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찢는 천재마법사
프롤로그
마법이 상용화된 지 15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세계는 변혁의 시대를 받아들였다.
하늘을 나는 비공정과 대륙을 넘나드는 공간 이동 마법진. 건물 양식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인류의 생활 전반은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의 주축에는 마탑들이 있었다.
한때 오직 마법사들로만 이루어졌던 마탑은, 현대에 이르러선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마력을 깨우치지 못한 자들을 일꾼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 중 간혹 마법적인 재능을 타고난 자들이 보이면 마법사로 키우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아무래도 이 마을은 그른 것 같군.”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 둘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게시판에 공고문을 올린 지 3일이나 지났음에도 일꾼에 지원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 보니 마탑과의 거리가 워낙 먼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잘못하면 아이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으니까.
“여기가 마지막 마을인데 지원자가 한 명도 없을 줄이야. 오랜만에 나들이 나와 좋았다만 마탑에서 크게 한 소리 듣겠어.”
“포기하긴 이르네. 아직 갈 곳이 하나 남았잖은가.”
“고아원 말인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허탕을 칠 게 분명할 텐데…… 그래도 가 보긴 해야겠지.”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에 고아원에서 부모 없는 아이들을 데려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에게 기부를 받아 공개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으며, 자칫하다간 인신매매로 보일 여지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마탑에 지원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어야 했다.
‘그게 가장 어렵지.’
아이는 호기심이 많지만 그만큼 겁도 많다.
둥지를 튼 장소에 애착이 강한 경향이 있기에 설득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고아원장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아원에 방문한 두 마법사.
원장을 겨우 설득해, 우선 간단히 검사만 해 보기로 했다. 마력을 깨우칠 가능성만을 확인하는 것. 일꾼으로 쓸 아이를 구한다고 하면 거절할 게 뻔하니 장차 마법사가 될 재목을 구한다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물론 아무도 안 간다고 하면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오, 결과는 지금까지 중 최상이군.”
“여섯 명이라. 이 중에 한 명이라도 지원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예상대로 선뜻 나서는 아이는 없었다. 고아원장도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고.
결국 두 마법사는 실망한 기색으로 자신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때, ‘베르덴’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아이가 마법사가 두고 간 공고문을 집어 들었다.
[마탑에서 일할 13세 이하의 아이들을 모집한다. 힘든 일이지만 마탑을 위해 공헌해 준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마탑의 일원으로서 받아 줄 수도 있다.]
대가는 4백만 엘크. 촌사람이 몇 개월은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이다.
지원하는 아이에겐 따로 봉급이 주어지지는 않지만, 삼시 세끼 숙식을 제공한다고 한다.
‘좋은데?’
안 그래도 요즘 기근이라 형편이 어렵다. 4백만 엘크가 들어옴과 더불어 베르덴이 빠진다면 분명 고아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기특한 마음도 있긴 했지만, 사실 베르덴은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전직 종군 마법사였던 이웃 할아버지가 손에서 피워 낸 작은 불꽃, 마법.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에 불과했지만 베르덴에게는 달랐다.
마력을 통해 구현되는, 마법이라는 기적.
마치 영혼이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 본 갈망, 그 욕심. 아이의 얕은 어휘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강렬한 감정이 들끓었고, 이윽고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갖고 싶다.’
이건 타고난 본능에 가까웠다. 그때부터 베르덴은 마법에 집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떼를 쓰고, 애를 써도 이웃 할아버지는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마법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고개 한번 끄덕여 주지 않는지.
저녁을 먹은 베르덴은 몰래 고아원에서 빠져나와 여관으로 향했다. 원장님이 알았다간 반대하실 게 뻔했으니까.
갑작스런 방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마법사들. 이내 진심으로 기뻐하며 베르덴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신청서를 작성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베르덴.”
“로벨린?”
로벨린.
베르덴과 같은 고아원에 살고 있는 또래의 여자아이.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떠나려고?”
“……응. 난 마법사가 되고 싶으니까.”
“그럼 나도 같이 갈래.”
베르덴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로벨린은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신청서를 작성하고 나온 그녀가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겠지.’
그녀를 말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혼자 가는 것보단 둘이 가는 게 훨씬 낫겠지. 원장님이 많이 아쉬워하겠지만 말이다.
고아원으로 돌아온 둘은 입 밖으로 마탑의 마 자도 꺼내지 않았다.
이후 며칠이 지나 이른 새벽, 베르덴과 로벨린은 각자의 침대 위에 지폐 뭉치와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마탑으로 향하는 마차에 탑승했다.
마을에서 멀어지며 보게 된 일출(日出).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탑은 어떤 곳일까?”
“글쎄? 마을하고 많이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8살의 베르덴과 로벨린은 마탑의 일꾼이 되었다.
1화 역천 (1)
보헤미른 마탑은 원소 마법을 주류로 다루는 엘리먼 학파 소속으로, 최근 눈에 띄게 발전해 나가고 있는 마탑이다.
특히 7년 전, 보헤미른 마탑의 한 마법사가 발표한 한 논문 덕분이었다.
한 속성에 고착화된 마력회로를 친화적인 속성을 통해 좀 더 유연하게 만들고, 반대되는 속성을 역이용해 다른 속성에 대한 가능성을 여는 다중 연속성 이론.
그 파장은 전 마탑을 강타했다.
논문을 발표한 마법사는 즉시 마탑주의 직속 제자가 되었고, 여러 마탑이나 아카데미에서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강연을 해 달라며 러브 콜이 쏟아졌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가능성을 열어 준 그에게 감사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길, 노력만 한다면 두 속성의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거니까. 특히나 재능 없는 원소 계열의 마법사들이 열광했다.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
탁.
베르덴이 빗자루를 청소 도구함에 집어넣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거닐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마법사 둘이 그를 보고 비웃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력폭발>
퍼엉! 베르덴의 눈앞에서 자그만 폭발이 일어났다.
위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통증이 일었다. 시큰거리는 코를 부여잡은 베르덴이 마법사를 바라봤다.
“뭘 봐? 쓰레기가.”
“…….”
베르덴은 말없이 일어나 제 갈 길을 걸었다. 등 뒤로 저열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베르덴의 현 위치였다.
왜 이렇게 됐을까.
다중 연속성 이론. 베르덴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논문을, 믿었던 사람에게 도둑맞아서일까, 아니면 도둑맞은 데다가 되레 파렴치한 도둑으로 몰려서일까.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강대한 힘 앞에 작은 진실 따위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베르덴이 겪은 고통 중 일부에 불과했다.
저녁이 되어, 마탑의 중상층으로 올라갔다.
숨겨진 보안을 통과하자 각종 기이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연구실이 나타났다. 결코 앞으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그의 등에 새겨진 마법진이 강제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배정된 침대에 눕자 늙은 마법사가 다가왔다.
“준비됐나, 베르덴?”
“……예.”
고개를 끄덕인 마법사가 연구원에게 손짓했다.
“그럼 시작하지. 실험 번호 874번. 마력회로 활성제 MCB-1374 투약.”
“투약했습니다.”
“반응은…… 좋군. 이어서 기억 확장제 M-34 투약.”
혈관에 꽂힌 주삿바늘을 통해 불투명한 액체가 들어온다.
피가 들끓고 역류하는 감각이 엄습했다.
“……!”
베르덴이 입을 쩍 벌린 채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통제를 벗어난 눈꺼풀. 강제로 기억이 확장되며 언제나 그랬듯 지난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 * *
8살에 마탑에 들어간 베르덴은 로벨린과 함께 고된 노동을 하며 마탑에 이바지했다.
둘은 어떻게든 마법사의 눈에 뜨여 마법을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때론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그리고 13살. 마탑에서 진행하는 적성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베르덴의 성장 한계는 1위계. 1-9위계까지 존재하는 마법 체계 중 가장 최하위의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반인보다도 성장 가능성이 없었다.
검사를 진행하던 마법사가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1위계라니. 다른 의미로 대단하군.”
마탑에 있어 베르덴은 일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투자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배움의 기회만 제공하고 잡일꾼으로 써먹었다.
그에 반해 로벨린은 마탑의 예비 마법사로 발탁되었다.
한계 위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으나 베르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건 분명했다. 소문을 들어 보니 특수한 형질의 마력회로 또한 타고났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로벨린과 베르덴은 강제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베르덴은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1위계 마법을 배운 그는 마법사들의 어질러진 방을 정리해 주며 책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렇게 조금씩 부족한 지식을 채워 나갔다.
남들에겐 턱없이 부족한 시간과 얕은 이론들이었으나 베르덴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파생된 마법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마법 계열의 뿌리만 알면 어렵지 않아.’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닌 순수한 마법의 원리 자체를 이해했으니.
마치 조각난 퍼즐을 끼워 맞추기라도 하듯 머릿속에 자리 잡은 마법 체계. 이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베르덴은 주저 없이 진로를 결정했다.
‘마탑으로.’
보다 많은 마법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기 위해.
15살이 되던 해, 그 지식을 바탕으로 일꾼에서 마탑의 말단 연구원으로 승진했다.
마법사들의 연구를 보조해 주거나 물품들을 정리하는 일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베르덴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론적으로 나날이 성장해 갔다.
새롭게 마주한 이론과 연구는 10일이 채 지나지 않아 베르덴의 것이 되었다. 그 집념과 뛰어난 이해력 앞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연구실에 들어간 지 고작 3년 만에 일반 연구원에게 열람이 허가된, 마탑 도서관에 존재하는 수많은 서적의 핵심을 모조리 터득했다.
이러한 사실은 마탑의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가장 친한 로벨린조차 알지 못했다.
베르덴이 알리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말해 준다고 해도 쉽게 믿어 주지도 않을 테니. 훗날 모두가 경악할 성과를 발표해 자신의 능력을 보란 듯이 증명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론만큼은 다른 마법사에 비교해도 독보적이라고 자부할 때쯤.
베르덴은 진정으로 마법사로서 인정받기 위해, 자신만의 이론을 담은 논문을 써 내려 갔다.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였다. 1위계의 능력으론 이론을 증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로벨린에겐 부탁할 수 없었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체가 특별한 존재였기에 베르덴의 이론에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가까이 지내던 마법사에게 증명을 부탁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이론을……!”
경악한 마법사는 그 자리에 서서 베르덴의 이론을 완전히 정독했다.
눈을 부릅뜬 마법사가 이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베르덴을 향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덴, 너는 천재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 이건 기존의 원소 마법 체계를 뒤엎을……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이거라면, 이거라면 분명히 모든 마탑에서 인정받을 거다. 그 마탑주께서도 인정하실 정도로! 어쩌면 제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베르덴의 이론에 감탄했고, 베르덴은 인정을 받아 좋았다.
‘그런데 거기서 뒤통수를 맞을지 몰랐지.’
발표 전날, 논문이 사라졌다.
그리고 증명을 맡겼던 마법사가 자기가 새롭게 정립한 이론이라며 냉큼 논문을 발표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당장 마탑 중심부에 달려가 이의를 제기했지만, 고작 1위계 마법사의 말 따위 들어 줄 곳이 아니었다.
마침 측근들과 함께 지나가던 마탑주를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그래서 네가 그 다중 연속성 이론의 저자라는 건가?”
“네, 네! 마탑주 님. 허락해 주신다면 처음부터 전부 설명을…….”
그때, 옆에 있던 마법사가 마탑주에게 말을 전했다.
베르덴이 1위계 마법사라는 걸 들은 마탑주의 시선에 순간 경멸이 서렸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마탑주가 물었다.
“다중 연속성 이론은 수백 년 전에 주장되었던 원소의 근원 이론으로부터 기인했더군. 정말로 네가 그 이론을 만든 장본인이라면, 당장 이 자리에서 그 핵심을 500자 이내로 설명할 수 있겠지?”
무려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이론을 그렇게나 줄이라니. 그것도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은 불가능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마탑주 역시 그러했다. 자신들 또한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베르덴은 달랐다.
‘반드시 설득해야 해.’
마탑주에게 직접 자신의 능력을 보이는 것.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마탑주가 원하는 것, 그 이상의 답변을 내놓았다.
수백 번이나 정독했으며 그때마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백지에 완벽히 서술할 정도로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오.”
마탑주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베르덴에게 말했다.
“이틀 뒤 밤에, 32층에 있는 연구실로 오너라.”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고개를 바닥까지 숙인 베르덴이 환하게 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탑주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기에.
재능이 없더라도 노력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실현했으니까.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보헤미른 마탑의 비공식적인 연구실.
이곳엔 어떠한 윤리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마탑의 발전을 위해 희생될 뿐.
마탑주가 마법진으로 온몸이 속박되어 있는 베르덴을 바라봤다.
“결과는 어떤가?”
“한계 위계는 최악입니다만, 마법적인 지식은 굉장히 뛰어납니다. 연산 능력이나 기타적인 부분도 그렇고요.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재능이란 하늘이 내려 준 불가침의 영역이니. 그래도 나의 마탑을 위해 일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겠지.”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저 능력으로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다 죽을 바엔, 마탑에 도움이 되고 죽는 것이 훨씬 보람찬 일이지요.”
“자네도 참 당연한 소릴 하는군.”
미소를 지은 마탑주가 손짓했다.
“시작하라.”
마력회로 활성제와 기억 확장제.
몸속으로 들어간 약물이 베르덴의 기억력과 전신의 마력회로를 강제로 활성화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상태에서 베르덴은 온갖 지식을 강제로 주입받았다.
마법진, 마법에 대한 논문, 마법 물품 등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글자와 그림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저주처럼.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끄럽군. 안정제 투입.”
“그만! 그마아아아아안!”
“음, 벌써 면역 반응이 일어나는 건가. 어쩔 수 없군. 강제 마법진, 콜젼(Coercion) 활성화.”
[침묵하라]
“……!”
머릿속에 떠오른 명령. 반항이라도 하는 순간, 마치 영혼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상상도 못 할 격통이 엄습했다.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마법진을 만들어라]
[논문의 이론을 검증하라]
[마법 물품을 감정하라]
[혈관에 약물을 주입하고 스스로 반응을 관찰하라]
[새로운 포션을 창조하라]
[마탑을 위해 생명을 바쳐라]
베르덴이 쌓아 온 지식과 생명력, 그 전부가 마탑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
마탑주가 직접 작성한, 베르덴의 등 한가운데 새겨진 마법진의 강제력 탓에 일말의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덕에 마탑은 예상보다도 비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아주 좋군. 1위계에 불과한 쓰레기치곤 아주 쓸 만해. 이론만 본다면 천재, 그 이상의 반열이군.”
“하지만 마탑주님, 이대로 가단 약물의 부작용으로 생명력이 고갈되어 곧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흠, 그건 안 되지. 아직은 안 돼. 지금의 상태만 유지한다면 보헤미른 마탑의 순위를 한층 더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데, 당장 이 좋은 물건을 망가뜨릴 수야 없지. 실험은 7일에 한 번으로 줄이는 게 좋겠군.”
“평소에는 어떻게 할까요?”
“원래 하던 일을 하게 해라. 모든 행동에 강제력을 일으켰다간 자아 자체가 상실되어 능률이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 어차피 내가 새긴 마법진 탓에 입도 뻥긋 못 할 테니 문제는 없다. 물론 자해를 하는 것도, 도망을 치는 것도 말이야.”
베르덴은 이들에게 소모품에 불과했다. 오래도록 쓰다 단물이 다 빠지면 버려지는 그런 것.
연구에 참가한 어느 누구도 베르덴이란 물건을 걱정하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고통과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 속에서, 베르덴은 절망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그저 마법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모두에게서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고통과 무력감. 그 혼란 속에서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어느 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 단순히 재능이,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걸 깨달은 순간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베르덴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분노로 뒤덮였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논문을 도둑질해 간 놈.
내 재능을 비웃고 이용하는 마탑의 마법사들.
마지막으로 나를 이 지옥으로 밀어 넣은 마탑주까지.
한 명의 마법사로서.
놈들이 쌓아 온 걸 전부 무너뜨리고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리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해.’
베르덴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했다.
이 빌어먹을 마탑에게 복수하려면 누구도 넘보지 못할 힘과 재능이 필요하다. 피폐해진 정신에 서서히 이성이 돌아왔다.
“계획이 필요하다.”
지금 베르덴의 기억 속엔 방대한 양의 마법적 지식이 담겨 있다.
노력으로 쌓은 것과 놈들이 강제로 욱여넣은 것들까지. 그 전부를 이용해야 한다.
제정신을 되찾은 베르덴은 숱한 실험 속에서 마탑주가 기대한 만큼만 보여 주고, 그 이상의 능력은 철저히 숨기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강제력이 일부 반발하긴 했으나 머릿속이 짓이겨지는 고통 따위로는 그를 강제할 수 없었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증오심이 그걸 가능케 했다.
그렇게 7년간 버티고 또 버티면서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만을 위한 이론을 새로이 창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역천의 이론이.
‘때는 멀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베르덴.
그의 눈이 마법사들을 향해 조용히 번뜩였다.
* * *
평소의 베르덴은 언제나와 같이 마법사들이 어지럽힌 실험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시약들을 전용 용기에 담고, 비커를 깨끗이 닦았다. 익숙한 손놀림에 물기 하나 남지 않았다.
묵묵히 일하고 있던 중, 벌컥 문이 열렸다.
“베르덴.”
붉은 머리칼과 수려한 외모를 가진 여성, 로벨린.
베르덴과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3위계에 도달한 천재 마법사다. 유일하게 마탑에서 베르덴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녀가 다가와 당당하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게 뭐지?”
“보면 몰라? 나, 이번에 마법도시 비렌테로 유학 가게 됐어. 마탑에서 오직 5명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지. 너도 알겠지만 내가 좀 대단하잖아?”
로벨린이 팔짱을 끼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작 자랑질을 하러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다.
“대단하네. 그래서 용건은?”
“칫, 싱겁긴……. 유학 기간이 최소 육 개월인데 동행하는 마법사들은 죄다 밥맛없는 놈들밖에 없어. 너도 알잖아? 권위에 찌든 머저리들이 어떤지.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
로벨린이 머뭇거리며 베르덴의 얼굴을 흘겼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뭐?”
베르덴의 물음에 로벨린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수행원으로서 고용하는 거니까. 나는 같이 말동무할 사람 생겨서 좋고, 너는 마법도시로 가서 뭔가를 배울 기회도 생기고…… 어때? 생각 있어?”
무릇 마법사는 별종투성이지만, 그중에서도 로벨린은 또 달랐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다른 마법사들이 베르덴을 손가락질하든 어떻든 간에 어렸을 때처럼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를 대했다.
로벨린은 마탑에 하나밖에 없는 베르덴의 친구이며 유일하게 그를 믿어 주는 사람이었다. 1위계에 불과한 베르덴을 마법사라고 여겨 주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녀의 차가운 외모 속에 숨겨진 상냥함은 따뜻했다.
‘하지만 너는 몰라.’
이 마탑에 감춰진 어둠 속에서 베르덴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었는지.
약물에 의해 수명이 깎여 가며 원치도 않는 일을 강제당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지난 7년간 그가 무슨 계획을 생각해 냈는지.
로벨린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마법진의 강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그녀에게 알려 줄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휘말리면 그녀 또한 위험해질 테니.
베르덴이 로벨린에게 미소 지었다.
“미안. 거절할게.”
“역시 받…… 뭐?”
“나는 여기가 어울려.”
어질러진 실험실에서 말하는 베르덴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결코 웃는 게 아니었다.
단호한 거절.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입을 뻐끔거리던 로벨린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베르덴을 잘 알았으니까.
“……알았어.”
다음 날, 로벨린은 마차를 타고 떠났다.
마중도 나가지 않은 베르덴은 창문 밖으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봤다.
‘계획은 순조롭다.’
로벨린이 떠남으로써 걸림돌은 사라졌다. 그녀만큼은 결코 복수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로벨린이 없는 마탑에 어떠한 미련도 없다.
누가 죽든, 무엇이 무너지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생각대로 흘러갔다.
베르덴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비좁은 창고 안에 있는 작은 벽. 손가락으로 그 위에 복잡한 암호문을 새기자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기동하며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탑주의 절대적인 마법진으로 보호받고 있는 마탑의 벽. 이곳은 그 ‘틈새’.
마탑의 주인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감지할 수 없는 베르덴의 유일한 안식처다. 겨우 20평 남짓한 이 공간에는 그가 지난 7년간 쌓아 온 노력의 집대성이 놓여 있었다.
벽을 가둔 메운 기하학적인 마법진과 메모들. 바닥은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중심에 선 베르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곧 시작이다.”
실행 날짜는 마탑주가 마탑을 비우는 축제 날.
남은 시간은 6일. 그 안에 모든 방해물을 배제하고 완전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축제 당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