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운명 (1)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예언가라니. 특이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로 특이한 조합이군.’
베르덴은 가만히 노인의 행동을 관찰했다.
소정의 복채를 받고는 카드를 잘 섞어 위에서부터 한 장씩 내려놓으며 눈앞에 있는 사람의 운명을 예견하고 나름의 조언을 내린다. 그리고 그 조언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사람 본인이 결정하고.
그렇게 결국 본인의 운명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미신이지.’
베르덴은 운명론을 믿지 않았다.
모든 일은 정해진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니. 그것은 그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마탑에서 살아남아 끝내 역천을 이룬 그 과정들. 그 노력은, 그 절박함은. 결코 운명이었다는 말로는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흥미를 잃은 베르덴이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던 그때, 소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혹시 할머니께 점 보러 오셨어요?”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 봐요! 저희 할머니 진짜 잘 맞혀요! 할머니!”
“아, 그때 그 마법사님이시군요. 덕분에 아이샤가 아이스크림을 잘 먹었답니다. 그 답례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점을 좀 봐 드리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모였다.
차례 기다린다고 빨리 하라는 눈초리였다. 아이샤도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이고.
베르덴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카드를 섞었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한 장씩, 총 세 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첫 번째는 사신(역).
두 번째는 신(역).
세 번째는 인간(역).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서야 노인이 베르덴에게 말했다.
“지금처럼만 살면 된다는군요. 아주 좋은 점괘입니다.”
“……그렇군요.”
어차피 믿을 생각은 없지만.
베르덴은 대충 감사하다고 전한 뒤, 제 갈 길을 갔다.
노인의 점은 계속 이어져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아이샤가 자리를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노인에게 물었다.
“아, 할머니. 그 잘생긴 마법사님 점괘 말인데요. 정말로 그 뜻이 맞아요? 저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라서요.”
“그럼 당연하지. 할머니 솜씨가 어떤지는 아이샤가 잘 알고 있잖니?”
“네, 알고 있어요!”
아이샤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노인은 그런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이 듬뿍 담긴 손길이면서도 미안함이 담겨 있는 따스함이었다.
‘미안하다, 아이샤. 내가 거짓말을 했구나.’
노인은 마법사의 점괘를 떠올렸다.
사신은 죽음을, 신은 탄생을, 인간은 생명을 뜻한다.
거꾸로 된 죽음.
거꾸로 된 탄생.
거꾸로 된 생명.
즉, 그것은 혼돈이다.
거기에 엿볼 수 있는 미래 같은 게 존재할 리 없다. 본인의 운명에서 벗어났으니 그 앞은 무엇도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의 세계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질 수 있고.
모든 것을 손에 넣어 군림할 수 있다.
‘신이시여,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노인은 잿빛 마법사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 그가 가진 가능성이 세상을 어둡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며.
* * *
재료를 구해 여관으로 돌아온 베르덴은 반지를 수리하는 데 시간을 쏟아부었다.
마법 물품 감정은 많이 해 봤지만, 제작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게 전부였다. 전문가도 어려워하는 복원을 실패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도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 정도만 알자며 붙잡고 매달렸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수리에 진전은 전혀 없었다.
‘며칠 더 해 보고 안 되면 전문가를 찾는 게 좋겠어.’
머리도 식힐 겸 창가로 가서 바람을 쐬었다.
하늘을 보니 어두운 하늘에는 작은 별빛이 반짝거렸고, 구름 사이에서 초승달이 빛나고 있었다.
‘꽤 좋은 풍경이군.’
충분히 밤공기를 즐기고 다시 작업에 들어가려던 순간.
‘빛……?’
반지에서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들어서 확인해 보니 가운데 있는 문양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작용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가로 한 발짝 다가서자 빛이 한층 더 밝게 발광했다.
“달빛인가?”
곧바로 초승달에 반지를 비추었다.
그러자 새하얀 빛에서 달빛과 같은 은은한 회색빛으로 변했다. 신기한 현상이긴 했으나 그 이후로 변화는 없었다.
‘껴 볼까?’
본디 반지는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니.
조심스레 검지에 착용하자 보석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커져 가는 달빛이, 이내 환하게 터져 나오며 방 안을 조사했다.
“……지도?”
베르덴 앞에 나타난 건 빛으로 만들어진 지도였다.
그것도 얼마 전에 본 듯한 기억이 있는, 눈에 익은 지형의.
‘공국의 지도로 보이는데.’
영지나 도시는 없었지만, 산맥과 물길 등 각 지형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표기되어 있다. 주변 환경만 알 수 있다면 자신이 대충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이런 걸 반지 안에 새긴 거지?
이 정도의 세공술이 가미된 장신구는 마탑의 보물고를 뒤져 봐도 한 손 안에 들 것이다. 그러나 베르덴이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지도 우측 최하단.
산맥 사이에 보이는 작은 불빛이 점멸했다.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지도 전체를 둘러봤지만 이런 불빛은 오직 한 곳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
베르덴은 말없이 지도를 바라봤다.
혹여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 몰라 반지를 흔들어 보거나, 문질러 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동이 트기 시작했다.
초승달은 구름 뒤에 모습을 감췄다. 달빛이 사라지자 반지의 빛이 서서히 꺼져 갔고, 지도는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베르덴의 기억 속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 불빛이 뭘 의미하는지, 그곳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릴 베르덴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호기심이 강한 족속이며, 미지란 호기심으로 가득 찬 것이니. 설령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법사인 이상 갈 수밖에 없다.
리비안트 공국, 바르드산맥.
베르덴의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 * *
천장이 뻥 뚫린 동굴 속.
노인, 하르칸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저 별은 무엇이냐.’
하르칸은 별자리를 보고 생명이 가진 운명의 조각을 예견해 왔다.
그가 읽은 미래 중 틀린 것은 없었지만, 그렇기에 운명에 굴복해 왔다. 무슨 짓을 하든 피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정체불명의 별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환하게 빛나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 별은 다른 별에게까지 영향을 줘 수많은 운명을 비틀었다.
진즉에 떨어졌어야 별이 여전히 남아 있고, 사라지지 않았어야 할 운명이 사라졌다.
처음 보는 현상에 하르칸은 두려움을 품었다.
하늘을 거역하는 역천의 별이라니.
“이래서는…….”
쿨럭, 쿨럭! 검붉은 피가 입에서 쏟아졌다.
하르칸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운명의 끝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일궈 온 모든 것을 넘겨줄 사람을 찾는 것. 시간이 촉박했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운명에 단 한 번의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정해져 있었으니까.
물론 그것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르칸은 그 변화가 자신의 염원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부디 저 별이 내 운명을 비틀지 말기를.’
노인은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다.
우리가 만든 것들이 무참하게 세상을 짓밟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에.
* * *
베르덴은 조용히 코헨을 떠났다.
반지가 가리키는 곳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에 굳이 페일에게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정보상인 이상 베르덴의 정보를 판매할 가능성이 있었으니.
코헨에서 바르드산맥까지.
그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베르덴은 비행으로 갈 것을 포기하고 장거리 마차를 하나 고용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었지만 예산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리고 일부를 현금으로 뽑아 따로 품속에 챙겼다.
‘산맥 아래엔 도시가 없다고 했으니, 당연히 은행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중간중간 말을 쉬게 하며 약 3주 만에 변방 도시에 도착했고. 거기서 또 3일을 날아 바르드산맥 아래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기나긴 여행이었다. 피로를 느끼며 마을 안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열악하지는 않군.’
동물 모피를 가득 실은 마차가 고용한 용병들과 함께 마을 밖으로 나갔다.
산맥 바로 아래라 사냥꾼이 많은 건가? 귀족 중엔 모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사업을 잘만 벌이면 마을 하나 번창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지.
‘적당히 입맛에 맞는 음식점이 있으면 좋겠는데.’
베르덴이 두리번거리며 마을을 거닐었다.
먼저 식사를 한 뒤, 산맥 지리를 잘 아는 사냥꾼을 고용할 생각이다. 반지가 가리킨 장소는 이 산맥일 뿐, 어디라고 콕 집지는 않았으니까.
혼자서 무턱대고 산맥 전체를 뒤졌다간 몇 개월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맞은편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걸어왔다.
스쳐 지나가며 서로가 눈을 마주했는데, 이렇다 할 마찰 없이 서로 갈 길을 갔다.
‘……수상한데?’
어느 모로 보나 이 마을과 맞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잠깐 마주친 시선은 미약한 한기를 띠고 있기도 했고, 순간 불쾌감이 들 정도로 끈적한 눈빛이 베르덴에게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베르덴은 곧 흥미를 끊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오로지 반지가 가리킨 장소에 몰두해 있었으니까. 쓸데없는 데 시간을 쓸 때가 아니었다.
베르덴은 자리에 앉아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 * *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쓴 여자, 페리스가 꺅꺅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 앞니로 입술을 짓씹으며, 부끄러운 듯 자신의 볼을 부여잡은 페리스는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여인과도 같았다.
“야, 야. 아까 그 남자 봤어? 엄청 잘생겼던데?”
“잘생기긴 무슨. 좀 반반한 거지.”
“저게 좀 반반한 거면 첸, 넌 그냥 쓰레기야. 아, 그나저나 어떡하지? 내 컬렉션에 무조건 넣고 싶은데. 카르딘, 나 잠깐만 갔다 오면 안 될까? 금방 갔다 올게, 응?”
페리스가 깍지를 끼고 아양을 떨었다.
그녀는 지나가던 사람이 고개를 돌릴 만큼 귀여운 외모였지만, 카르딘은 꿈쩍도 안 했다.
“시끄럽다, 페리스. 일을 끝내기 전에 개인행동은 불허한다.”
“그럼 일을 끝내면? 그 하르칸이라는 배신자만 죽이면 가도 돼?”
“그땐 상관없겠지. 이런 곳에서 사람 하나 없어졌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때, 옆 골목에서 술에 취한 사내와 마주쳤다.
얘기를 들은 건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들으라고 하는 거였으니.
사람을 죽일 명분이 필요했으니까.
“첸.”
촤아악!
염력으로 날린 단검에 사내의 목이 뎅강 떨어졌다. 그리고 페리스가 손을 튕기자 화염에 휩싸여 시체가 타올랐다.
잠깐 사이에 사람이 있던 흔적은 사라지고, 골목에는 검은 재만이 남았다.
카르딘이 바람을 일으켜 재를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살인의 쾌락에 셋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로브가 펄럭이며 가려져 있던 손목이 드러났다.
역삼각형과 그 안에 담긴 섬뜩한 시선.
죽음의 마법사 집단, ‘블랙 아워’의 그림자가 바르드산맥에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