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도움 (2)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베르덴이 정체불명의 남자의 말에서 주요 키워드를 잡았다.
‘실험체 그리고 박사.’
베르덴의 생각이 맞았다.
광대 오크는 인위적으로 변이된 것이었다.
대체 무엇이 목적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대화를 엿듣는 건 어려워 보였다.
남자가 기운을 내뿜으며 모험가들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나설 생각인데, 모험가들이 살해당하기 전에 모습을 보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렇다 할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베르덴이 은근슬쩍 남자가 하는 말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어?”
그렇게 생긴 찰나의 틈. 가장 캐스팅이 빠른 마력폭발로 남자를 날려 버렸다.
‘먹히진 않은 모양이지만.’
“이런. 불청객이 하나 더 있었군요. 실험체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툭툭. 남자가 먼지를 털며 세검을 어깨에 올렸다. 낙법으로 충격을 흡수했는지 먼지만 좀 묻었을 뿐, 이렇다 할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마법사.”
“……마법을 사용하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제 말뜻은 당신의 이름을 물어본 겁니다.”
“빌.”
베르덴이 즉답했다.
금기시된 실험에 관련된 데다가, 살인이 취미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간에게 본명도, 가명도 말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너무나도 성의 없는 대답에 남자가 관자놀이를 씰룩였다.
“제 이름은 세르겐입니다만…… 하, 대화가 재미없군요. 당신이 말한 이름도 가명일 테고. 뭐, 좋습니다. 당신을 죽이고 난 후, 재미없는 마법사라고 기억해 두지요.”
세르겐이 지면을 박찼다.
화염의 화살이 그를 노렸지만 마치 뱀 같은 기민한 움직임에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
베르덴은 당장 판단을 바꿨다.
카앙! 마력방벽에 세검이 부딪쳤다.
일반적인 검과 달리, 세검은 찌르기에 특화되어 있기에 힘을 일점에 집중하는 게 가능했다. 강력한 충격에 방벽에 살짝 금이 갔다.
<충격파>
마력의 파동이 주위를 휩쓸었다.
세르겐은 애써 저항하지 않고, 힘에 이끌리는 대로 뒤로 물러섰다.
“…….”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이다.
영주 성에서 봤던 기사 에녹의 기세보다는 가벼웠지만, 그 이상으로 빨랐다. 마법사를 상대한 경험 또한 많아 보였다.
‘그렇다면 내 식대로 하는 수밖에.’
베르덴이 마력을 풀어헤쳤다.
어떤 마법이든 즉각적으로 시전할 수 있도록 모든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선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서 마력이 흘러넘쳤다.
“단기 결전입니까? 마법사답지 않으시군요.”
마법사는 대부분 오만하다.
검사가 자신의 검을 믿듯, 그들은 몸에 내제된 마력을 믿는다. 그렇기에 마력을 깨우치지 못한 자들을 얕보며 무시한다.
세르겐은 그런 마법사들의 방심을 이끌어 내어 방벽과 함께 목을 꿰뚫어 왔다.
‘이거 옷이 더렵혀질 각오는 해야겠군요.’
방심하지 않은 마법사. 다가가려면 정면에서 날아오는 마법을 피해 내야 한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세르겐은 여유로웠다. 언제나 그랬듯 전부 피해 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세르겐이 세검을 곧게 세웠다. 검 끝이 베르덴의 목을 가리켰다. 곧 이 차가운 금속이 당신의 목을 파고들어 갈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그리고 세르겐의 발끝이 움찔거린 순간, 베르덴의 지팡이에서 빛이 점멸했다.
<겨울 돌풍>
혹한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세르겐이 다급히 옆으로 굴러 직격을 피해 냈다. 미소가 사라진 입가에서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2속성? 그것도 하필 얼음이라니.’
한기는 까다롭다. 서서히 근육과 관절이 얼어붙는 기분은 결코 좋지 않았다.
세르겐이 과거에 얻은 경험으로 판단을 내렸다. 저렇게 광범위한 마법은 마력 소모가 상당하다.
그러니 다음에 올 건, 비교적 효율이 좋은 투사체 형태의 마법.
<아이시클>
파가각! 허공을 가른 고드름이 벽면에 부딪쳤다.
허리를 젖힌 세르겐이 반동을 주어 앞으로 튀어나갔다. 기운을 집중한 속도에 주변 시야가 급격하게 변했다.
연이어 날아오는 얼음 조각을 피하고, 때려 부쉈다. 그 얼음 조각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세르겐이 베르덴의 지척에 도달했다.
“흐읍!”
쉬이익! 섬전 같은 일격.
……하지만 무엇도 닿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력방벽은 없었으니까.
고개를 숙여 피해 낸 베르덴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3속성?!’
“이런……!”
<이그니션>
콰아아아! 불꽃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코앞에서 열기에 휩싸인 세르겐이 겨우 얼굴을 가린 채, 후퇴했다.
화끈거리는 손등과 그을린 옷. 불길을 털어 낸 세르겐이 낮게 웃었다.
“하하…… 마력방벽을 거두고, 신체 능력만으로 제 공격을 피할 줄이야……. 서쪽 제국에 마법과 무술을 같이 다루는 워 메이지(War Mage)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쪽에서 오셨습니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미친 게 분명할 겁니다.”
“…….”
미친놈한테 미쳤다는 소릴 들어 봤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 정도. 하지만 아직 세르겐이란 남자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길게 갈 필요도 없다.
상대의 생각을 뒤집을 만한 마법이면 충분하다. 베르덴이 손가락을 튕기자, 모험가들이 서 있던 지면이 꿈틀거렸다.
“꺄아아악!”
“뭐, 뭐야?!”
쿠구구구! 돌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한순간에 지면에서 멀어진 그들이 놀란 얼굴로 아래를 흘겼다. 낮지 않은 높이에 미르나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세르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안전 확보.”
베르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닿지 않는 거리에서 마법을 쏟아 내는 건, 공통적인 마법사의 전투 방식이었다.
“우습군요. 비행을 쓰면 제 검이 닿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밖이라면 모를까, 이런 동굴 안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저 높이 이상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벽을 활용한다면 더 간단하다. 방금 전엔 한 방 먹긴 했지만, 아직도 마법사를 살해하는 방식은 많이 남아 있었다.
베르덴의 차가운 시선이 세르겐에 향했다.
“바닥이 꽤 축축하던데.”
“예?”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 순간, 베르덴의 손에서 빛이 튀었다. 암시 마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동굴 내부가 훤히 밝아졌다.
치지지직──! 동굴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격렬하게 날뛰는 푸른 빛줄기에 집중되었다.
“……번개?”
고위 속성 중, 생명체에게 절대적인 파괴력을 자랑하는 마법.
세르겐이 아차 하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부서진 얼음 조각이 열기에 녹은 탓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걸?’
당했다.
그걸 깨닫자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세르겐은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구로 달렸다. 웅덩이에서 물이 튀어 옷이 더러워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입구를 코앞에 둔 그때, 동굴의 빛이 사라졌다.
<뇌격>
번쩍! 한 줄기 번개가 세르겐에게 닥쳐 왔다.
“크읍?!”
우두둑.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비튼 탓에 발목이 부러졌다.
그렇게 겨우 직격을 면했지만, 아직 마법은 끝나지 않았다. 바닥에 내리꽂힌 번개가 물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세르겐의 발밑까지.
파지지직!
“끄그그그그그극!”
감전당한 전신의 근육이 경련한다.
핏줄이 터져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괴상한 비명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피가 끓는 감각은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세르겐은 이 정도로 죽지 않았다. 그가 어금니를 깨물고 뒤를 돌아봤다.
전격 계열은 그 위력만큼이나, 마력 소모가 엄청나다. 거기다 그 전에는 광범위한 마법을 연이어 쏟아 냈으니, 분명 저 정체불명의 마법사도 지쳤을 것이다.
‘회복하는 데 약 2분.’
그 시간만 버티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시선의 끝에는 그의 예상과 한참이나 벗어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돌풍>
<다중 대지 화살>
<다중 빙결 화살>
더블을 넘어선 트리플 캐스팅.
노력과 재능이 합쳐진, 소수의 마법사에게만 허락된 전유물. 강력한 바람을 탄 10개의 속성 화살이 세르겐에 육박했다.
파바바바박!
전신에 화살이 스치고, 박혔다. 검을 버리고 팔을 들어 올려 급소는 막아 냈지만,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
베르덴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끝낸다.’
기를 깨우친 자에겐 저런 부상에도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까.
<암석강타>
사람만 한 거대한 바위가 날아갔다.
때마침 세르겐이 몸을 덜덜 떨며 천천히 팔을 내렸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바위를 본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말도 안 돼.”
────콰아앙! 바위와 함께 세르겐이 벽에 틀어박혔다.
전신의 뼈가 모조리 부서지다 못해 으스러졌다.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이유는, 비교적 멀쩡한 머리와 체내에 남아 있는 기 덕분이었다.
그래 봤자 곧 죽겠지만.
베르덴이 세르겐 앞에 내려갔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쿨럭, 쿨럭! 하핫……! 사람을 이 꼴로 만들고 말입니까?”
“파이테 남작령에 저것과 비슷한 오크가 있던데, 그 박사란 자의 작품인가?”
세르겐이 피를 토하며 작게 웃었다.
“아,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당신이 죽이셨군요? 혹시 ‘방주(方舟)’에서 오셨습니까?”
“방주?”
그게 뭐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베르덴의 반응에 세르겐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신다면 됐습니다……. 하, 우연이라. 제가 우연히 죽을 줄이야.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쿨럭, 쿨럭!
쏟아지는 검붉은 피. 시간이 얼마 없다.
베르덴은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박사란 자는 어디에 있지?”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실험에 흥미가 있어서.”
“그렇군요. 그 무지막지한 마법으로 모조리 죽일 생각이십니까? 하핫. 이제까지 많은 사람을 봐 왔지만 당신처럼 가차 없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베르덴의 성격은 10년을 아득히 넘는 마탑의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어두운 감정을 쌓고 또 쌓은 끝에 이뤄 낸 역천. 사방이 적인데 빈틈을 보일 순 없었으니까.
“그래서 대답은?”
“예예. 말해 드리죠. 마지막 가는 길이니 못 할 것도 없으니까요.”
세르겐이 입을 오물거렸다.
퉷. 베르덴의 눈에 날아온 작은 바늘이 마력방벽에 가로막혔다. 세르겐의 마지막 일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역시, 당신은 가차 없는 인간입니다.”
<어스 쉐러>
퍼억! 세르겐의 머리가 분쇄됐다.
역시 육체를 단련해 기를 깨우친 자에겐 방심해선 안 된다. 확실히 목숨을 끊어 내고, 시체를 확인했다. 피에 얼룩진 금색 목걸이가 보였다.
‘암시 마법이 부여된 건가?’
그래서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었군. 비싼 물건이니 잘 감싸 챙겨 넣었다.
뭐가 더 없을까? 하던 그때, 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모험가들이 냉큼 고개를 뒤로 빼냈다.
‘……모험가들이 남아 있었지.’
연구원 출신이다 보니 하나에 몰두하면 중요하지 않은 걸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좀 고쳐야 할 텐데.
베르덴이 손짓해, 솟아오른 돌기둥을 천천히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