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역천 (4)
기, 마력, 신성력.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힘. 그중 마력은 가장 보편적인 힘이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다. 현재 세상을 발전시키는 건 누가 뭐래도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러한 발전이 좋은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건 아니다. 미지에 대한 진보엔 미처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법.
마탑의 동력원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하나 이를 설계하고 발명했으며 연구한 마법사들조차 겨우 한 사람, 그것도 가장 미천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에 의해 붕괴될 거라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마탑이 침묵했다.
중심부 어느 곳에서도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주인을 잃은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한입 베어 문 샌드위치가 그릇에 덩그러니 남았다. 마치 사람이 증발이라도 한 듯, 인기척이 사라졌다.
오직 한 곳을 제외하고.
“쿨럭, 쿨럭!”
베르덴이 기침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금이 간 마탑주의 스태프가 형태를 잃고 바스러졌다.
어둠 속에서 멍하니 눈을 껌뻑인 그가 몸을 더듬었다. 아주 천천히.
역천의 마법진은 그대로 새겨져 있었으나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넝마 같던 육체는 어디 갔는지, 새것처럼 탄탄하고 매끈했다.
약물로 인해 줄어들었던 생명력이 넘치는 게 느껴진다. 그 안에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이 가득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했던 마탑주의 마법진이 소멸했다.
역천은, 성공했다.
“1위계를 넘었다…….”
개신(開身)을 하지 않고 스태프도 쥐지 않은, 현 베르덴의 경지는 2위계. 고작이지만 한계를 초월했다.
역천의 마법진으로 인해 망가졌어야 할 모든 것이 멀쩡했다. 아니, 재구성된 육체는 완전히 새로웠다.
더 높은 위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즉 재능이 생겼다.
잠시나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경지를 경험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마도사, 아니 그 이상에 오를 수 있는 미래를.
콱! 주먹을 움켜쥔 베르덴이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그런데 대체 이 마력량은 뭐지?”
2위계라고 하기엔 너무도 방대한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동력원과 하나가 되었던 탓일까?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좋다. 과하기는 하다만 감당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암시>
2위계의 마법. 본래라면 발동 자체가 불발되었겠지만 수월하게 발동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다른 2위계 마법도 전부 사용이 가능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엔 이르다.
계획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성공하는 거니까.
두리번거리던 베르덴이 잔해 속에서 출구를 찾았다. 완력과 <염력>으로 무너진 방벽을 치워 내고 복도를 내달렸다.
관리실로 돌아가자 두 마법사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력이 깃든 종이나 마법 물품까지도.
‘동력원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나.’
예상한 바다. 동력원이 내뿜은 마력은 생물 개개인의 한계를 한참이나 넘어섰으니.
아마 중심부 부근에 있던 마법사들은 죄다 죽었을 것이다. 그 밖에 있던 나머지는 기절했을 것이고.
동정할 생각은 없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이건 복수이기도 했으니까.
옷걸이에 걸려 있던 로브를 뒤집어쓴 베르덴은 앞으로 나아갔다. 곳곳에 널브러진 인간의 흔적들이 발에 챘다. 도중에 쓸 만한 것들이 보이긴 했지만 욕심 때문에 변수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복도 구석에 있는 청소 도구실. 문을 열자 먼지가 휘날렸다.
서둘러 잡동사니를 치우고 낡은 옷장을 옆으로 밀자, 복잡한 술식으로 구성된 마법진이 하나 나타났다.
‘다행히 왜곡된 곳은 없다.’
수년간 마탑이 보유하고 있는 재료들을 긁어모아 만든 탈출구.
과연 정해진 좌표로 무사히 전송될지……. 워낙 고난이도의 마법진이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땅속에 묻히거나 깊은 바다에 수장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잠깐 주춤하던 순간.
쿠웅!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확장된 기감에 거대한 마력이 잡혔고, 시시각각 가까워지며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다.
보헤미른 마탑의 주인, 발로크 베시아스.
그가 정확히 이곳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설마 내가 쓴 마법을 감지한 건가……!”
마탑주에 비하면 한 방울조차 되지 않는 마력일 텐데, 생각 이상으로 터무니없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하나다. 잡혀서 갈기갈기 찢겨 죽거나, 공간을 이동하거나.
보물고에 있던 물건들 그리고 각종 연금술 재료 등이 담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마법진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키이잉──보라색 빛이 점멸하며 몸이 끌려가는 게 느껴진다.
목적지는 마탑주의 눈이 닿지 않은 머나먼 좌표. 빛이 번쩍이자 베르덴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콰앙!
그 직후, 벽이 폭발하며 중년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의 눈동자에 잔해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마법진이 비쳤다.
“공간 이동……!”
으드득. 분노에 찬 발로크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서둘러 추적을 해 보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마법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상 어떤 마법사가 온들 어찌할 방법이 없다.
놓쳤다.
그 사실에 발로크의 눈동자에 한가득 핏발이 섰다.
“감히!”
감히 내 마탑을 엉망으로 만든 데다가 멀쩡히 도망가기까지 해? 만능(萬能)의 마도사라 불리는 자신의 앞에서?
용납할 수 없다.
마탑의 주인으로서도, 마법의 종주로서도.
‘동력원의 폭주와 공간 이동. 절대 혼자서 벌인 것이 아닐 테지!’
아마 다른 마탑은 아닐 터다. 아무리 경쟁 관계라 해도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렇다는 건 보헤미른 마탑과 적대적이며 마탑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진 자들이 분명하다. 그의 뇌리 속엔 그 후보들이 몇 존재했다.
쿠구구구……!
거칠게 날뛰는 마력이 마탑을 뒤흔들었다.
“누구든 상관없다……!”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산산조각 내 죽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일국의 황제라고 할지라도, 덜 자란 아이라고 할지라도.
살아 있음을 후회할 정도로 잔혹하고 잔인하며 고통스럽게.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 이상으로 놈들이 가진 것을 전부 무너뜨릴 것이다.
감히 보헤미른 마탑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리라.
그리고 발로크라는 존재가 누군지 뼈와 영혼에 손수 새겨 줄 것이다.
“반드시! 내가 반드시 찾아내 모조리 죽여 주마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분노에 가득 찬 비명.
콰과과광! 마탑을 휩싼 암운(暗雲)에서 시퍼런 번개가 내리쳤다.
* * *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깊은 숲. 마탑의 눈이 닿지 않는 이곳에 생소한 빛이 터져 나오며 사람 하나가 나타나 흙바닥을 굴렀다.
“크윽…….”
쿨럭! 쿨럭!
공간 이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속이 뒤엉킨다더니, 꽤나 불쾌한 기분이다.
연신 기침을 하며 겨우 속을 가라앉힌 베르덴이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보는 숲인데…….”
8살 이후로 줄곧 마탑에서 생활한 터라 익숙한 장소가 있을 턱이 없지만, 지금 보고 있는 숲의 환경은 보헤미른 마탑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거의 대륙 절반 단위의 공간 이동이 성공했다는 뜻. 역천에 이어 사지 멀쩡히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추적이 붙을 수가 없다. 흔적은 전부 지웠으며, 베르덴이란 1위계 마법사의 존재는 동력원의 폭주로 인해 소멸되었다고 여겨질 게 분명했으니까. 마탑에서 사용하는 마력이 깃든 문서들 또한 마찬가지.
로벨린과 고아원의 원장님에겐 비보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최선의 결과였다.
“하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계획을 예상 이상으로 성공시키고 안전까지 확보한 지금, 베르덴의 웃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이렇게 웃어 본 적은 난생처음이다.
마탑주는 대체 어떤 심정일까? 머리끝까지 화가 났겠지? 어쩌면 애꿎은 마탑을 부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그 제자들이나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어떤 식으로 허망한 표정을 지을지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아…….”
그러나 마탑은 이 정도로 몰락하지 않는다.
동력원의 폭발로 중심부 근처에 있던 마법사가 다수 죽었겠지만, 마탑 전체로 보면 적은 손실이다. 축제 날인 탓에 자리가 많이 비워져 있었으니까.
‘동력원이 소실되었더라도 마탑주라면 대책을 내놓겠지.’
발로크 베시아스란 마법사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만능’의 이명은 결코 허세가 아니다.
확신하건대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보헤미른 마탑을 재건할 것이다.
“그걸로 충분해.”
그가 마탑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동안, 자신은 새롭게 얻은 재능으로 힘을 쌓는다.
적어도 정면으로 발로크를 상대할 정도까지.
때가 되면 직접 찾아가 놈의 고고한 자존심을 철저하게 짓밟을 것이다.
그가 쌓아 온 것을 눈앞에서 무너뜨리면서 동시에 베르덴이란 마법사를 세상에 각인할 것이다.
복수와 마법사의 증명.
그것들만이 베르덴의 유일한 과제였다.
“1위계였던 마법사가 마탑주를 이긴다라…….”
어딘가의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썩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주인공이 베르덴 자신이었으니. 피식 웃은 베르덴이 챙겨 온 가방을 뒤적거렸다.
좌표를 정할 때, 머나먼 공국의 영토로 설정했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할지라도 외딴곳에서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그래서 넉넉한 돈과 더불어 옷과 식수 그리고 다량의 건조식품 등을 챙겨 왔다. 근처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
깨끗한 옷을 입고 그 위에 로브를 둘렀다. 내려다보니 퍽 마법사다운 복장이었다.
만족스러운 모습에 작은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비췄다.
“……응?”
뭐야 이건.
머리가…… 사라졌다. 아니, 대머리가 됐다는 얘기가 아니라 갈색 머리칼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거기다 눈은 또 어떤가. 검은 눈동자가 사라지고 깨끗한 청안(靑眼)이 자리하고 있다.
“육체를 재구성할 때 문제가 있었나?”
재빨리 확인해 봤지만 머리와 눈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똑같았다.
통상 위계를 벗어난 마력량도 그렇고, 어떤 현상이 벌어졌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었지만 눈에 띄는 부작용은 없었다.
뭐, 이론이란 게 원래 그렇다.
머릿속으로 상상도 못 했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는 건 마법사업계에서 별로 드문 일도 아니지.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근데 머리하고 눈 색깔만 바뀌었는데 꽤 괜찮다. 뭐랄까. 신비를 품은 마법사처럼 보인다고 할까. 얼굴은 그대론데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우연히 로벨린을 만나도 그녀가 모르고 지나쳐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빠지거나 시력이 점차 상실되는 것만 아니라면 반겨 줄 만한 부작용이었다.
‘어차피 당장 이렇다 할 대책도 없으니까 내버려 두는 수밖에.’
거울을 집어넣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질겅질겅 육포를 씹어 삼켜 적당히 배를 채운 뒤, 준비해 둔 지도를 펼쳤다.
좌표가 맞다면 북쪽에 사람들이 사는 영지가 있을 터.
일단 안전한 거처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마탑에서 가져온 것들을 쓰는 건 그다음이다.
“그럼 가 볼까.”
베르덴이 숲속으로 발을 디뎠다.
스치는 풀잎과 나무의 냄새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증오스러운 마탑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떠돌이 마법사의 삶.
그것은 어릴 적 마탑으로 향하는 마차에 탄 것 이상으로 가슴 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