웃거린 베르덴이 손에 낀 반지를 보여 줬다.

“이 반지를 따라 왔습니다.”

“반지……?”

설마.

하르칸의 시선이 베르덴의 손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도 눈에 익은 반지가 껴져 있었다. 옛날, 자신이 잃어버린 한 쌍의 반지 중 하나인 ‘크레센트’.

이걸 들고 찾아왔다는 것은 하나의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드디어……!”

울컥! 긴장이 풀리자 하르칸이 피를 쏟아 내며 쓰러졌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베르덴이 드물게 당황했다.

* * *

잠깐 의식을 잃었던 하르칸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쓰러진 지 10초도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운명이 찾아왔는데 골골댈 시간 따위 없다. 그가 소파를 짚고 힘겹게 올라왔다.

“……부축해 주면 안 되겠나?”

“설명부터 해 주면 부축해 드리죠.”

다짜고짜 자신을 보고 마력을 끌어올린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순 없는 노릇이니까. 거기다 거대한 은폐 마법진에 숨은 노인이라니.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설령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라도.

베르덴의 단호한 대답에 하르칸이 피식 웃었다.

“조심스럽군. 아주 마음에 들어.”

겨우 소파에 몸을 뉜 하르칸이 의자를 가리켰다.

베르덴이 염력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 반지, 자네의 의문을 풀어 주기 전에…… 하나 묻겠네. 어떻게 은폐 마법진을 통과했지? 동굴 입구에도 여러 마법진이 있었는데 말이야.”

“전부 파훼했습니다.”

담담히 말했지만 베르덴도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1시간이나 걸려 은폐 마법진에 작은 구멍을 내 통과했더니, 입구에는 살상력이 높은 마법진이 산재해 있었다.

장장 4시간. 덕분에 빌어먹을 마법진 파훼가 전보다 더 능숙해졌다.

“그걸 전부 없애 버렸다고……?”

그 정도의 마법진에 대한 지식을 저 나이에 쌓았단 말인가?

아, 하르칸은 확신했다. 역시 저 재능 넘치는 사내, 마법사가 그 운명이라는 것을. 하르칸은 마음속 깊이 하늘에 감사했다.

“대답했으니 저도 묻겠습니다. 이 반지는 대체 뭡니까?”

“운명이지. 서로 일면식조차 없는 자네와 나를 연결해 준 운명.”

작게 웃은 하르칸이 고개를 들어 베르덴과 마주했다.

“내 이야기 좀 들어 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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