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보수
기사가 다시 온 건 점심이 지난 후였다.
몸을 씻고, 배를 채운 베르덴은 시장의 자택으로 향했다. 박사를 죽인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도시의 경계는 삼엄했다.
철저한 신분 검사를 통과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애셔.”
시장의 얼굴은 며칠 사이 수척해져 있었다.
하마터면 도시에서 학살이 일어날 뻔했으니 편안하게 보낼 수야 없었겠지. 베르덴이 시장의 손을 맞잡아 악수를 했다.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잔당을 몇 잡았지. 도시에서 도망치려던 녀석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소. 뭐, 사실은 그냥 돈에 눈이 먼 작자들이라 전혀 아는 게 없었지만 말이오.”
결국 왜 마르테스에 학살을 일으키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베르덴이 준 계획서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시장은 이번 일을 묻기로 결정했다. 잘못하면 시민들에게 큰 혼란을 줄 수도 있었으니까. 이것이 상책이었다.
“애셔, 그대에겐 미안하게 됐소. 덕분에 마르테스가 위기를 넘겼는데…….”
“저번에도 말했지만 괜찮습니다. 명성보단 도시의 안전이 더 중요하니까요.”
베르덴이 옅게 웃었다.
마탑에서 터득한 가식적이고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명성은 중요하다.
모험가도 용병도 아닌 베르덴이 돈을 벌고 경험을 쌓으려면 이름값을 높여야 한다. 파이테 영지에서 도적 토벌을 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 베르덴이 마르테스를 구한 마법사로 알려지면 그런 기회가 더 많아지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시장이 내건, 입막음에 대한 보수가 더 크니까.’
명성을 올릴 기회는 많지만, 귀한 마법 물품을 구할 기회는 흔치 않다.
베르덴은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택했다.
시장을 따라 자택의 지하로 내려갔다.
곳곳에 마법진이 숨어 있는 게, 보안이 상당했다.
“시청의 예산으로 구입하거나, 범죄자들에게서 빼앗은 귀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바로 이곳이오. 기사단이 직접 경비를 맡고 있는 시장의 자택은 도시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니까.”
걸리는 순간 경보가 울리는 마법진이 대부분이다.
잘못 건드리면 수십 명의 기사가 추격하게 되겠지. 도둑에겐 다시없을 끔찍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마법진을 통과한 뒤, 시장이 열쇠를 꺼냈다.
잠금장치를 열자, 철컥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돈을 무지막지하게 들였군.’
엄청나게 두꺼운 게, 베르덴의 마법이라도 뚫는 건 역부족일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법 물품을 비롯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베르덴의 시선이 옅은 청록색을 띄고 있는 검에 멈췄다.
“이거 설마…… 미스릴입니까?”
미스릴은 금속 중에서도 수용성이 가장 높다.
마력이든, 기든 거의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위력 또한 강해진다.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랄 만한 물건인 것이다.
“5년 전쯤인가, 악명 높은 범죄자에게서 빼앗았소. 그놈 탓에 기사 세 명이 은퇴하고 말았지.”
어쨌든.
“모두가 그 미스릴 검만큼은 아니지만, 대부분 가치도 높고 쓸 만한 물건들이지. 도시를 구해 준 은인에게 걸맞은 정도로. 애셔, 이 중 원하는 걸 하나 고르시오. 그게 내가 약속한 보상이오.”
그건 즉 당장 미스릴 검을 가져가도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난 검을 다룰 줄 모르니.’
베르덴은 간신히 충동을 억누르고 사방을 둘러봤다. 미스릴에 준하진 않으나 마법사에게 필요한 마법 물품도 있었다.
“감정해 봐도 되겠습니까?”
“감정……? 감정사도 아닌데 어떻게…… 허, 허, 이것 참 어린 나이에 다재다능한 마법사셨군. 물론이오. 얼마든지 사용하시오.”
“감사합니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하나 잡았다.
감정을 쓰자 스태프에 새겨진 구조가 읽히기 시작했다.
◇ 새플링 스태프
⦁ 마법 시전 속도 증가(소)
⦁ 땅 계열 마법 마력 소모량 감소(극소)
마력 소모량 감소라.
캐스팅 속도를 좌우하는 마력 전달률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게 베르덴에게 훨씬 좋다.
◇ 매직 케이프
⦁ 참격 내성(소)
⦁ 화염 저항(소)
◇ 리커버리 링
⦁ 상처 재생(소)
⦁ 체력 재생(극소)
저항력이 있는 로브. 마력을 소모해 상처와 체력을 재생해 주는 반지.
적당히 쓸 만해 보이긴 하나 효율은 별로 좋지 않다. 많이 번거로워도 미스릴 검을 팔아 버리고 다른 걸 구하는 게 나을 정도.
그렇게 하나하나 신중히 확인하는 도중, 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녹슬고 낡은 반지.
감정에 반응하지 않은 걸 보아 마법 물품은 아니다. 어떠한 가치도 없어 보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눈이 갔다.
“그건…… 음, 잘 기억이 안 나는군. 내가 시장이긴 하지만 여기 있는 모든 물건의 출처를 아는 것은 아니니.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그리 대단한 물건은 아닐 거요.”
베르덴은 반지를 한동안 유심히 살펴보다 다른 것들에 눈을 돌렸다. 30분이 흐르고, 1시간이 흐르자 기다리던 시장이 먼저 지쳐 버렸다.
“……슬슬 고르지 않겠소?”
“아, 죄송합니다.”
마침내 베르덴은 목걸이를 하나 선택했다.
◇ 보호의 목걸이
⦁ 자동 마력방벽
청금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
자동으로 외부 공격에 대해 마력방벽을 펼쳐 주는 기능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효용성이 높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공격을 막아 주는 것이니.
대신 단점이 크다.
마력방벽 자체의 내구도도 그리 높지 않은 데다가 평소의 몇 배나 되는 마력이 소모된다. 일반적인 마법사에겐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물론 베르덴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었지만.
“보호의 목걸이라. 괜찮은 물건이긴 하지만 여러모로 쓰기 번거로울 텐데…… 정말 그걸로 괜찮겠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은 미간을 좁히며 턱을 쓸었다.
보호의 목걸이도 나름 희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가치만 따지자면 목걸이보다 비싼 것이 창고에 열 개는 넘을 텐데…… 도시를 구해 준 보답치곤 부족한 감이 있었다.
고민하던 시장이 녹슨 반지를 베르덴에게 건넸다.
“아까 보니 이 반지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원한다면 가져가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약속과 다르긴 하지만 그 녹슨 반지를 하나로 칠 수는 없지 않겠소. 도시에 필요 없는 물건이니 가져가셔도 좋소. 세공은 나쁘지 않아 보이니, 녹 좀 없애면 적당히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 감사는 이쪽이 해야지.”
그렇게 시장에게서 보수를 받았다.
예상한 것 이상의 수확이었다.
보호의 목걸이는 베르덴이 반응하지 못한 일격을 막아 줄 터. 마력 소모는 전혀 리스크가 되지 않는다. 여분의 목숨이라 봐도 무방했다.
물론 직접 펼치는 마력방벽보단 강도가 떨어지기에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베르덴은 당분간 마르테스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3위계 중위. 마탑에서 가져온 보물인 ‘마법서’를 쓸 수 있는 최소 위계에 도달했으니까, 필요한 재료들을 도시에서 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배울 마법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며 베르덴은 여관으로 돌아갔다.
* * *
기회가 찾아와도 움직이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마법사 이리스는 그렇게 배워 왔다.
그런 그녀에게 베르덴이란 존재는 기회 그 자체였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압도적인 마법을 보인 천재 마법사.
이른 아침마다 연무장에 찾아가는 건 조금이라도 베르덴의 관심을 끌려는 이유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혹시 시간이 되면 식사라도 같이하지.”
베르덴이 말했다.
이리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식사? 이렇게 갑자기?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모르겠다.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베르덴이 여관에 돌아간 사이 이리스는 머리를 빗고 단정한 마법사다운 옷차림을 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이 정도면 되려나?’
거울을 본 이리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나섰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 도착한 레스토랑.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는 점원들과 은은하게 코끝을 스치는 고기의 향기까지. 이런 식당에 제 발로 온 건 처음이다.
그녀는 가난한 서민 출신이었으니까. 아카데미에선 장학금을 타 부족한 생활비를 메꿨지만, 모험가 생활은 수입이 들쭉날쭉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고급 스테이크 대신 값싼 야채 스프를 먹는 게 당연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혹시 예약하셨습니까?”
“그게, 아마 애셔라는 이름으로…… 아! 저분이요!”
이리스가 구석에 앉아 있는 베르덴을 가리켰다.
점원의 안내를 받은 그녀는 조심스레 의자를 당기고 베르덴과 마주 앉았다.
베르덴이 들고 있던 책자를 건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무거나 골라.”
“아, 네.”
이리스가 책자를 펼쳤다.
‘……?’
그런데 가격대가 이상했다.
파스타와 같이 익숙한 음식도 있었는데, 그녀가 알고 있는 가격과는 자릿수가 달랐다. 게다가 스테이크 200g이 30만 엘크나 한다고? 대체 식사 한 끼에 얼마나 많은 고블린을 잡아야 하는 거지? 정신이 혼미했다.
“저…… 선배님? 갑자기 밥은 왜 사 주려고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이건 너무 비싼 게…….”
“괜찮아.”
베르덴이 계좌에 넣은 금액은 3,000만 엘크가 넘는다.
그리고 시장은 준 보수는 녹슨 반지와 보호의 목걸이가 끝이 아니다. 별개로 보상금 또한 약속되어 있다.
거기다 로릭스 여관의 수리비와 불타 버린 도서관의 책값마저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하니,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사 주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다.
‘더군다나 부탁할 게 있는 상대에게는.’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주문해. 나중에 갚으라고 안 할 테니까.”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알겠어요.”
이리스는 마지못해 베르덴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코스 요리.
새콤한 채소 에피타이저로 시작해, 통치즈의 중심을 녹여 버무린 파스타, 입안에서 녹는 스테이크. 그야말로 맛의 향연이었다. 동료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먹은 게 죄책감이 들 정도로.
“하아…….”
후식으론 달콤한 케이크와 씁쓸한 커피가 나왔다.
전신을 감도는 깊은 여운에 이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헤실거렸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군.”
“이렇게 맛있는 걸 먹는 건 아카데미 나온 후로 처음이라…… 장학생에겐 복지가 꽤 좋았거든요. 졸업한 후에 모험가를 하겠다고 하니 교수님들이 말렸었는데.”
잠시 과거가 떠올랐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리스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그런데 선배님? 갑자기 이렇게 비싼 식사를 대접해 주신 건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을까요?”
“맞아. 너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
“부탁이요?”
이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낱 모험가인 자신에게 부탁이라니, 그게 무엇인지 당최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베르덴에게 줄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대체 뭐지?’
말 한마디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입안에 감도는 커피의 향이 쓰게 느껴졌다.
심란해하는 이리스에게 베르덴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에게 부여 마법을 가르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