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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6화 (16/366)

16화 도움 (3)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돌기둥 위에 주저앉은 로크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불길한 남자가 자신들을 죽이려 하더니 또 모르는 사내가 나타나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러다 잿빛의 사내가 손짓했고 땅이 치솟아 돌기둥 위에 있게 되었다. 마치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우린 그저 고블린 토벌을 하러 왔을 뿐인데…….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던 도중, 정신을 차린 이리스가 돌기둥을 어루만졌다.

‘이건…… 지형조작인가? 대체 어떻게 이 정도의 규모를…….’

그녀가 알고 있는 위력을 아득히 벗어났다. 한순간에 이렇게 커다란 돌기둥을 만들려면 연산 능력이 4위계 이상인 마법사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거기다 같은 3위계의 마법보다 몇 배나 되는 마력을 쏟아부어야겠지.

어느 것 하나 이리스의 수준으로 가늠할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짝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을 세르겐이라 말한 남자와 공중에 떠오른 잿빛의 사내가 서로 대치하고 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광경이 펼쳐졌다.

전격 계열.

그 속성을 다룰 수 있는 건, 아카데미에서도 교수를 포함해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듣도 보도 못한 마법사의 손에서 펼쳐지다니.

더군다나 아카데미에서 봤던 전격 마법보다도 더욱 강렬했다.

‘굉장해…….’

상황을 떠나서, 순수히 마법사로서 감탄했다.

다음에 보게 된 마법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트리플 캐스팅……?!”

그것도 전혀 다른 세 개의 속성의.

이리스는 저 기술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어지간히 이름을 날린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그녀는 두려움조차 잊은 채, 멍하니 잿빛의 남자를 바라봤다.

다른 모험가들도 슬쩍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가차 없는 마법의 폭격을 보고 숨을 삼켰다.

퍼억!

싸움은 마법사가 남자의 머리를 부수며 끝이 났다. 뭔가 찾을 게 있는지 시체를 뒤적거리던 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냉큼 숨었지만, 이미 들켜 버렸다.

쿠구구구.

서서히 돌기둥이 내려앉았다.

* * *

베르덴은 몸을 움츠리고 있는 모험가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보니 목숨을 구해 준 꼴이 되긴 했는데, 왜 자신이 여기에 있었는지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 굳이 설명해야 되나?’

그럴 필요 없다. 원하는 정보도 얻었고, 값비싼 마법 물품까지 챙겼다.

모험가들에게 딱히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니, 서로 제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이리스를 흘긴 베르덴이 등을 돌렸다. 시체에서도 더 이상 챙길 게 없어 보였다.

말없이 동굴 밖으로 나서려 한 발짝 옮기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가, 감사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일까. 목숨을 구해 준 선의에 대한 대가겠지.

베르덴의 태도를 보고 자신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도 미약하게 남아 있는 경계심과 두려움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지만.

‘……분명 마르테스의 모험가겠지.’

도시 마르테스. 베르덴의 목적지였다.

사전 조사를 했음에도 거대한 도서관이 있다는 것 외에는 마르테스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남작령에서 정보를 얻을 기회는 있었지만, 그보다 위계를 높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공국은 평화로운 나라였으니,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안내역도 있으면 더 좋겠지.’

생각이 바뀌었다.

베르덴이 다시 몸을 돌려 모험가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감사를 전한 이리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혹시 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고블린 토벌 의뢰를 받으셨습니까?”

“네? 아, 네. 맞아요. 고블린이 축사에 피해를 준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고블린 말고 이상한 괴물이 보였는데 돈이 아까워 길드에 말을 안 했다고.”

“……?”

“모험가 쪽은 잘 모르지만 분명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이리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모험가 길드에게 의뢰 시, 정보를 숨기는 건 중죄에 해당한다.

목숨을 담보로 활동하는 모험가들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법이었는데, 사실 그 기준이 애매했다. 몰랐었다고 잡아떼면 되니까.

어쨌든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경우, 의뢰자는 추가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원만히 합의했을 경우지, 마음먹고 모른다고 잡아떼면 모험가 길드에서도 골치가 아파진다. 물질적인 증거가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러나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타당하고 신빙성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실이라고 판명 나는 순간, 길드는 모험가의 목숨값을 책정하고 의뢰자는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돈이 부족하면 강제 집행을 통해 재산을 압류한다. 그래도 안 되면 체포한 뒤, 강제 노역을 보내 버린다.

입증이 힘든 만큼 처벌 수위는 굉장히 높다. 모험가 길드의 소중한 재산이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걸까?

이리스의 의문이 담긴 시선에 베르덴이 세르겐의 시체를 살짝 흘겼다.

“저한테 감사하다고 하셨죠?”

“……네.”

고개를 주억거린 이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빚을 졌으면, 그것도 목숨을 빚졌으면 갚는 게 도리라곤 하지만, 대체 뭘 요구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설마…… 이상한 걸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이리스와 동료들이 불안해하는 끝에, 베르덴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감사는 돈으로 받겠습니다.”

실리(實利).

떠돌이 마법사는 돈을 원했다.

* * *

토벌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이리스 파티는 곧장 이장에게 향했다.

심각한 표정과 싸늘한 어조에 이장은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아. 모른다고 잡아떼면 돼.’

마을 사람들의 입단속은 확실히 해 두었다. 자기들 주머니 사정과 관련되어 있으니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것이다.

모험가들과 마주 앉은 이장이 태연히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험가님들 덕분에 고블린에게서 벗어나게 됐군요. 여기 약속한 의뢰비입니다.”

꼬깃꼬깃한 지폐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리더인 이리스는 물끄러미 돈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침묵에 이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뭔가 문제라도……?”

“부족한데요?”

“예?”

눈썹을 치켜뜬 이장이 냉큼 돈을 집었다. 다시 세어 봤지만 액수는 정확했다.

보란 듯이 지폐를 보여 줬지만, 이리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계약서에 적힌 금액과 같은데 뭐가 부족하다는…….”

“사냥꾼.”

어? 그 한 마디에 이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냥꾼이 목격한 정체 모를 괴물에 대해서 기재하지 않으셨던데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발뺌하셔도 소용없어요. 이미 증언은 확보했으니까요. 원하신다면 길드에 통보할까요? 수사관이 오면 그렇게 모른 척하시는 것도 못 하실 텐데.”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이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무서웠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돈 몇 푼 좀 아끼려고 했다가, 이 나이에 범죄자가 된다니. 죽어도 싫었다.

‘대체 누가…….’

이장은 곧 체념했다. 그래도 아직 살아날 방법은 있었다.

처벌이 목적이었다면, 눈앞의 모험가들은 의뢰비를 받고 도시로 가 신고를 했을 테니.

“워, 원하는 게 뭡니까?”

이리스는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돈이요.”

* * *

이장의 곳간을 털어 낸 이리스들은 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도중에 베르덴을 만나 무려 120만 엘크나 되는 현금을 건넸다. 아깝지는 않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정보를 숨겼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베르덴은 그중 일부를 나눠 이리스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그냥 주는 건 아닙니다.”

일종의 의뢰비였다.

우연히 목숨을 구해 줬다곤 하지만 무일푼으로 이리저리 부려 먹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도시를 안내해 주는 것치곤 엄청나게 많은 돈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이리스는 조심스레 돈을 받았다.

그렇게 어색한 동행이 이어졌다. 자연스레 베르덴과 거리를 벌린 모험가들이 쑥덕거렸다.

“언니, 그래서 이 돈은 뭐야?”

“그러니까…… 이거 받고 도시를 안내해 달라고 해서…….”

“뭐? 그런데 이렇게 많이 준다고? 난 좀 이해가 안 되는데…….”

미르나의 말에 로크도 마일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베르덴은 은인이긴 했지만 수상쩍은 사람이기도 했다.

왜 그때 그 동굴에 있었을까? 죽은 남자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알 수 없었다. 밝혀지지 않은 게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가차 없이 마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란…… 꿈에 나올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아직 모험가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에겐 그랬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세계의 인재들이 한데 모인 아카데미에서도 보지 못한, 으뜸가는 재능을 가진 잘생긴 마법사.

이리스가 베르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마음을 다졌다.

“잠깐 갔다 올게.”

“어, 언니?”

성큼성큼 걸어간 이리스가 앞서 걷는 베르덴의 옆으로 향했다. 마치 마력처럼 푸른 눈동자가 그녀와 마주쳤다.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그러니까…….”

후우. 작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주먹을 움켜잡았다.

“마법 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

황당한 부탁에 베르덴이 말을 잃었다.

* * *

‘난 또 뭐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 자체를 알려 달라는 건 아니었고, 마법 이론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냐는 뜻이었다.

하긴, 몇 달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걷는 도중에 마법을 배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베르덴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하기도 했고, 다른 건 몰라도 마법 이론에 대해선 자신이 있었으니까. 특히 그가 전공한 원소 계열에 대해서라면 어지간한 교수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허락을 받자, 이리스는 물 만난 고기처럼 평소에 공부하던 각종 이론들에 대해 물어봤다.

별로 난해한 건 없었다. 마탑에 들어가기 위해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기초적인 이론들이었다.

베르덴과 이리스.

만난 지 얼마 안 된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에 그녀의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래도 이리스의 표정이 밝아 보였기에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어느새 도시 마르테스에 도착했다.

우선 이리스 파티는 길드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동굴 안에 있던 광대 고블린과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세르겐이란 남자에 대해 보고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럼 내일 오후쯤에 만나도록 하죠.”

베르덴은 도시에서 제일 비싼 여관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돈도 충분하긴 했지만, 이전 마을에서 맛본 닭고기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런 걸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았다.

이리스에게 여관의 이름과 위치를 듣고, 그녀의 파티와 헤어졌다.

베르덴은 대로를 걸으며 도시를 둘러봤다. 듣던 것보다 규모가 꽤 컸다.

‘이 정도면 은행이 있겠는데.’

현상금까지 합치면 수천만이 넘는 현금.

그걸 품에 넣고 다니는 건 여러모로 불안했는데 마침 잘됐다.

마법에는 돈이 든다.

거기다 베르덴은 돈을 물 쓰듯 쓰는 마탑 출신이기에 돈에 대한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상금 그리고 은행 계좌 개설.

여관에 들르기 전에 베르덴이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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