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새로운 의뢰 (1)
토벌을 끝낸 후, 베르덴은 언제나 해 왔던 훈련을 하며 느긋이 시간을 보냈다.
아직 페일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기에 보수는 받지 못했다. 딱히 불안하거나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로어 울프를 아주 깔끔하게 잡아 냈으니.
페일이 말한 증명에 충분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코헨에 온 지 6일이 지났다.
베르덴은 대장장이에게 향했다. 곧 손에 들어올 마흐바트의 가죽 장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법사에게 새롭고 귀중한 장비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대장간 안으로 들어서자, 대장장이가 우걱우걱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베르덴을 본 그가 앞치마로 입가를 닦아 냈다.
“딱 좋은 때에 오셨군. 마침 밥도 다 먹었는데. 이쪽으로 오슈.”
대장장이를 뒤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사가 입을 법한 풀 플레이트를 비롯한 방어구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대장장이가 그중 한 전시대를 가리켰다.
남색의 더블 브레스트 조끼와 가죽 바지. 베르덴이 요구한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다 보니 힘깨나 썼소. 가죽이긴 하나 나름대로 신축성이 뛰어나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을 거요. 두께가 얇은 게 약간 흠이긴 하지만…….”
대장장이가 근처에서 검을 하나 주워 들었다.
그러곤 조끼를 향해 힘껏 내질렀다. 하지만 관통하기는커녕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이 정도는 가볍게 막을 수 있지. 완충제 역할도 톡톡히 하고. 마법이 아니고서야, 웬만해선 손상되지 않을 거요. 물에 젖었을 때 잘 말려 주기만 하면 자식이나 손자에게 물려줄 수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암.”
확실히 대장장이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결과물이다.
소재도 소재긴 하지만, 전문가의 솜씨가 장점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거라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베르덴은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듭니다. 다행히 제가 사람을 제대로 고른 모양이군요.”
“아하하, 거 낯부끄럽게. 아, 그런데 반지 쪽에 문제가 좀 있소.”
문제?
“여기. 작은 홈 보이시오? 이 안쪽에도 녹이 심하게 생겨서 벗겨 내는데, 자세히 보니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소. 뭐, 그냥 디자인이 그런 걸지도 모르는데, 내 경험상 마법 물품의 일종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일단 손님한테 물어보려고 기다렸소.”
베르덴이 반지를 건네받았다.
시각을 강화해서 보니 일부가 떨어져 나간, 별 모양의 문양이 보였다.
<감정>
반지의 구조가 읽혔다.
익숙한 패턴이 언뜻 보이는 걸 보아 마법 물품임은 확실해 보였으나,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상된 곳이 너무 많았다.
‘흥미가 생기는데.’
그냥 오래된 반지인 줄 알았는데 마법 물품이라니.
“이 반지, 수리할 수 있겠습니까?”
“음, 내가 마법 물품 쪽은 잘 모르긴 하지만…… 거기 문양이나 겉모습 같은 건 어떻게 복원은 할 수 있을 거요. 크기가 워낙 작으니 손이 좀 많이 가긴 하겠지만.”
“그럼 그렇게 해 주시죠. 비용은 전부 지불하겠습니다.”
마법 물품은 완전히 박살 나지 않는 이상, 흔적을 품고 있다.
그 조각난 흔적을 잇다 보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드물게 제 모습을 되찾을 수도 있었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나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알겠소.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넉넉잡아 2주 뒤에나 한번 들르는 게 좋겠소. 아예 완성 못 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
“알겠습니다.”
다시 반지를 맡긴 뒤, 베르덴은 값을 지불하고 마흐바트의 가죽옷을 챙겼다.
입어 보니 무게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여러모로 편한 느낌이 들었다. 거울을 보니 짙은 남색의 로브와도 꽤 잘 어울렸다.
평소에 입고 다녀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괜찮군.”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여관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바깥에 볼일은 없으니, 나머지는 마력회로를 확장하기 위한 훈련을 할 생각이었다. 마법사에게 꾸준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고 한 발 내디딘 순간.
“앗!”
갑자기 안쪽에서 어린 소녀가 나오더니 베르덴과 부딪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방금 막 입은 마흐바트의 가죽옷을 향해 떨어졌다.
베르덴이 재빠르게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염력으로 아이스크림을 띄우고, 넘어지려던 소녀를 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아주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내려와 다시 소녀에 손에 쥐였다. 옆에 있던 한 노인이 베르덴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제 손녀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아이샤, 어서 마법사님께 사과드리렴.”
“네, 할머니. 아이스크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어허, 부딪힌 것부터 사과드려야지.”
천진난만한 소녀와 낡고 해진 로브를 두른 노인. 코헨의 삭막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꽤나 특이한 조합이었다.
아마 도시 밖에서 온 외부인인 것 같은데, 베르덴이 관심 가질 일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베르덴은 짧게 대답하곤 승강기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 * *
페일에게서 보수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빈민가 아래에 있는 지하 주점으로 향했다.
“여기 로어 울프 토벌에 대한 보수입니다.”
철창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
유리 반대편에서 페일이 거액의 현금을 베르덴에게 전달했다.
의뢰 주선비 등 이것저것 뗄 것 다 떼서 약 2,278만 엘크. 본래 토벌 보수인 780만 엘크의 3배나 되는 금액이었는데, 로어 울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소재를 전부 좋은 품질로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라드란 백작이 굉장히 흡족해하더군요. 잘하셨습니다, 애셔 님.”
페일이 극찬했다.
즉, 그가 운영하는 그레이와 협력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 베르덴은 곧바로 의뢰를 이어 나갔다.
“애셔 님의 등급에서 적당한 걸 고르자면…… 이게 좋겠군요.”
페일이 보여 준 건 현상 수배서였다.
“현상금도 여기서 처리하는 건가?”
“시대의 흐름이죠. 도시가 비대화하면서 자연스레 인구가 증가하고 그와 동시에 범죄자도 늘어나게 되는 법이니. 국가에서 추적하기엔 수가 많고 도시 바깥엔 여러 위험들이 있기에, 그레이에서 의뢰를 통해 처리하기도 한답니다. 공국에서 허락받은 사항이죠.”
도시 바깥으로 도망간 범죄자를 쫓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보 하나 없는 상태에선 더더욱.
그렇기에 정보상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마다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국가에서 추적하는 것보단 이렇게 일을 맡기는 게 효율이 훨씬 더 좋았다.
특히나 페일의 정보망은 독보적이다.
공국 일대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그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속도는 군마나 3위계 마법사를 앞지를 정도.
이 방면에서 페일을 따라올 정보상은 공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베르덴이 물었다.
“생사는 상관없나?”
“가급적 생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편이 귀족들이 더 좋아하는 편이라. 대신 귀찮게 끌고 올 필요 없이 사람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현상범의 위치 정보도 제공해 드리고요.”
그러니까 베르덴은 가서 잡기만 하면 되는 일. 물론 약간의 추적이 필요하긴 할 테지만, 베르덴에겐 문제없었다. 웬만하면 마력감지로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
이미 몇 번이나 해 온 일이다.
의뢰를 수락하자 페일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그렇게 로어 울프 토벌 이후, 세 번의 일을 끝냈다.
페일이 정확한 위치 정보를 주기도 했고, 딱히 이렇다 할 실력을 가진 놈들이 아니었기에 손쉬운 일이었다. 보수는 크지 않았으나, 신용을 쌓아 올리는 데는 적당한 일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의뢰?”
베르덴의 물음에 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셔 님의 일 처리를 검토한 바, 등급을 한 단계 올려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하 5등급에서 4등급으로 오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나야 좋지만…… 너무 이른 게 아닌가?”
겨우 네 개의 의뢰를 해결했을 뿐인데.
그러자 페일이 고개를 저었다.
“의뢰 수도 고려 사항이긴 하나, 그보다 중요한 건 일을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그만큼 애셔 님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죠. 특히 로어 울프 건이 컸습니다. 그리고 애셔 님과 같은 마법사에게 또다시 5등급 의뢰를 맡기기 아깝기도 하고요.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결국 베르덴에게 좋은 일이다.
애써 의문을 더 제기할 이유는 없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그래서 그 새로운 의뢰는?”
“말씀드리기 이전에, 보안이 필요한 안건이라 한번 듣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받으시겠습니까?”
손을 대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가.
보수가 얼마나 되냐고 묻자, 페일이 금액을 써서 베르덴에게 보였다.
“……!”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다.
“어떤 의뢰지?”
“좋습니다. 이 자료를 보시죠.”
페일이 건넨 자료를 허공에 띄워 보기 좋게 나열했다.
유심히 내용을 들여다보는데 대부분 ‘코호트 상회’에 대한 정보였다.
“코호트 상회는 주로 향신료를 취급하는 무역 상회입니다. 리비안트 공국과 에스테리아 왕국을 오가며 이윤을 추구하고 있죠. 사업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고 경쟁력도 딱히 좋은 게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법한 중소 상회라는 것이 제가 내린 평가입니다.”
그런데.
“코호트 상회가 노예 매매에 가담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한때 노예제는 세계적으로 당연한 제도였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빛의 신을 신앙하는 루아스교가 세계 종교에 오르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모독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강경하게 노예제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결국 외교적인 부분에 부딪혀 폐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고작 8년 전의 일이라, 아직까지도 에스티리아 왕국에선 불법 노예 매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코호트 상회는 여기저기서 확보한 인간을 왕국에 노예로 내다 팔고 있었고.
베르덴이 말했다.
“일개 상회가 노예를? 루아스교에서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거기다 리비안트 공왕도 노예 제도를 극도로 혐오하죠.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독립한 이유 중에 하나가 노예제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 뭐가 됐든 이게 높으신 분들의 귀에 들어가면 그냥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주도 문책을 받게 될 테고요.”
“그렇다면…… 의뢰자는 영주 본인이겠군.”
“맞습니다. 의뢰주는 로든마이어 백작. 의뢰 내용은 코호트 상회의 주인인 ‘루튼 코호트’의 생포입니다.”
노예가 운반되는 루트까지 확인된 상황.
백작가는 코호트 상회에 뇌물을 받은 자들을 찾아 비밀리에 구속에 나섰고, 추적을 붙이고 국경에 덫을 놓는 등 노예 마차들을 붙잡기 위해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
어디까지나 보안을 지키는 것이 관건.
루튼 코호트가 낌새를 느끼기도 전에 그 목줄을 잡아 끊어 버리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노예를 실은 마차는 한둘이 아닌 데다가, 서로 따로 움직이고 있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무리하게 병력을 운용해 혼자서 해결하는 것보단, 다른 용병들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전부 놓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엔 애셔 님 혼자가 아닌, ‘로윈 용병단’과 함께 일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근처에는 백작가의 기사가 이끄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예정이죠.”
“기사까지? 아무리 노예 상인을 잡는 거라지만 전력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그 배경에는 총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가 바로 화제성(話題性)입니다.”
정보가 퍼지기 시작한 이상 얼마 안 가 공왕의 귀에 닿을 것이다.
그러니 백작은 보다 요란스럽게 놈들을 처리해서, 본보기 겸 노예 매매를 완전히 근절하는 모습을 공왕에게 어필할 심산이겠지.
로든마이어 백작. 노예를 해방하고, 노예 상인을 처단하다.
그 문장을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오르게 하는 것이 백작의 의도. 정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루튼 코호트가 수년 전에 타국에서 데려온 용병단입니다. 특히 ‘스윈들’이라는 용병단장은 상급 용병 출신인데, 적대하는 용병단을 여럿 몰살한 전적이 있더군요. 같은 상급 용병 또한. 만약 노예 운송에 나서지 않았다면, 상회주 근처를 지키고 있을 겁니다.”
페일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실리주의자입니다. 루튼 코호트를 생포하라고 의뢰를 하긴 했지만, 진짜 목적은 상대의 전력을 분산시킨 뒤, 혼란을 틈타 자신의 병사들로 제압하는 걸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더 피해가 적고 싸게 먹힐 테니까.
만약 페일이 말한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의뢰서에 명시된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맞습니다. 백작이 요구한 건 애셔 님이 루튼 코호트를 생포하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게 보이면 보수를 낮추려고 할 겁니다. 참 능구렁이 같은 귀족이죠.”
결국 백작은 베르덴을 값싼 방패막이로 고용하겠다는 뜻이다.
‘어쩐지 제시한 보수가 많더라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을 경우에 해당하는 얘기.
베르덴이 페일에게 물었다.
“내가 직접 생포해도 문제는 없겠지?”
“예. 제가 장담하건대 의뢰 내용만 지켜 주신다면 어떤 문제도, 압박도 없을 겁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이죠.”
상대는 경험 많은 상급 용병 출신.
아무리 도살자가 추천한 3위계 마법사라 해도 쉽지 않은 상대임은 분명하다. 페일의 판단은 그러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베르덴의 생각은 달랐다.
“위치가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