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언데드 (1)
동이 트고 노란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하는 시간.
성문 앞에 집결한 모험가들과 병사들 앞에 비르온 영주가 서 있었다.
“……사악한 언데드가 영지를 위협한 지 3주나 되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발생한 사상자는 세 자릿수에 이르렀지.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영주가 옆을 가리켰다.
기사단에게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새하얀 의복을 갖춘 성직자들. 이번 언데드 토벌의 주역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분위기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그리고 사람만 한 도끼를 어깨에 멘 갈리아크가 뒤를 이었다.
험상궂은 얼굴은 오우거를 방불케 했다. 그가 베르덴을 보곤 히죽 웃었다.
“선배님, 진짜 싸우시면 안 돼요……!”
“…….”
베르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있는지. 저쪽에서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딱히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저 갈리아크란 자는 공국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강한 인간이었으니까.
맞붙는다면 아마 베르덴도 목숨을 걸어야겠지.
‘그래도 질 생각은 없지만.’
육체를 재구성했을 때, 베르덴은 이미 한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참고 견디는 비굴한 삶은 마탑에 두고 왔다. 역천을 이루고 얻어 낸 재능을 펼치는 것이 다시 태어난 그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되 내던져야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들은 숱한 강자를 발판 삼아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니까. 꿈을 이루려면 베르덴도 같은 과정을 겪어야 한다.
도살자 갈리아크. 놈은 강하지만 결국 발판이다.
서로 생사를 두고 싸우든, 아니면 아무 일 없이 지나치든 상관없다.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경험이 베르덴의 피와 살이 될 테니까.
생각을 마치자 어느새 영주의 연설이 끝나 있었다.
분위기는 긴장되어 있었지만, 성직자와 갈리아크의 존재 덕분에 안심하는 듯한 기색도 보였다.
그때, 호위 기사를 옆에 둔 영주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베르덴에게 다가왔다.
“자네가 모험가 길드에서 의뢰를 요청했다던 마법사로군.”
“애셔라고 합니다.”
“파르나드 반 비르온 남작일세. 뭐, 토벌에 나서기 전에 인사나 나눌까 해서 말이지.”
모험가 길드에서 소개했다는 건 어느 정도 검증된 인물이라는 거다.
모험가도 용병도 아니면서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마법사라……. 소속이 없다는 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영입을 제안할 수 있다는 뜻. 이러한 기회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참, 틈이 안 보이는군.’
비르온 영주는 남작에 불과했지만 투자에 밝았다.
가진 재산만 따지면 공국의 남작들 중엔 으뜸이었다. 이번 갱도에 대한 건은 생각지도 못한 언데드 탓에 일이 틀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영주는 베르덴을 보자마자 영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직감했다.
특출난 마법사를 담기에는 남작령은 너무 초라했으니. 거기다 젊은 나이니 세상에 나가고 싶어 할 터. 훗날 나이가 들어 은퇴할 때가 되면 모를까, 당장 무엇을 제안하든 단칼에 거절할 게 분명했다.
“흠흠. 인사도 끝났으니 가 봐야겠군. 이번 토벌 잘 부탁하네.”
영주가 병사들 쪽으로 향했다. 그는 이번 토벌에 참전하되 최후미에서 총괄 지휘를 맡았다.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영주가 갱도를 개발하는 도중 발생한 사고였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시민들에게 자신이 책임을 진다고 어필하는 것이다.
‘결국 겉치레에 불과하지만.’
베르덴도 자신의 위치로 이동했다.
병사들이 최전선에서 진형을 잡고, 모험가들은 그에 대한 보조를 맡는다. 갱도에 들어가기 전에 힘을 낭비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정오가 다가왔다.
* * *
언데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죽인다.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평원은 검게 물들었다. 그런 죽음 앞에서 지휘관이 소리를 질렀다.
“전군! 돌겨어어어억!”
백 명이 넘어가는 병사가 일제히 전진했다. 각자의 손엔 창이 아닌 철퇴와 방패가 들려 있었다. 영주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구해 온 언데드 전용 무기들이었다.
스켈레톤의 뼈는 둔기에 무력화되었다.
점차 사기가 오르고,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그때, 멀리서 거대한 핏덩이가 나타났다.
희생자들의 육체로 이뤄진 시체 골렘. 무려 4미터가 넘는 크기에 병사들이 압도되었다.
“저, 저걸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난 절대 못 해!”
이런 작은 철퇴로 뭘 어쩌라고.
공포가 전염되자 진열이 흐트러졌다. 누구 하나가 도망치기 시작한다면 순식간에 붕괴될 것이다.
“시체 골렘이라. 이거 오랜만인데.”
갈리아크가 혼자 나섰다. 도끼를 등에 짊어진 채, 느긋이 걷던 그가 시체 골렘 앞에 다가서자, 골렘 안에 박혀 있던 시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산 자를 저주하는 끔찍한 목소리. 붉은색의 팔뚝이 갈리아크에게 육박했다.
후웅. 슬쩍 허리를 숙여 일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기민한 움직임으로 안을 파고들었다. 이어 그가 주먹을 내지르자 뻐엉! 무릎이 터져 나가며 시체 골렘이 주저앉았다.
이어 놈의 목을 잡아 뜯어 버렸다. 수십 명의 원한으로 이뤄진 몸뚱이는 압도적인 힘 앞에 무의미했다.
“흐음.”
골렘의 머리를 든 갈리아크가 고개를 돌렸다.
베르덴을 본 그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팔을 뒤로 당겼다.
“도살자 놈, 대체 뭘…… 어?!”
도살자가 머리를 던졌다. 그것도 아군 진영이 있는 방향으로.
화들짝 놀란 기사들이 검을 뽑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게 직격하면 최소 10명은 죽어 나갈 것이다.
콰아앙!
기사들이 제시간에 닿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다치는 사람은 없었다. 주위를 감싼 마력의 벽에 피가 번졌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내가 먼저 나섰으니 너도 실력을 보여 줘야지. 나와라, 애셔.”
갈리아크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말리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베르덴의 표정이 너무 차가웠다. 허공으로 떠오른 베르덴이 갈리아크를 내려다봤다.
‘보고 싶다면 보여 주지.’
베르덴이 같은 위계의 마법사와 격을 달리하는 능력을 꼽자면 총 네 가지.
첫째,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역천으로 재구성된 마력회로.
둘째, 마법뿐만이 아닌, 단련을 거듭한 육체.
셋째, 천재적인 마법 이해력.
그리고 마지막 넷째. 동급의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량이다. 그런 점에서 베르덴의 마법은 위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효율이 좋지 않은 마법이라 할지라도 압도적인 마력량으로 완전히 뒤집어 버리니.
베르덴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면이 들썩이다 위로 솟구쳤다.
범위 안에 있던 갈리아크가 이리저리 흙을 피해 뛰어다니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얼굴은 곱상한 놈이 성깔 하나는 더럽군!”
“누가 누구보고…….”
쯧. 혀를 찬 베르덴이 꿈틀거리는 땅을 앞으로 밀어냈다.
흙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사방을 덮쳤다. 스켈레톤, 좀비, 시체 골렘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휩쓸렸고, 그렇게 한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화염구>
콰아앙! 불길이 언데드 무리를 휘감았다.
썩고 문드러진 육체는 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스러졌다. 갈리아크와 베르덴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확실히 고드보단 훨씬 낫군. 근데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갱도에 들어가서 빌빌대면 언데드 먹이로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먹이로는 네가 더 나을 텐데.”
어느새 초원은 두 사람의 전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말릴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으니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각자 제 위치에서 살아남은 언데드를 토벌했다.
그렇게 예정보다 훨씬 빨리 갱도 앞에 도달했다. 피해는 영주가 절로 박수를 칠 정도로 경미했다.
* * *
다음 날 아침. 언데드 토벌대가 한곳에 모였다.
세 명의 성직자와 18명의 모험가,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
무려 이십 명이 넘는 대인원이었으나, 최소 수백 마리의 언데드를 발생시킨 죽음의 근원까지 닿으려면 납득할 만한 숫자였다.
언데드가 갱도 일부를 무너뜨린 탓에 통로는 모두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짐꾼 역할을 맡은 파티는 이리스를 포함해 총 세 팀이었다.
호흡이 힘들어질 수 있으니 공기를 생성하는 소모형 마법 물품과 3일 치 식량 그리고 비상용 횃불과 포션까지. 값비싼 포션은 영주가 지원한 것이 두 개였고, 나머지는 갈리아크 파티의 것이었다.
“그럼 축복을 내리겠습니다.”
성직자 하나가 토벌대 앞에 서서 기도문을 외웠다.
<성스러운 축복>
따뜻한 빛이 몸에 스며들었다.
루아스교의 축복은 죽음의 기운을 물리쳐 공포로 인한 불안을 가라앉혀 주는 효과가 있다. 이어 베르덴과 이리스 그리고 비르온 영지의 마법사 모험가가 부여 마법을 시전했다.
“나한테는 안 써 주나?”
“굳이 필요한가?”
“싫어? 왜, 마력을 다 써 버리기라도 한 거냐?”
갈리아크가 킬킬대며 사사건건 베르덴의 심기를 건드렸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는 몰랐지만 모험가들은 불안해했다. 만약 둘이 갱도 내에서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그냥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흥. 갈리아크 씨는 저놈이 뭐가 좋다고.’
고드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베르덴의 뒤통수를 쏘아봤다.
사실 그는 어제의 기억이 없었다. 뭔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은 있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료인 네리엔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갈리아크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은 안 해 주니 알 길이 없었다.
‘어린놈이 재능 좀 있다고 유세 떨기는.’
베르덴의 마법은 고드가 입을 떡 벌리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드의 마음속에 열등감과 질투가 피어올랐다.
누구는 노력에 노력을 더해 겨우 3위계에 올랐는데.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려 보이는 저 베르덴이란 마법사는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게다가 더욱 짜증 나는 건 잘생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나도 마력만 있으면 저 정도는…… 아니, 내가 훨씬 더 강할 텐데.’
베르덴이 지금까지 보여 준 건 막대한 마력량을 토대로 한 마법. 단지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는 것뿐이었다.
고드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질투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 무사히 다녀오게.”
영주의 인사를 받은 토벌대가 갱도 앞에 섰다.
어제 병사들이 만든 벽이 갱도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자물쇠를 풀고 한 명씩 천천히 입장했다. 안은 새카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스러운 빛>
성직자의 빛이 갱도를 밝혔다.
암시를 써도 되지만, 토벌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에. 갑자기 지속 시간이 끝나 버리면 몰살당할 가능성이 컸다.
“네리엔, 앞에 서라.”
“내가? 그래, 알겠어.”
갈리아크의 명령에 네리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허리춤에 쌍단검을 맨 그녀는 남들보다 청각과 촉각이 예민했다. 척후로서 뛰어난 재능이었다.
다시 한번 갱도의 지도를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비르온 영지 마석 갱도. 본격적인 언데드 토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