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7화 (17/366)
  • 17화 도시 마르테스

    현상금 수여는 도시의 행정을 관할하는 시청에서 주관한다.

    우선 도시 내 병사들에게 알리면 해당 지역에 조사단을 파견하거나 현상범을 죽였을 시, 시체를 확인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현상금 지급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가장 흔한 방법은 수급을 잘라 전달하는 것인데, 웬만한 전문적인 장비 없이는 썩지 않게 보관하는 것도 고역이다.

    ‘마법으로 얼려도 되긴 하지만.’

    들고 다니기 꺼림직하다.

    베르덴은 귀찮은 일을 덜게 해 준 파이테 영주에게 감사했다.

    도시 중심에 있는 시청에 도착하자 경비병이 막아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베르덴이 현상금 증명서를 꺼냈다.

    현재 베르덴은 어떠한 신분도 없었지만, 영주의 직인이 찍힌 종이가 신분증을 대신했다. 귀족의 문양을 알아본 병사가 퍼뜩 자세를 잡았다.

    “시, 실례했습니다. 관련 부서는 2층 오른쪽 복도 끝입니다.”

    뒤이어 안내해 주겠다는 말은 거절했다.

    한창 마탑에서 일꾼으로 지내고 있을 때, 잔심부름 겸 몇 번이고 시청을 들락날락했다. 물리적인 구조는 달라도, 대충 훑어보면 어디가 어딘지 구별이 갔다.

    관련 부서에 찾아가자 커다란 게시판에 각종 현상범에 대한 수배서가 가득했다.

    빌셴과 바르자. 둘의 얼굴도 있었다.

    수배서를 떼어 직원에게 건넸다.

    “파이테 남작령에서 영주님의 기사와 함께 토벌을 마쳤습니다. 여기 증명섭니다.”

    직인을 본 직원이 혹여 뜯길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그…… 정확한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최대한 서두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시나 귀족의 눈 밖에 날까 봐서인지 직원의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쉴 자리를 안내받았다. 다른 직원이 서둘러 다가와 따뜻한 녹차 한 잔을 건넸다.

    후릅.

    ‘맛없군.’

    그래도 뱉는 건 좀 그랬다. 단번에 들이켜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베르덴의 인생 대부분은 마법으로 물들어져 있다. 쉬는 동안에도 마법을 이용한 이런저런 전투법을 구상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베르덴이 눈을 떴다.

    직원이 아닌, 처음 보는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처음 뵙겠소. 마르테스의 시장인 겔린 워하드요.”

    ……시장? 갑자기?

    난데없는 고위급 인사에 베르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도 잠시, 곧바로 이성을 되찾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애셔라고 합니다.”

    “하하, 예의가 밝으신 마법사분이시군.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바쁘지 않다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소?”

    도시의 우두머리가 직접 찾아왔는데 내쫓을 사람이 있을까?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들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편히 쉴 생각이었으니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이 앉은 다음,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래서. 저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별건 아니오. 우연히 입게 된 은혜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이지.”

    시장이 현상금 천만 엘크와 함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공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정식 통행증인 것 같다.

    왜 이걸 주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베르덴의 반응에 시장이 옅게 웃었다.

    “파이테 남작령은 내 고향이오. 어렸을 땐 지금의 영주님께 많은 은혜를 입었었지. 놀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맬 때, 직접 교회에 연락해 치료를 해 주신 기억은 아직도 눈앞에 선할 정도로. 아, 고맙네.”

    직원이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녹차가 아닌 고급스러운 찻잎으로.

    목을 축인 시장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살면서 전쟁도 겪고 이리저리 치여 살다 보니 이 자리에 있더군. 기왕 출세도 했으니 다른 가족들을 이곳에서 풍족하게 살게 해 주고 싶었지만, 영 고지식한 사람들이라 영지에 남겠다고 했지. 이제 내가 말한 은혜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시오, 마법사 양반?”

    도적들에게서 영지를 구해 줬다.

    과장이 없잖아 있었지만, 가족들에게서 위협을 없애 준 건 틀림없었다.

    시장의 호의 넘치는 시선에 베르덴이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그리고 영주님께서 따로 신경 써 달라고도 해서 이걸 준비해 봤소. 경비병에게 들어 보니 마땅한 신분증이 없는 것 같다고 했으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 귀한 건 아니지만 베르덴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저쪽에서 영주의 증명서를 가져가면 새로운 신분을 만들기 위해 모험가나 용병 쪽에 소속되어야 했으니까.

    베르덴은 집단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현재로선 말이다.

    “괜찮은 선물이 된 것 같아 다행이오. 그럼 나는 공무가 바빠서 이만…….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말을 깜빡했군.”

    문손잡이를 잡은 시장이 뒤를 돌아봤다.

    “어서 오시오, 우리 마르테스에.”

    * * *

    예정에 없던 시장과의 면담을 끝내고, 마그누스 은행으로 향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마탑에서 사용하던 계좌를 떠올렸다.

    ‘죽었다고 여길 테니, 마탑에서 전부 회수했겠지.’

    힘들게 번 돈이 마탑주의 주머니에 들어간다니 배가 아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탑에서 사고가 터지기 직전에 예금한 돈을 전부 빼내고, 살림살이까지 전부 정리했다면 의심의 싹이 텄을 것이다.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는 그런 성격이니까.

    새로운 계좌를 만들고 가진 돈의 대부분을 넣었다.

    마그누스의 상호가 그려진 카드도 받았다. 뒷면엔 사회의 변혁에 앞장선 마법사들이 고안한, 고도의 술식이 새겨져 있다. 이걸로 결제하면 자동으로 계좌에서 그만큼의 금액이 차감된다.

    다만, 기술적인 한계로 은행에서 전용 단말기를 지급받은 상점 외엔 쓸 수 없다.

    당연히 도시 밖을 나가면 뭘 해도 쓸 수 없으니 한낱 잡동사니에 불과해진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기술이었다.

    방금 발급받은 카드로 여관의 꼭대기 층을 대여한 베르덴이 창문을 내려다봤다.

    도시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일찍 저녁을 먹은 그가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신분증이 생겨서 편하군.’

    덕분에 여유가 생겼다. 베르덴은 그렇게 얻은 시간을 마법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원소 계열과 계열을 따지지 않는 공통 마법. 지금까지는 회로가 허락하는 내에서, 머릿속으로 익힌 마법들을 구현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다면 다른 계열도 가능할까?

    역천으로 얻은 재능이 어디까지 닿을지 궁금했다. 이리스의 부여 마법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이게 인생이지.”

    사사건건 방해하며 간섭하는 놈들이 없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 속에서 베르덴이 잠에 들었다.

    * * *

    “……죽었다고?”

    박사가 무슨 소릴 하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보고를 마친 흑색의 사내는 여전히 침묵했다.

    “원인은?”

    “동굴 내부에 마법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살해당한 것 같─”

    쨍강!

    유리 파편이 사내의 머리로 쏟아졌다. 플라스크를 던진 박사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사내를 노려봤다.

    “말뜻 모르나? 세르겐을 죽인 자가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을에서 의뢰를 받은 모험가 파티가 실험체가 있던 동굴로 향했다는 정황은 파악했습니다.”

    그나마 쓸 만한 정보였다.

    또다시 던지려 했던 플라스크를 내려놓은 박사가 이마를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고작 고블린 토벌을 맡은 모험가 파티가 그놈을 죽였을 리는 없을 테고.’

    무언가 있다. 있는데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박사는 연구자답게 여기저기 흩어진 정보의 파편들을 긁어모았다. 최근 수개월 동안 일어난 일들 중 확인되지 않은 건 총 두 가지였다.

    첫째, 파이테 남작령에 심어 둔 실험체가 예상과 달리 조용하다.

    둘째, 갑작스러운 세르겐의 죽음.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시간의 간격이 매우 짧다.

    거기서 얻어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실험체를 처리하고, 세르겐마저 죽였다?’

    박사의 뇌리에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집단이 떠올랐다.

    방주. 그들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박사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이념은 상극이나 마찬가지. 서로의 뿌리는 같으나 더 이상 공존할 수가 없는 게 현 상태였다.

    “하,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잘도 찾아냈군. 이렇게 되면 계획이 틀어지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방주가 보낸 마법사가 이곳 연구실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하기야, 세르겐의 입은 가벼우면서도 무겁기도 했으니까. 더 이상 써먹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발목을 붙잡지 않은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테온.”

    “예, 박사.”

    “오늘 내에 세르겐을 죽인 인물을 찾아낼 수 있나?”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괜찮군. 그럼 찾아내.”

    언제 적이 찾아올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생각은 없다.

    방주에서 먼저 한 방 먹였으니, 이쪽에서도 되갚아 주는 게 도리다.

    “그리고 죽여라.”

    그렇다 하더라도 방주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인간을 투입하겠지. 그게 목적이다.

    그때쯤이면 연구에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다. 도시 마르테스를 무대로 한 실험의 향연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박사가 자신의 손 안에 새겨진 표식을 바라봤다.

    날카롭고 가지런한 붉은 이빨, 글러트니(Gulttony).

    우린 인류에 있어 선구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 * *

    다음 날, 여관에서 이리스와 베르덴이 만났다.

    다른 동료들이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이리스는 거절했다.

    아카데미를 장학생으로 지내다 졸업하고, 무려 부여 마법은 2위계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녀였지만 막상 꿈에 그리던 모험가가 되니, 돈과 승급에 급급한 모험가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어느 정도 맞는 동료들을 영입해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러던 그때, 베르덴이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마법 실력은 압도적이며, 어떤 이론을 물어본들 모르는 게 없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그 자리에서 논리정연하게 풀어 이해시켜 주었다.

    그녀에게 베르덴이란, 그야말로 이상적인 마법사였고, 모험가 생활에서 쌓인 염증을 풀어 줄 존재였다.

    ‘놓칠 수 없어.’

    이리스의 마음속에서 마법에 대한 학구열이 오랜만에 불타올랐다.

    “여기가 도서관이에요. 마르테스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책도 다양해서 저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죠. 일반 시민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회원 등록을 안 하면 대여할 때 돈을 지불해야 돼요. 그리고 회원이 되려면 최소 일주일은 출석해야 하고요.”

    “부여 마법에 대한 책도 있습니까?”

    “부여 마법이요? 있긴 하지만 마법사님이 만족하실 정도의 책은 없을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기초 지식이 담긴 책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요. 누가 빌려 가지만 않았다면 전부 찾아낼 수 있어요.”

    이리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책까지 찾아 준다니…… 역시 안내역으로 고용한 게 정답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말씀을 좀 낮춰 주실 수 없을까요? 제가 나이도 어리고, 마법사로서도 후밴데…….”

    “그럼 이리스라고 부르지.”

    베르덴은 곧바로 말을 놨다.

    어차피 호칭이나 높임말이나 겉치레에 불과했으니까.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갑자기 말을 놓을 줄이야……. 눈을 깜빡이고 있던 이리스가 베르덴을 따라 도서관에 들어갔다.

    “저기, 그럼 저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부르고 싶은 대로.”

    그게 제일 어려운데.

    이리스가 골똘히 생각했다. 뭐라고 부르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까?

    ‘애셔 님? 아니면 선생님이라고 부를까? 애셔 오빠는…… 이건 절대 아니고.’

    그러다 적당한 호칭이 떠올랐다.

    도서관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 베르덴을 앞질러 가며 말했다.

    “제가 찾아올 테니까, 선배님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선배님? 처음 듣는 호칭이라 다소 어색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잠시 기다리니 이리스가 열 권이 넘는 책을 가져왔다.

    “이 정도면 될까요?”

    “더 있으면 좋겠는데.”

    도시에 어느 정도 머물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모으고 모으다 보니 어느새 베르덴의 주변에 책이 가득했다. 보다 못한 도서관장이 다가왔다.

    “저기 여기는 책으로 탑을 쌓는 데가…….”

    “이게 전부지?”

    “헤엑, 헤엑. 네, 전부예요.”

    이리스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서관장에게 시선을 향한 베르덴이 카드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로릭스 여관 꼭대기 층으로.”

    그날 도서관의 매출은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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