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백금 등급 모험가
우지직!
한 손으로 도끼를 뽑아낸 거한, 갈리아크가 성큼 다가왔다. 그 뒤로 금색 플레이트를 목에 맨 주근깨 여자와 안경 쓴 남자가 따라왔다.
이리스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이, 여자.”
“네, 네?”
“여기로 언데드가 왔을 텐데, 어디로 갔는지 아나?”
듣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인 음성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이리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 다 죽었는데요.”
“뭐? 다 죽어?”
강한 개체는 없어도 숫자는 꽤 많았을 텐데 그걸 한순간에?
갈리아크가 이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이 푸른 머리 여자가 한 짓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들어 다른 모험가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목에 걸려 있는 플레이트엔 금 등급조차 없다. 그 많은 걸 잠깐 사이에 다 없애 버리는 건 자신도 불가능한데, 은 등급 이하 따위가 해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베르덴을 봤다.
‘저놈인가?’
나 혼자 특별한 놈이요 하는 외모에 갈리아크가 히죽 웃었다. 이리스를 제치고 베르덴에게 향했다. 느릿한 발걸음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오크보다 커다란 덩치에 모험가들이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백금 등급 모험가, 갈리아크가 베르덴과 마주했다.
“야, 잿빛 머리. 이쪽으로 온 언데드, 네가 다 죽였냐?”
베르덴의 청안에 갈리아크가 비쳤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게 지금 할 말은 아닐 텐데. 그건 우리들이 쫓고 있던 사냥감이다. 그런데 그 따위 태도를 보이면 안 되지. 엄연히 새치긴데.”
베르덴은 모험가의 규칙을 모른다.
그 순간 록스가 앞으로 달려나가 갈리아크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갈리아크 님.”
“응? 날 아나?”
“예전에 다른 도시에 계셨을 때, 멀리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도살자(Butcher) 갈리아크.
그 위명은 두렵기 짝이 없었다. 도적이든 아인종이든 거대한 도끼로 절단해 버리는 그 무지막지한 근력.
수년 전, 술 먹고 행패를 부리다, 자신을 막아서는 기사를 맨주먹으로 박살 낸 사건도 그의 악명을 퍼뜨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기사를 반죽음을 냈어도 길드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너무 강했으니까. 길드에 필요했으니까. 백금 등급 이상의 인재란 평등한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그런데 그 괴물이 왜 여기에…….’
록스가 마른 침을 삼키곤 말을 이었다.
“그, 제가 설명하자면…… 언데드가 사람들을 쫓고 있었고, 상황도 급박한 마당이었던 터라. 전혀 새치기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받은 의뢰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
“…….”
“그건 아니지. 보아하니 너희도 비르온 영주에게 고용된 모험가들 같아 보이는데…….”
갈리아크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뒤에 서 있던 안경 쓴 마법사, 고드가 비르온 영주의 표식이 새겨진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갈리아크가 직접 록스의 눈앞에 펼쳤다.
“이건…….”
“비르온 영주가 언데드를 ‘직접’ 토벌할 시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준다는 내용이지. 이제 내 말이 이해가 되나? 우리가 쫓고 있던 걸 너희가 직접 처리했으니, 규칙상 보수는 몽땅 너희에게 가게 되는 거다. 설령 몰랐다고 해도 말이다.”
갈리아크가 록스의 어깨를 잡았다.
“너도 모험가니 잘 알 거다. 모험가는 제 밥그릇에 예민하다는 거. 나는 특히 내 밥을 탐내는 놈들을 혐오하지. 그리고…….”
“크윽……!”
꾸구국.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록스가 신음을 흘렸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것뿐.
금 등급을 넘어선 백금 등급의 모험가의 힘은 일개 모험가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갈리아크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서늘한 목소리가 록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은 등급 버러지 따위가 감히 어딜 끼어들어. 이대로 짓이겨져서 죽기 싫으면 입 다물고 있어라. 알겠나?”
끄덕끄덕. 록스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갈리아크가 가볍게 손을 내치자 록스가 나가떨어졌다. 이어서 주변을 짓누르는 갈리아크의 기운.
마치 천적을 마주한 것처럼, 모두가 몸을 벌벌 떨었다.
베르덴을 제외하고.
“너 이름이 뭐냐?”
“애셔.”
“애셔? 그래, 애셔. 플레이트가 없는 걸 보니, 모험가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상관없지. 아까 얘기한 걸 들었겠지만 우리는 너희한테 보수를 빼앗긴 거다. 먹잇감을 몰아준 셈이지. 그러니 적당한 수고비를 받는 게 도리가 아니겠나?”
갈리아크가 손가락을 비볐다.
“절반. 너희가 받을 보수의 절반을 선금으로 내놔라. 이 정도면 나름 배려 넘치는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갈리아크는 덩치는 컸지만 그렇다고 무식하지는 않았다.
육체적인 재능을 발판 삼아 모험가 중 3번째로 높은 등급의 백금에 올라섰다. 힘으로 짓누르거나, 말로 회유하거나. 사람 하나 다루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몽땅 빼앗고 싶지만.’
그래서는 반발이 생기겠지. 그럼 귀찮아진다.
지금의 혜택을 유지하려면 싫더라도 모험가의 규칙 내에서 움직여야 했다.
어차피 다 받아도 갈리아크에겐 푼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양보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왕 움직였는데 하루 치 술값 정도는 가져가야지. 사실 이 편이 갈리아크에게 더 나았다. 정식으로 보수를 받으면 세금이다 뭐다 해서 길드에서 또 지랄 염병을 할 테니.
갈리아크가 손을 내밀었다.
칼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었다.
“설마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
베르덴을 억누르려 하는 강압적인 태도.
괜한 마찰을 빚지 않으려면 여기서 물러서는 게 상책일 것이다. 눈앞에 있는 도살자란 존재는 강했으니까. 백금의 플레이트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지금의 베르덴 또한 이 중에선 강자였다.
베르덴이 품속에서 돈을 꺼냈다. 달랑 1,000엘크짜리 지폐 한 장을.
손을 놓자 지폐가 갈리아크의 손을 지나쳐 바닥에 떨어졌다.
“수고했다.”
뿌득. 갈리아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 * *
베르덴이 한 행동에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갈리아크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살자를 도발한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 도끼에 반으로 갈라져 죽거나 반병신이 되어 살아간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갈리아크와 베르덴. 어느 누구도 시선을 굽히지 않았다.
뚜둑. 목을 푼 도살자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죽고 싶은 거냐?”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힘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힘으로 맞설 뿐이다.
‘이 새끼…….’
베르덴에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자, 갈리아크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제안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무시하다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야 속이 좀 풀릴 것 같다.
갈리아크의 어깨가 꿈틀거리자, 베르덴이 곧장 세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음? 갈리아크가 미간을 좁히곤 이번엔 한 발짝 다가갔다. 베르덴이 네 발자국 멀어졌다.
“하. 지금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거냐? 당장 내 앞으로 오면 용서해 주마. 이리 와.”
그런데 또 베르덴이 멀어졌다.
이 십새끼가.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맞붙자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
갈리아크의 눈이 순간 진지해졌다. 등에 스태프를 매고 있으니 마법사임이 분명하다.
마법사가 전투에 있어서 근접전을 피하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지금 베르덴과 갈리아크의 사이는 마법사에게 더 유리한 거리였다.
‘설마 진짜로 해볼 생각인가?’
도살자라 불리는 자신하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던 중, 그의 동료인 고드가 앞으로 나섰다.
“갈리아크 씨, 여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가?”
“예. 보아하니 주제도 모르는 마법사 같은데, 같은 마법사인 제가 충고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괜히 죽였다간 귀찮아질 테니, 선심으로 목숨 하나 살린 셈 치지요.”
갈리아크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 베르덴이란 놈은 미친놈인 것 같아 죽이기엔 뭔가 찜찜했다.
“당신, 애셔라고 했죠? 보아하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주제는 모르는 것 같군요. 제가 특별히 당신의 주제를 알려 드리죠.”
고드가 안경을 벗었다. 그와 동시에 마력이 주위에 퍼졌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몇 명은 헛구역질을 해 댔다. 베르덴은 가만히 고드를 쳐다봤다.
‘3위계 정도인가?’
굳이 비교하자면 빌셴이란 도적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다지 경계할 실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마력위압’이라.
생각해 보니 베르덴은 시도해 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마력과 마력회로의 가동률을 크게 낭비할 바에, 하나라도 마법을 시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마력으로 얼마나 상대를 위압할 수 있을지 보여 줄, 제대로 된 실험체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베르덴이 푸른 눈을 번뜩였다.
바깥으로 터져 나간 거대한 마력의 해일이, 정확히 고드만을 덮쳤다.
* * *
고드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망망대해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겁고 숨이 막혔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 바다는, 너무나 깊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짙은 푸른색을 넘어 공허한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서서히 몸이 끌려들어 간다. 빛이 점점 멀어지고, 어둠이 서서히 고드를 집어삼켰다. 위로 뻗은 손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암전했다.
“……!”
털썩. 고드가 쓰러졌다.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침을 질질 흘렸다. 닫히지 않은 눈동자에선 빛이 사라졌다. 주근깨 여자, 네리엔이 다가와 몸을 살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뭐야,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베르덴의 마력은 고드만을 향했다. 그렇기에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갈리아크만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주먹 쥔 그의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내가 긴장했다고?’
믿기진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나마 압도당하는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으니. 손을 문질러 땀을 지워 냈다.
갈리아크가 입꼬리를 올리며 이를 드러냈다.
“재밌군.”
갈리아크가 고드를 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애셔라. 그 이름 기억해 두지.”
그 말과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갈리아크가 떠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모험가들이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 살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고, 하나같이 베르덴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당연히 베르덴은 신경도 안 썼다.
다시 영지로 출발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 * *
갈리아크와의 마찰과 구해 낸 사람들을 호위하는 바람에 도착이 예정보다 많이 늦었다.
모험가임을 입증해 겨우 밤의 성문을 통과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영지의 분위기는 굉장히 어두웠다.
이곳에 오는 길만 해도 주위에 피가 고인 흔적이 가득했고, 두 번이나 언데드가 출몰했다.
베르덴에게만 맡길 수 없어, 이리스 팀과 록스를 비롯한 모험가들이 직접 처리했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현재 언데드 토벌 지휘소를 맡고 있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풀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병사들에게 보고는 받았다. 사람들을 호위하느라 많이 늦으셨다고. 고생했군.”
그런 하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는 귀족의 반열이니까.
록스가 나서서 대화를 나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토벌 계획은 정해졌습니까?”
“그럼. 빠른 시일 내에 토벌해야 하는 만큼 기간은 2~3일로 예상하고 있다. 내일 전선을 갱도 앞까지 밀어낸 다음, 자네들 모험가와 성직자가 안으로 들어가 토벌을 마치면 되는 것이지.”
“……그 시간 내에 가능하겠습니까?”
“그래, 이번에 백금 등급 모험가가 토벌에 합류했으니까. 도살자라고 들어 봤나? 감히 기사를 건드리는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고 하니, 자네들은 최대한 도살자를 조력하는 방향으로 하는 게 좋겠군. 뭐, 마음에 안 들면 콱 찔러 버려도 좋고.”
물론 농담이지만.
“일단 가서 눈 좀 붙이게. 내일 아침에 깨워 줄 테니 걱정은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도살자와 함께하는 언데드 토벌이라니. 혹시 베르덴과 또 마찰이 생길까 무서웠다.
여관으로 가 베르덴에게 부탁했다. 제발 도살자하고 대립하지 말아 달라고.
“그러지.”
참으로 신뢰가 들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날, 모험가들은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