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도적 토벌 (1)
4일이 지났다.
베르덴은 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고 별채에서만 생활했다.
도저히 모습을 보이지 않아 감시라고 할 게 없었다. 하인들이 말하길 흡사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식사를 주는 기분이라고.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의미가 없다.
할 수 없이 파이테 영주는 오늘 저녁 식사에 베르덴을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영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주게.”
문이 열리고 베르덴이 들어왔다. 그의 외모에 영주의 눈에 감탄이 비쳤다.
은은한 빛이 반사되는 회색 머리칼과 총명한 청안(靑眼).
평민이 입을 법한 옷을 둘렀으나 본연의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어릴 적 상상으로 떠올린 마법사의 이미지와 똑같았다.
‘왜 콘라드가 그런 말을 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는군.’
저런 얼굴로 도적질이나 한다면 그보다 더한 낭비가 없을 테니.
베르덴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님. 떠돌이 마법사인 애셔라고 합니다.”
“이곳 남작령을 다스리는 파이테 헨로드일세. 손님으로 맞이했는데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군. 자, 어서 앉도록 하게.”
베르덴이 의자에 앉자마자 하인이 서빙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야채를 갈아 만든 에피타이저. 아삭한 식감과 곁들여진 새콤한 소스가 혀를 감았다.
“어떤가, 우리 주방장이 자신하는 에피타이저는.”
“과하지 않고 절제된 맛이 일품이군요. 입맛을 돋우기 위한 음식으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세계에 10개밖에 없는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엘리트임을 입증한다.
베르덴의 경우에는 마법사다운 재능은 없어도 연구 능력이 뛰어나고, 일꾼으로서 그 쓸모를 다년간 마탑에 증명했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는 일은 고작해야 귀찮은 일을 대신 떠맡는 일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마탑에 살면서 온갖 음식을 경험했다.
아무리 못해도 귀족의 식사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식사들. 돈이 썩어 넘치는 마탑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탑은 쓰레기지만 그 맛을 부정할 순 없지.’
이미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베르덴의 혀.
입맛은 웬만한 미식가에 버금갈 정도다.
파이테 영주는 지극히 귀족스러운 베르덴의 예절을 보며 그의 출신을 짐작했다.
역시 단순한 떠돌이 마법사는 아닌 모양이다. 재야에 숨은 고명한 마법사의 제자거나 마탑 출신일 확률이 높다. 특히 후자가.
‘드문 일은 아니지.’
마탑에서 나와 스스로 자립하는 마법사는 더러 있다.
마탑 출신이란 건 일종의 자격증과도 같으니 어디든 갈 수 있겠지. 파이테 영주도 그런 마법사를 바랐다. 이런 시골에 올 리가 없긴 하겠지만.
어쨌든 저 애셔라는 남자는 도적과 관련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파이테 영주는 경계심을 늦추었다. 메인 식사로 나온 스테이크를 즐긴 뒤, 후식을 앞에 두고 대화를 이어 갔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나 보군. 주방장에게 힘 좀 쓰라고 한 보람이 있어.”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지.
영주가 집사에게 손짓하자 그가 현금 다발을 공손히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500만 엘크. 내 친우인 콘라드를 구해 준 보답일세.”
“감사히 받겠습니다.”
베르덴이 돈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오크와 고블린 무리를 토벌한 것치곤 막대한 금액. 그만큼 콘라드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그때, 영주가 말했다.
“그런데 떠돌이 마법사라 했었나? 혹시 괜찮으면 일 하나 맡아 볼 생각 없는가? 보수는 괜찮게 쳐주지.”
내용은 도적 토벌. 영주가 최근 몇 달 동안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말해 줬다.
경청하고 있던 베르덴이 말했다.
“그러니까 도적들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얘기십니까?”
“추측이지. 반쯤 확신한 거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 찾지 못할 리가 없지 않겠나.”
휘하의 기사들로는 한계가 있다. 그들은 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이니.
그렇다고 따로 부탁할 사람도 없다. 문화가 풍부한 도시를 내버려 두고, 이런 한적한 촌에 자리 잡을 마법사는 없었으니까. 특히 지금의 시대에선.
“토벌은 언제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일이네. 괜히 늦췄다간 애먼 피해자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내일이라.
조금만 있으면 3위계에 도달할 것 같은데…….
하지만 영주의 부탁을 단호히 외면하기도 어렵다. 500만 엘크에다가 며칠간 좋은 식사와 잠자리를 대접받았으니까.
그리고 생각해 보면 받아들일 이유가 하나 있었다.
‘도적 무리에 가담한 마법사.’
도적질이나 하는 걸 보면 실력이 그리 높지는 않겠지.
기습으로 죽인 마탑의 두 마법사를 제외하고, 첫 마법전의 제물로는 딱 알맞은 상대였다. 더해서 돈도 벌고.
자신은 있다.
고민하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받도록 하죠.”
“고맙네. 그럼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지. 기사 셋과 병사들을 붙여 줄 테니 가능한 도망치는 도적들이 없었으면 좋겠군.”
영지 내의 사람이 피해를 입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베르덴은 영주와 손을 마주 잡고 악수한 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단련을 끝내고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잠에 들었다.
* * *
이른 아침에 일어난 베르덴은 깔끔히 복장을 갖추었다.
정신은 개운하고, 마력도 충만하다. 당장 전투에 나서도 충분한 컨디션이었다.
하인을 따라 성문 앞으로 나가자 갑옷을 입은 기사 셋과 창을 든 병사 열다섯 명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피아테 남작님의 기사이자 이번 도적 토벌의 지휘를 맡은 에녹입니다. 이쪽은 헤레스, 패릭입니다.”
“애셔입니다.”
중년 기사의 태도는 정중했다.
대체로 3위계에 도달한, 특히 파괴적인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는 세간에서 평기사와 맞먹는 위치에 있다. 콘라드로 인해 이들은 베르덴을 3위계 이상의 마법사라고 여기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내일 오를 경지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일단 도적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을 파악했습니다. 조금 먼 거리기에 도중까지 말을 타고 갈 생각인데 혹시 승마 경험이 있으십니까?”
마탑에 마구간은 없다.
“……아뇨, 없습니다.”
“그럼 저와 같이 타시지요. 아니면 따로 마차를…….”
“같이 타겠습니다.”
무슨 귀족도 아니고, 한 명을 위해 마차까지 동원하는 건 선 넘었다.
에녹의 손을 잡고 말 위에 올라탔다. 다른 기사와 병사도 자신의 말에 올라타 명령을 기다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탁! 발을 차자 말이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마을의 풍경이 보기 좋게 지나갔는데, 문득 입구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저건……?”
“모험가입니다. 저도 제대로 들은 이야긴 아니지만 기이한 오크가 발견되었다는 얘기가 있어서 토벌하러 가는 걸 겁니다. 위험하고 생소한 괴물은 큰돈이 되니까요. 영주님께서 따로 현상금을 걸기도 하셨고요. 금 등급 모험가도 있는 걸 보니 보수가 꽤 크게 걸린 것 같습니다.”
무리의 맨 앞에 선 중년의 검사.
그의 목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플레이트가 걸려 있었다.
‘금 등급 정도면 기사 수준이라고 했던가.’
객관적으로 누가 강하다 할 수는 없지만, 저 모험가가 나름대로 베테랑이란 건 알겠다.
베르덴은 곧 관심을 거두었다. 모험가 무리를 지나치며 마을을 벗어났다.
다시 한번 발을 차자 말이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기사가 다루는 군마라 그런가,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안장이 있는지 없는지 하체 쪽에 상당한 충격이 연이어 느껴졌다.
“익숙지 않으면 많이 아플 겁니다. 그래도 잠시만 참으면 되니 조금만 견디시지요.”
“……얼마나 걸립니까?”
“한 1시간 정도?”
1시간? 이런 시발.
베르덴은 욕지거리가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3위계에 도달했다면 말에 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루…… 아니, 반나절만 미뤄 달라고 할 걸 그랬다고, 후회 아닌 후회가 들었다.
* * *
기사가 되려면 필수적인 조건 중 하나가 기(氣)를 깨우치는 것이다.
신체를 강화하고 더 나아가 들고 있는 무기를 더욱 예리하게 만들어 주는 힘.
제국의 검성이라 불리는 존재는 단칼에 태산마저 가른다는 소문까지 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무(武)에 대한 재능만 어느 정도 갖췄다면 기를 깨우칠 수 있으며, 단지 깨우친 것은 마법사로 치면 2위계 마법에 도달한 정도다.
거기서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야 도달하는 것이 기사의 조건이었다.
누군가 말하길, 기사는 살인에 특화된 병기라 칭한다.
도적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기사 하나면 모조리 참수할 수 있다. 그러나 마법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애셔 님, 혹여 상대 쪽에 마법사가 있다면, 상대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법사가 원거리에서 마법을 쏟아 내면 병사들은 살아날 방도가 없다. 검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기사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러니 마법사의 이목을 완전히 끌 만한 자론 같은 마법사인 베르덴이 적격이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를 제압하는 데 우선하도록 하죠. 생포할 필요가 있습니까?”
“영주님께선 도적단의 절멸을 명하셨습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들은 숲 속에 말을 묶고 경비를 세웠다.
예상지점에 가까워지자 미리 얘기한 대로 베르덴이 마력을 넓게 펼쳤다.
‘……딱히 잡히는 건 없는데.’
여긴 아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젓자 당장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엉덩이에 멍이 든 것처럼 아팠지만 마법사 체면이 있는데 내색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노을 질 때쯤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다.
“동부의 마지막입니다. 여기에도 없다면 하루 쉬고, 서부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는 건 말을 더 오래 타야 된다는 뜻. 베르덴은 제발 이곳에 도적이 있기를 바라며 마력을 펼쳤다.
그러던 순간, 무언가 잡혔다. 이질적인 감각으로 보아, 마법진의 일종이 분명했다.
마력이 오래 닿으면 들킬 것이다. 재빨리 마력을 거둬들인 베르덴이 방향을 가리켰다.
“저곳에 마법진이 있습니다.”
찾았다.
말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 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베르덴이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추더니, 나뭇가지를 들어 경계를 그었다.
“여기에서 한 발짝만 더 넘어가면 마법진이 반응할 겁니다.”
“흐음…… 어떻게 하면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베르덴이 손짓하자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드러났다.
“영지에 이런 게 있었다니…….”
숲 일대를 크게 아우른 거대한 돔. 일종의 경보에 가까운 것으로, 마탑에 있었던 것처럼 닿는 순간 상대를 멸살하는 고도의 마법진은 아니었다.
즉, 마탑주의 마법진을 공략한 베르덴을 막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가느다란 마력의 실을 뽑아낸 뒤, 마법진의 틈을 찾아 욱여넣었다. 그 후 20초도 안 되어, 마법진의 일부가 깨어지더니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이 만들어졌다.
“자, 가시죠.”
“…….”
마법진이란 게 이렇게 쉽게 파훼되는 거였나? 아니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가물거리는 기억을 치운 에녹이 조심스레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갔다.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차례대로 일행들이 들어갔고, 곳곳에 다분한 인적을 따라가자 수십 명의 인간이 조잡한 촌락을 지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두 명의 사내.
안면에 큰 흉터가 있는, 쌍검을 찬 전사와 로브를 두르고 작은 지팡이를 허리띠에 찬 마법사가 도적들을 가리키고 뭐라 지시를 하고 있었다.
척 봐도 평범한 도적들과는 결이 다르다. 분명 두목이겠지.
기습하기 위해, 에녹이 소리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잠시, 에녹 경. 상대 마법사의 경지를 모르는 지금, 무턱대고 기습하는 건 악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마탑의 동력원에 닿기 위해 마법사의 전술마저 자세히 연구했다.
기습에 당한 마법사가 취할 마법은 ‘마력방벽’. 마법사의 방패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은 기습을 막아 내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하지.’
베르덴은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기사 일행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