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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화. 영문을 알 수 없는 하이신스 (367/367)


366화. 영문을 알 수 없는 하이신스
2023.08.30.


도미스는 자신이 뭘 들었는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안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것이다. 그녀 역시 듣고 충격을 받았으니. 그래서 눈사과도 못 구하고 무작정 냅다 뛰지 않았던가.


“안야 씨. 지금 날 놀리는 거지?”

도미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안야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야. 홀린을 만나서 들었어.”

“홀린? 아아…… 홀린. 그자.”

“너무 놀라서 눈사과를 가지고 오다가 떨어뜨렸어.”

“…….”

도미스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안야 씨. 오리고기를 줘.”

“먹을 거야?”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칼라인 얘기? 카리센에서. 눈사과가 카리센 특산물이래. ……넌 어떻게 안 거야? 3년 전에나 나온 음식이라던데.”

“먹는 걸 도와줘. 카리센에 가겠어. 칼라인을 찾아야겠어. 내가 직접.”

“하지만 도미스. 칼라인은 지금 많이 행복하대…….”

도미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칼라인이 행복한 건 중요하지 않아, 안야 씨.”

“어?”

“중요한 건 내가 행복하느냐야. 그리고 난 칼라인을 가져야 행복해.”

“!”

 

* * *

라틸은 백화를 찾아가 그 덕에 성기사단장들이 궁전을 들쑤시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고맙다고 전했다.

거리낄 건 없지만, 그래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헤집고 다니면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다고.


“아닙니다. 실제로 제가 어떤 위치를 알려주는 바람에 벌어진 일인걸요.”

라틸은 은근슬쩍 떠보았다.


“단백 경이 그러던데. 경이 공주에게 어떤 위치를 알려주고, 거기에 로드일지도 모르는 수상한 이가 산다 했다며.”

“예.”

“진짜인가?”

백화는 씩 웃었다.


“거기서 수상한 자를 본 건 맞지만, 그게 로드인진 알 수 없지요. 진짜라면 진짜고 가짜라면 가짜일 겁니다. 거기에 계속 그 수상한 자가 있는지도 모르고요.”

“아아. 그렇군.”

라틸은 그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서, 다시 하렘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온실을 지나쳐 가고 있자니, 아까처럼 자이오르가 다시 뛰어왔다.


“폐하. 폐하.”

라틸이 돌아보자, 자이오르가 약간 거리를 두고 서서 두 손을 모았다.


“아까 말씀드리려 했는데 잠깐 까먹은 게 있어서요.”

“뭔가?”

“윌랑 왕자가 성기사단장들에게 제가 수상하단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기르골 님이 알아보라 한 건데, 성기사들 쫓아간다고 까먹으신 거 같아서요.”

“정말인가?”

“심증뿐이라. 정확하냐고 물으신다면 확신은 못 합니다. 어찌할까요?”

라틸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자이오르에게 고맙다 하고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그런데 막 방 앞에 도착해보니, 오랜만에 클라인이 그 앞에 죽치고 앉아 있지 않은가.


“클라인?”

그가 복도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건 꽤 오랜만이라, 라틸은 황당하기보다는 웃음이 나와서 다가갔다.


“요즘 안 이러더니. 오늘은 웬일이냐?”

클라인은 대답 대신 라틸을 원망스레 바라보더니 슬픈 목소리로 탓했다.


“폐하께서 저와 라나문, 대신관을 제외한 후궁들을 불러 놓고서 다 같이-.”

라틸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이미 야금야금 새어나간 이야기겠지만, 굳이 한 번 더 듣고 싶진 않았다.

라틸은 그를 방 안에 데려가고서 문을 닫은 뒤 물었다.


“그걸 이제 듣고 온 거야?”

“폐하께 여럿이 한 침대에 오르는 게 좋은지 여쭌 건 저인데. 어떻게 올리기는 다른 사내들만…….”

“안 올렸어. 헛소문이야. 잠깐 얘기 좀 나눈 거야.”

“어디서요?”

“침대에서…….”

“거 보세요!”

클라인이 울상을 짓자, 라틸은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좀 나눈 게 다야.”

“저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대신관은 근육 부피가 커서 못 부른 거야. 걔까지 침대에 다 같이 모이면 비좁잖아.”

“저는요? 그럼 저는 왜 안 부르셨습니까? 라나문 그놈도 근육이 부풀진 않았는데요?”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라틸은 클라인을 달래다가, 대체 이게 뭔가 싶어 한숨이 나왔다.

기르골도 그렇고 클라인도 그렇고. 어째 후궁이라고 데려온 이들이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게 아니라 인생에 스릴을 주고 있나.

좀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그런 후궁은 과연 없는 건가? 그런 후궁은…….


‘타시르.’

라틸은 순간 머릿속을 지나간 이름에 놀라서 클라인의 팔을 꽉 잡았다.

* * *

그 시각. 칼라인은 카리센에서 급히 달려온 홀린을 만나고 있었다.

홀린이 칼라인에게 급히 온 건 안야를 만난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단장. 내가 카리센 수도에서 누굴 봤는지 알아? 안야였어. 아니, 그 안야 말고. 왜, 도미스 님이랑 같이 다니던.”

칼라인은 동굴에서 보았던 안야를 떠올렸다. 그 동굴은 다나산에 있었고, 다나산은 카리센과 타리움 사이에 있는 나라였다.

그럼 안야는 다나산에 있다가 카리센으로 이동한 건가?


“나도 봤다.”

“어? 정말?”

“무슨 동굴에서. 관이랑 있던데.”

“뭐라고 해?”

“꺼지라 하더라.”

“정말?”

홀린은 고개를 기웃하며 말했다.


“나한텐 단장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던데. 그래서 단장은 후궁이 됐다고 했어. 혹시나 싶어서 로드 이야기는 안 했어.”

칼라인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쪽을 먼저 떠난 건 안야였고, 또 실제로 만났을 때 안야는 칼라인을 배척하는 듯 굴었다.

어쩌면 로드의 나이트이면서도 로드의 보호를 받은 그를 원망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녀가 이쪽을 멀리하고 싶어 하는데, 칼라인이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잘했다.”

“어떻게 할 거야, 단장?”

“내가 어떻게 할 건 없지. 알아서 잘 지내길 바랄 수밖에.”

“잘 지내는 거 같지 않아서.”

무슨 소리냐는 듯 칼라인이 쳐다보자, 홀린이 좀 민망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안야 말이야, 단장. 음식을 훔쳐 먹고 있었어.”

“!”

“안야 정도 솜씨면 뭘 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대체 왜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상황은 나빠 보이더라.”

홀린이 떠난 뒤, 칼라인은 심각해져서 자신이 보았던 동굴과 그 관을 재차 떠올렸다.

그 관. 라틸의 말처럼 정말 안야가 지내는 관이었나? 대체 어떻게, 뭘 하면서 지내고 있는 거지?


 

* * *

안야는 도미스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미스가 식사를 끝내자, 안야는 그녀가 관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조심조심 도왔다.

관 밖으로 나온 도미스는 이리저리 발을 움직여 보더니 곧 마음에 드는 듯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어때?”

“움직일 때 감각이 이상해.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익숙해지고 있어. 이제 내 몸 같아.”

약 30분 정도를 그렇게 관 주위를 돌던 도미스는 마침내 몸을 움직이기 쉬워지자, 안야를 재촉해 카리센에 가자고 졸랐다.


“좀 더 쉬었다 가는 게 안 나을까?”

“도착해서 쉬면 돼.”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도미스를 더 붙잡을 수도 없었다. 안야는 도미스를 업고서 카리센을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마침내 카리센의 수도에 도착했다.


“내려줘. 이제 내려줘.”

안야가 도미스를 내려주자, 그녀는 흥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이 변했네.”

500년 전의 카리센은 이렇게 크고 화려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의 카리센은 수많은 사람들로 넓은 도로가 꽉 차 있었다.

그보다 더 넓은 길에서는 마차가 돌아다녔고, 보이는 건물들은 죄다 높고 휘황찬란했다.

도미스는 주위를 신이 나서 둘러보다가 마침내 한 궁전을 발견하자 활짝 웃으며 멈춰 섰다.


“저기에 칼라인이 있다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도미스는 어둠을 틈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야는 심장이 조마조마했지만, 도미스는 거침없었다.


“도미스. 내 뒤에서 따라와. 넌 아직 몸이 성치 않잖아.”

안야가 수시로 말했지만, 도미스는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그녀는 이 내부를 아는 것처럼 보였다.


“아닌가?”

완전히 아는 눈치는 아니었다. 갔는데 가로막힌 벽이 나오기도 했고, 본인도 가다가 고개를 기웃하며 돌아서기도 했으니.

하지만 몇몇 군데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길을 잘 찾아서, 안야는 더욱 의아해졌다. 3년 전부터 유행했단 눈사과도 잘 알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두 뱀파이어가 인기척을 감추고 어둠을 틈타 돌아다니자, 궁정인들은 그들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마침내 후궁들이 모여 사는 곳을 발견한 도미스는 신이 나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방을 하나하나 다 뒤진 그녀는 곧 얼굴이 험악해졌다.


“없잖아.”

칼라인은커녕 이곳엔 죄다 여자들뿐이었다.


“칼라인이 없어.”

안야는 도미스에게 가만히 있으라 하고서, 지나가던 하녀 하나를 잡아챘다.

하녀는 어둠 속에서 손이 나타나 자신의 목을 움켜쥐자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손에 입이 틀어막히자 말을 할 수 없었다.

안야는 안광을 빛내며 하녀를 공포로 조용하게 만든 다음, 하녀가 조용해지자 입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여기 후궁 중 칼라인이란 후궁이 어디 있지?”

“네?”

하녀는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이 무서운 침입자들이 황당한 질문을 하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칼, 누구요?”

“칼라인.”

“그게 누군데요?”

“똑바로 말해. 다 알고 왔으니.”

“카리스미슈 님은 있는데…….”

“이름이 다르잖아!”

“그니까요!”

정말로 하녀가 억울해 보이자, 도미스가 가만히 지켜보다 나섰다.


“남자 후궁은? 남자 후궁을 말해. 그가 가명을 쓴 걸지도 모르니까.”

영리한 추측이었으나, 하녀로서는 더욱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남자 후궁 같은 게 어딨어요? 우리 폐하 후궁은 다 여자입니다.”

“똑바로 말해.”

도미스가 재차 재촉했으나, 하녀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정말이에요.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다 그럴 거예요!”

“정말 같은데요.”

안야가 슬쩍 말하자, 도미스는 다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럼 황제가 어딨는지 말해.”

“뭐 하시려고요?”

“말해.”

“폐하께선 좀비에게 물려 쓰러진 후로 내내 의식이 없으세요. 폐하를 찾아가도 별수 없어요!”

“말이나 해라.”

하녀에게 황제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들은 뒤, 그녀가 소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기절시켜 빈방에 넣어둔 도미스는 황제가 있단 쪽으로 걸어갔다.

안야는 기척을 감추고 따라가며 물었다.


“황제는 왜? 일이 너무 커지는 건 좋지 않아, 도미스. 깨어나자마자 바로 전쟁을 할 셈이야?”

“어쩌면 칼라인은 정식 후궁이 아닐지도 몰라. 황제의 비밀 연인 같은 거고, 후궁은 별명일지도 모르잖아, 안야 씨.”

“아아! 그래, 그렇겠다. 그런데 황제가 좀비한테 물렸다며?”

“좀비한테 물렸으면 좀비가 되어야지, 왜 잠들어 있겠어? 거짓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서둘러 이동해 황제의 방을 찾아갔다.

방 안은 불을 단 하나도 켜 있지 않은 데다 커튼까지 쳐두어 몹시 깜깜했다. 하지만 둘 다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었다.

도미스는 누워 있는 남자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야. 이 남자 정말 잘생겼는데.”

안야가 감탄했으나, 도미스는 아무리 잘난 얼굴이어도 칼라인 외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봐. 숨을 쉬고 있잖아. 역시 좀비가 되지 않았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눈을 감고 있던 하이신스가 번쩍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문이 발칵 열렸다.

하이신스는 도로 눈을 감았고, 도미스와 안야도 얼결에 몸을 숨겼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이니 황후였다.

아이니 황후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하이신스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서 들고 온 촛불을 탁자에 내려놓고 하이신스에게 다가갔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그를 지켜보다 가는 게 요즘 그녀의 일과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립된 처지가 마치 자신 같아서.

그때.

번개가 쾅 내려치는 듯해 고개를 돌린 그녀는, 창가에 선 까만 그림자가 하이신스의 위로 드리워진 걸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놀랍게도 그곳엔 자신이 거울에서 보던 얼굴이 무섭게 웃고 있었다. 도미스가.

놀라서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도미스가 웃으면서 아이니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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