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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3화 (23/366)

23화 지하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공간, 그 중심.

오래되어 낡은 왕좌에 앉은 흑발의 사내가 와인잔을 들고 있다. 그 앞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박사가 죽었다라……. 시체는 확인했나?”

“불에 타 죽었기에 확인할 순 없었지만, 정황상 죽었다고 판단됩니다. 그가 가진 연구 자료 또한 전부 소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거 잘됐군. 귀찮은 일을 덜었어.”

와인을 머금고 잔을 빙빙 돌렸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박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사내에게 있어 최고의 안주였으니까.

“진즉에 처리해야 했었는데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는 통에 찾지 못했었지. 추적을 시작한 지 벌써 20년인가? 그동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것이라곤 이 소식 하나뿐이군.”

그조차 운이 좋았다.

리비안트 공국에 구축한 정보망, 그중 도시 마르테스에 펼쳐 놓은 그물에 우연찮게 정체불명의 지하 시설이 걸려들었고, 비밀리에 조사한 결과 자신들이 쫓고 있던 박사의 비밀 연구소라는 것이 판명 났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과였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그런 건 불찰이 아니라 무능이라 하지. 그래도 탓하진 않겠다. 본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

사내가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인간은 나약하다.

지성을 가진 어떤 종족보다도 많은 수를 자랑하지만, 평균적인 힘은 최약체에 불과하다. 먼 옛날, 인간은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약소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특이성은,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우월했다.

수천 명 중, 수만 명 중, 10년에 한 번, 100년에 한 번. 궤를 달리하는 인간이 계속해서 탄생했고 그들이 이끄는 인류를 막아서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더 이상 인간은 다른 종족의 먹이나 노예 따위가 아니었다.

선장이 지휘하고, 선원은 따른다.

그것이 인류의 행보였고, 한 사내는 그걸 이름 지어 ‘방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그중 하나가 ‘글러트니’였다.

한때 방주의 손에 토벌당했던 ‘세상을 집어삼키는 괴물’을 선망하며.

섭취하는 음식에 따라, 다르게 적응해 가는 인간의 본능에서 태어난 그들의 이념.

탁. 와인잔을 비운 사내가 비웃듯이 말했다.

“참으로 구시대적인 발상이야. 먹어서 인류를 발전시키겠다니, 무슨 돼지 새끼도 아니고. 슬슬 정신을 차릴 법도 한데, 갈수록 미쳐 가기까지 하니…… 더군다나 인류를 구분해 구인류를 멸망시키겠다는 헛소리까지. 같은 뿌리로서 창피할 지경이군.”

사내가 와인잔을 손가락으로 톡 두들겼다.

그러자 유리가 쩍 갈라지더니 비스듬히 떨어졌다. 그 단면은 마치 칼로 베기라도 한 듯 깨끗했다.

“그러니 이제 정리할 때가 됐지.”

사내가 왕좌에서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그의 손짓에 닫혀 있던 커튼과 문이 활짝 열렸다. 따스한 햇빛과 차가운 기류. 구름이 펼쳐진 하얀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혹여 박사가 죽었다는 사실이 퍼지게 되면 글러트니가 미쳐 날뛸 거다. 마르테스란 도시는 송두리째 사라지겠지. 그러지 못하도록 가능한 소문이 퍼지는 걸 막아라.”

“예. 놈들을 보이는 족족 섬멸해 양지로 나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이번엔 유능했으면 좋겠군. 언제까지고 무능한 인간은 도태되기 마련이니까. 아, 그런데…….”

사내가 고개를 뒤로 향했다.

“박사를 죽인 마법사의 이름이 뭐지?”

“애셔라고 합니다.”

“애셔라…….”

좋은 울림이군.

그의 이름을 되뇐 사내가 옅게 웃었다.

* * *

마르테스 동쪽에 있는 숲.

도보로 움직이면 며칠 정도 걸리나, 비행을 쓸 수 있는 베르덴에겐 하루 안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다. 속력을 최대로 높이면 두 번도 가능하겠지.

“……여기 어디쯤인 것 같은데.”

햇살이 내리쬐는 정오.

지도를 펼친 베르덴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까지 오긴 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육안으로 판단하기에도 딱히 의심스러울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마력감지>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마력을 넓게 펼쳤다.

벌레, 나무, 풀, 짐승, 아인종 등. 마력을 통해 수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이걸 전부 읽어 내는 건 불가능하며 비효율적이다.

베르덴은 대부분의 정보를 흘려보내고 지형 자체에 집중했다. 예를 들어 동굴의 입구 같은.

하지만 딱히 잡히는 건 없었다.

이 이상 범위를 넓히면 마력이 감당하지 못한다. 마력을 고정한 뒤 받아들이는 정보량을 늘렸다.

지형에서 지물로. 땅에서 나무로.

‘……찾았다.’

나무 아래에 숨겨져 있는 인공물.

곧장 지상으로 내려간 베르덴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고 오래된 문 하나가 나타났다.

혹여 함정 같은 것이 있을지 모르기에 거리를 두고 염력을 사용했다. 이내 잠금장치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활짝 열렸다.

마력을 퍼뜨려 내부의 구조를 파악했다.

‘꽤 깊군. 먼지가 쌓인 걸 보면 오랜 시간 방치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다.

기사 제이슨이 놓쳤던 암살자가 숨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마르테스에 어떤 흔적도 없이 지하 통로로 들어간 걸 보면 가능성이 다분했다.

<암시>

어둠을 꿰뚫어 보는 눈.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한 베르덴이 지하로 향했다.

* * *

먼지가 떠다니고 곳곳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공간.

신경을 곤두세운 베르덴은 바닥에서 살짝 몸을 띄운 채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환기가 되지 않는 모양인지 내부의 공기는 답답함을 느낄 정도로 혼탁했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작은 방들 안에는 간혹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평범한 사람이 보면 오싹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으나, 베르덴은 오히려 익숙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박사가 있던 연구실하고 비슷한 구조인데…… 과거에 쓰던 실험실 같은 건가?’

아니면 감옥일지도.

그 정도로 이곳은 전체적으로 열악하고 갑갑해 보였다.

그렇게 20개가 넘는 방을 지나 마침내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다른 방들과 달리 금속으로 된 육중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염력으로 손잡이를 돌리자 녹슨 탓인지 맥없이 부러져 버렸다.

‘문을 통째로 부수는 건…… 안 되겠어.’

오래도록 방치된 터라 구조물 전체가 약해져 있다.

강제로 이 무거운 문을 뜯어내려 했다간 자칫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결코 죽지는 않겠지만 문 뒤에 있는 것들은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염력 계열은 제외한다. 원소 계열도 마찬가지.

지금 필요한 건 문을 부술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으면서 그것을 일정 범위 내에 한정하는 마법이다.

‘그렇다면.’

베르덴의 손가락 끝에 마력이 맺혔다.

허공에 마법진의 기반이 되는 원을 그리고는 가장자리에 복잡한 형태의 문자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원의 중심에 다시 원을 만들어 다른 형태의 문자를 새겼다.

범위를 제한하는 마법진 컨파인(Confine)과 화염구의 마법식.

이런 복합적인 마법진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발되거나 오작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눈앞에서 폭발하는 일이 없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과 경험을 겸비해야 한다.

물론 베르덴은 두 조건에 전부 부합하는 마법사였다.

손을 펼치자 마법진이 앞으로 날아가 문의 중심에 안착했다.

이어 두 개의 원이 서로 역방향으로 돌아가더니 이내 멈추고는 폭발했다. 그 충격에 잠금장치가 있던 부분만이 뻥 뚫렸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역시 아무도 없다.

직접 눈으로 봐도, 마력감지를 사용해도 감지되는 건 벌레나 작은 동물뿐. 마법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이곳에 있는 지성체는 베르덴이 유일했다.

긴장을 늦추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방 안에는 낡은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있는 걸 하나 주웠다.

“오크 실험체 132번 육체의 과부하로 인한 사망, 인간 292번 정신 붕괴, 코볼트 408번 착란이 일어난 뒤 광기가 일어나 폐기 처분…….”

박사와 함께 불태웠던 실험 일지와 비슷한 내용들이다.

휘갈겨 쓴 필체를 보니 제대로 기록하기 전에 잠깐 메모해 둔 것 같은데…… 박사의 일지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것만으로는 어떤 실험에 대한 것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염력>

자료들을 한데 모아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서랍을 열자 웬 마수의 가죽과 함께 봉인이 되어 있는 봉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을 살펴보던 베르덴이 눈을 부릅떴다.

“이거…… 설마 마흐바트의 가죽인가?”

짙은 녹색 빛이 감도는 걸 보면 확실하다.

굴강한 육체로 들이받아 사냥감을 말 그대로 박살 내 버리는 마수, 마흐바트. 그 가죽은 특히나 물리 저항력이 높아 여러 곳에서 인기가 많다. 마탑에서도 종종 보이는 소재다.

“이 정도 양이면 옷 하나 만들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탐난다.

일단 가죽은 내버려 두고 봉투를 집었다.

안에는 이빨을 형상화한 붉은 표식이 들어 있었다.

‘실험 일지에서 본 것과 비슷한데…… 조금 더 색이 짙군.’

무슨 신분증 같은 건가? 아니면 그냥 상징?

뭔지는 몰라도 예사롭지 않은 게 중요한 물건 같은데, 왜 박사는 이걸 두고 간 거지? 지도를 가지고 있는 걸 봐선 나중에 챙기려고 했던 건가?

박사가 죽은 이상 질문의 답은 알 수가 없다.

베르덴은 잠시 고민하다 일단 챙기기로 했다.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마법 물품이 아닌, 어떤 효과도 없는 단순한 표식일 뿐이니까. 나중에 처분해도 늦지 않다.

<화염기류>

화르륵. 뻗어 나온 불길이 자료들을 불태웠다.

바깥으론 나간 뒤에는 지형조작으로 지하 내부와 입구를 아예 메워 버렸다. 어느 누구도 흙과 잿더미 속에서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흔적을 지우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래로 향한 베르덴의 시선.

마흐바트의 가죽을 본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만 해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비싼 소재긴 하지만 보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출처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장 베르덴의 전 재산에 버금가는 값의 소재가 통째로 베르덴의 손에 들어온 셈이다.

‘글러트니가 뭐 하는 집단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다른 도시에서 가공을 하는 게 안전하겠지. 그 정도 수고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제 처리할 건 박사의 계획서밖에 없다.

이미 실험에 대한 특정 부분은 지운 상태. 이제 내용이 앞뒤가 맞도록 수정하면 본래의 것과 다른 가짜 계획서 하나가 만들어진다.

시장을 속이는 일이었지만 베르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르테스에 일어날 참사를 막은 건 사실이니까.”

이건 정당한 대가였다.

* * *

이른 아침, 마르테스 모험가 길드의 연무장.

훈련을 하러 온 몇몇 모험가가 한 마법사, 베르덴을 흘끗 쳐다봤다.

후우웅. 후웅.

스태프가 바람을 가르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실전에서 어떨지는 몰라도 그 퍼포먼스 하나만큼은 눈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체력 단련을 마친 베르덴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여기요.”

몰래 구경하고 있던 이리스가 수건을 건넸다.

“여긴 무슨 일이지?”

“모험가가 모험가 길드 연무장에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선배님?”

그건 그렇지.

베르덴이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땀을 닦아 내고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였다.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이리스가 물었다.

“그런데 그 봉술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소리가 진짜 장난이 아니던데. 혹시 마법사가 되기 전에 기사 지망생이셨나요?”

“기사는 무슨. 빗자루질만 하면 할 수 있는 정도지.”

8살 때부터 시작한 잡일. 어린 베르덴은 호기심이 많고 활발했다.

빗자루를 쥐여 주면 먼지를 쓸다가도, 심심하면 이리저리 휘두르기 십상이었다. 그런 나날을 수천 번이나 반복하고, 홀로 단련까지 했으니.

이런 스태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오히려 이상했다.

“빗자루……?”

이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물어볼 게 산더미같이 많다. 그날 밤 로릭스 여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해야 마법사로서 성장할 수 있는지 등 말이다.

“저기…….”

그녀가 입을 열려는 도중, 누군가 찾아왔다.

공국의 상징이 새겨진 갑옷과 검.

마르테스의 시장, 겔린 워하드의 직속 기사단 소속이었다.

“마법사 애셔 님, 맞으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시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올 것이 왔다.

박사의 가짜 계획서를 넘겨준 뒤 약속받았던 노력의 대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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