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파이테 영지
해가 기울기 시작할 즈음, 숲을 빠져나왔다.
밭을 갈고 있던 농민들이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고, 그 주위를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이따금씩 곡식을 훔쳐 가는 고블린을 막기 위함이겠지.
‘내가 살던 마을에서도 저랬는데.’
베르덴은 추억을 떠올리며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목책으로 촘촘하게 둘러싸인 마을과 중심에 자리 잡은 작은 성. 오래되어 보였으나 관리를 잘했는지 나름대로 깔끔했다.
마차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관광이라도 하듯 마을을 구경했다.
술에 취해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람,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 부모님을 돕고 있는 어린아이…… 모두가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 마을은.”
“……평화롭군요.”
철저한 개인주의인 마탑에서 느낄 수 없는 분위기다.
“하하, 그렇죠? 그래서 저는 이 마을을 좋아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니까요.”
비대해진 도시들과 날이 갈수록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의 영지들.
이대로 가다가는 농업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얘기가 오갔지만, 의견을 낸 본인조차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인종과 마수의 위협에서 안전한 삶은 모두가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특히 수도가 그렇다.
태어나 중년에 이르기까지 수도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사람도 있을 정도니. 그렇게 밀집된 인구 속에서 평생 경쟁하며 살아가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 휴가차 오기 좋은 곳입니다. 아니면 어디 한적한 바닷가에서 술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원하시면 제가 잘 아는 가게들을 소개…… 아, 도착했군요.”
성문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마침 앞에 나와 있던 경비대장이 병사 두 명을 이끌고 다가왔다.
“이거, 콘라드 씨가 아니십니까? 얘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하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요.”
“예? 그게 무슨…….”
마차 곳곳에 나 있는 긁힌 자국, 흙으로 더럽혀진 콘라드의 옷. 누가 봐도 습격을 당한 몰골이었다.
말에서 내린 콘라드가 경비대장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도적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괴상한 오크가 아인종 무리를 데리고 나타난 게 아니겠습니까?”
“도, 도적? 오크?”
“예, 예. 기껏 고용한 용병들은 먼저 도망친 데다가 도적들도 냅다 흩어졌죠. 어떻게든 도망은 쳤는데 마차는 뒤집히고 고블린과 오크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때마침 옆에 계신 마법사님이 나타나 삽시간에 아인종들을 쓸어버리셨는데, 저분이 아니셨다면 영주님께서 주문하신 물건은커녕 제 목숨도 챙기지 못했을 겁니다.”
경비대장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향했다.
약간 어두운 회색의 머리칼과 선명한 푸른 눈동자.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내심 감탄을 흘렸다.
시선을 받은 베르덴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애셔라고 합니다.”
“여, 영주 성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마르소라고 합니다. 그…… 젊어 보이시는데 대단하시군요.”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처음 보는 마법사를 조심하라고.
워낙 괴팍한 마법사가 많은 세상이기에 섣불리 대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귀족과 다툰 어떤 마법사가 저택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사건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경비대장의 태도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그나저나 또 도적이라…….”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있긴 한데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런데 저분은…….”
경비대장으로서 신원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마법사를 성안으로 들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콘라드의 은인을 문전박대 하자니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말끝을 흐리자 콘라드가 냉큼 입을 열었다.
“애셔 님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직접 오크 무리를 토벌하신 분이니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으음, 그래도…….”
“일단 성 외곽에 모셨다가, 제가 직접 영주님에게 허락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콘라드는 일개 상인이지만, 파이테 남작의 오랜 친우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런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데 어쩔 수야 있나.
무슨 일이 일어나 불똥이 튀지 않는 걸 바라는 수밖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마르소가 위로 손을 흔들었다.
쇠사슬 끌리는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며, 베르덴을 태운 콘라드의 마차가 입성했다.
* * *
“거의 1년 만이군. 못 본 사이 살이 좀 빠진 듯싶은데?”
“말도 마십쇼. 오크에게 뜯길 뻔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흐릅니다.”
콘라드가 이마를 닦는 시늉을 하자, 파이테 영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네. 나름 잘 관리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그게 어디 영주님의 잘못이겠습니까. 후안무치한 도적 놈들과 짐승 같은 아인종들 탓이지요.”
“말이라도 고맙네.”
뽕! 영주가 직접 와인의 마개를 비틀어 뽑았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달짝지근한 냄새. 고급스러운 와인은 아니나 특유의 향이 있다. 산화되기 쉬워 도시에서 먼 이곳에서는 맛볼 수가 없는 음료다.
이렇게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운송할 수 있는 건, 그의 인맥에선 콘라드를 제외하곤 없다.
애초에 그 가격에 이런 의뢰를 받아 줄 만한 상인도 없고.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거지.’
물론 이쪽에서도 여러 편의를 봐주고 있긴 하지만.
짠. 서로 잔을 마주치고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새콤하면서도 알싸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후. 좋군. 영지를 경영하는 것도 이 와인처럼 술술 넘어가면 좋을 텐데.”
“도적 말씀이십니까?”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벌써 두 차례나 대대적으로 도적을 소탕했다. 평균적으로 1년에 두어 번 정도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고작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또 도적이 들끓는 건 심각한 일이었다.
“며칠 전에 남쪽 숲속에서 목이 걸린 시체들이 발견됐네. 조사해 보니 근처 촌락 사람들이었더군. 촌락은 이미 쑥대밭이 된 상태였고. 수색을 해 봤지만 건진 건 하나도 없었네.”
“음, 혹시 도적이 아닌 게 아닐까요?”
도적은 보통 길 가는 사람을 습격한다.
아무리 작은 촌락이라 해도 쳐들어가 학살한 뒤, 대놓고 나무에 시체들을 내걸다니. 도적의 탈을 쓰고 그렇게까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가 있을 리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자네가 습격받았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뭔가 목적을 지녔다고 하기엔 행동 하나하나에 두서가 없어. 영지에 막심한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나 같은 하급 귀족을 신경 쓰는 사람이 어딨나? 다른 귀족과 마찰을 일으킨 적도 없는데.”
“하긴. 이곳이 탐날 만한 정도는 아니죠.”
“그러니까 남작령이 아니겠나.”
껄껄 웃은 남작이 남은 와인을 단번에 들이켰다. 마늘 향이 가미된 고기를 씹어 삼키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그런데 자네와 같이 온 마법사 말인데, 어떤 사람인가?”
“만난 지 얼마 안 돼 잘은 모르지만…… 신비한 사람입니다.”
특출난 외모를 빼더라도, 사람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서서히 압도되는 느낌이랄까. 특히 마법을 시전했을 때가 그러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 준 미지의 마법사라…… 혹여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건 아닌가? 예를 들자면 도적 집단에 가담했다거나. 그래서 수색을 해도 마법적인 무언가에 의해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예? 에이, 설마요. 영주님께서 아직 못 보셔서 그렇지, 장담컨대 절대 도적질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말로 먹고 사는 상인이지만, 보는 눈도 좀 있지 않습니까?”
콘라드의 말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난 타인에게 보일 만한 믿음이 아니었다.
‘어떤 인물인지 보고 싶군.’
보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갈 정도로 잘생긴 건가?
대개 그런 자들은 여자들이나 등쳐 먹고 사는 법인데……. 거기다 마법사라는 감투까지 썼으니 말솜씨가 없더라도, 사람 몇 명쯤은 가볍게 속여 먹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손님으로 들인 이상, 대접해 주는 것이 집주인으로서의 도리다.
하지만 그는 남작. 공국의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로 현재 공무가 밀려 있다…… 라고 핑계를 대면 당장 얼굴을 마주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그동안 하인들을 통해 마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 될 터.
생각을 마친 영주는 콘라드와 잔을 마주치며, 오랜만에 느껴 보는 취기에 몸을 맡겼다.
* * *
별채에 방을 얻게 된 베르덴은 따끈한 고기 수프와 빵을 저녁으로 대접받았다.
이거 소고기인가? 낮은 온도로 오랜 시간 조리했는지 꽤나 부드럽다. 마탑의 고급스러운 음식에 입맛이 맞춰져 있던 그에게도 납득될 만한 맛이었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얕게 퍼뜨린 마력. 그만큼 효력은 떨어지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숫자가 늘었다. 아마 감시역이겠지.
도적과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보였으니, 갑자기 찾아온 외부인을 경계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헛수고겠지만.”
자신은 도적이 아니니까.
그저 콘라드가 약속한 보수를 받을 겸 귀족과의 연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선량한 마법사다.
그래도 나쁜 건 아니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맛 좋은 식사를 매일같이 대접받는 데다가 병사들이 감시 겸 호위를 해 주니 안전하기도 하다. 조용히 마법을 단련하기엔 최적의 환경이었다.
파이테 영주가 당장 공무가 바쁘다며 하인을 통해 전언을 보냈으니,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빈 그릇을 바깥에 내놓고, 손가락 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문 한가운데 새긴 마법진. 이걸로 도중에 방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마탑에서 가져온 물건들.
대부분 베르덴의 성장을 위한 것들이었다.
재능은 갖췄으니 개화할 시간이 필요할 터.
지금 만들 약물은 그 시간을 압도적으로 단축해 줄 것이다.
‘루트밀의 손, 바르단 허브, 마력꽃의 뿌리. 케트마의 눈물…….’
하나같이 베르덴은 꿈도 꾸지 못할 값비싼 연금술 재료들이다.
이걸 수년간 몰래 긁어모으고, 상하지 않게 보관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막자사발에 넣어 잘게 갈았다.
그리고 미리 끓여 놓은 고농도의 마력수에 털어 넣었다.
1분이 지나고 2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꺼내어 마법으로 차갑게 식혔다. 짙은 녹색빛과 함께 신경이 번쩍 자극되는 냄새.
[MCE-03]
다시 말하면, 마력회로 확장제.
‘3위계에 도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력으로 회로를 자극해 넓히는 것.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을 회로에 담아낼 수 있으면 성공이다.
같은 2위계 마법사를 기준으로, 베르덴의 마력은 방대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력을 발산하는 심장에 한해서였다. 동력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힘을 받아 낼 회로가 제한된 상황.
우물에 물이 가득 차 있더라도 양동이 이상의 물을 퍼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출력을 높이려면 양동이, 즉 마력회로를 넓혀야 한다.
이 약물은 그 회로를 일시적으로 넓혀 줄 것이다.
그 안에 빈틈없이 마력을 담아, 마력회로가 확장된 상태를 일정 시간 유지하면 된다.
‘인체 실험 따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지만.’
마탑의 강제력이 있긴 했으나, 이 약물과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베르덴에게서 비롯된 것.
어차피 지금 하는 짓은 베르덴 외에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주 치명적인 부작용이 존재했으니까.
벌컥.
베르덴이 주저 없이 약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5분이 지났을까, 점차 체온이 오르고 전신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마력을 끌어올렸다.
후우웅.
확장된 회로에 마력이 가득 들어찬다. 푸른 눈동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현재의 활성화 상태를 유지하는 건 상당한 집중력과 마력이 소모되는 일.
부작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커윽……!”
베르덴이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
견디기 어려운 격통이 육체를 쥐어짰다.
이것이 마탑에서 사용하지 않는 이유였다. 위계의 성취를 빠르게 앞당길 수 있어도, 산 채로 불에 타는 것 이상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마법사가 없었으니까.
우드득.
어금니를 깨문 베르덴에게서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한 얼굴이었으나, 마력이 흩어지기는커녕 넘쳐흐른 마력이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자신이 가진 강점, 이 방대한 마력을 조금이라도 더 활용하려면 3위계는 되어야 한다.
그래, 조급하다고 볼 수 있다. 2위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하지만 눈앞에 당장 위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기다려야 하지?
이런 아픔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각오는 이미 7년 전에 마쳤다.
그그그극!
베르덴의 손이 바닥을 끌었다. 살갗이 까지며 손끝에 피가 배어 나왔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 그 감각에 베르덴의 정신이 보다 뚜렷해지며 한층 더 마력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베르덴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길어도 일주일.’
그 안에 3위계에 도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