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안야는 500년 전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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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화. 안야는 500년 전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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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화. 안야는 500년 전 사람이라
2023.08.27.
차라리 칼라인이 술주정뱅이가 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놀랍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궁이라니.
게다가 500년 전에는 남자 후궁이 없었던지라, 안야의 머릿속에서는 위험한 상상이 벌어졌다.
“이, 이럴 수가. 왜 갑자기 그렇게 된 거야? 도미스가 죽어서? 그래서 충격으로…….”
“아, 그게 말이야.”
홀린은 타리움의 황제가 뱀파이어 로드라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로드의 위치에 대한 건 아직도 비밀이었다. 아니, 로드가 나타났단 것도 비밀이었다.
타리움 본사 쪽 뱀파이어들은 언제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홀린 같은 흑사신단 카리센 지부 쪽 뱀파이어들은 아군인데도 황제가 로드란 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뭘 하면서 지내는지도 모르는 안야에게 이 얘기를 바로 해주긴 좀 그랬다.
그녀가 흑사신단으로 와 다시 한번 로드를 위해 살아가겠다면 말을 해주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
“으응.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우린 단장님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좋아.”
안야에게 2차 충격이 내리꽂혔다. 후궁이 된 칼라인이 행복하다고!
멍하게 서 있자니, 홀린이 안야가 떨어뜨린 납작해진 음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저거 음식. 떨어졌는데. 괜찮아?”
대답하기 전, ‘도둑 잡아라!’ 하는 소리가 들리며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안야는 허둥지둥 그 자리를 피했다.
홀린은 주저하다가 종업원들을 막고 사정을 물어본 뒤 대신 돈을 냈다. 이후 새로 눈사과를 사서 가져왔지만, 안야는 보이지 않았다.
‘숨어서 지내는 건가.’
홀린은 옛 동료가 그리 비싸지 않은 음식 하나 사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해졌나 싶어 마음이 아파왔다.
‘단장한테 이 얘길 전해야겠다.’
* * *
“누가 전한 얘기요?”
단백과 연활, 청월 세 성기사단장은 뚱한 표정으로 자이오르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뭐가요?”
단백이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세 사람은 밤새도록 흙에 파묻혀 있었다. 몬스터를 잡으러 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그래도 산 채로 흙에 묻혀 있던 경험은 그녀조차 처음이었다.
그 고생의 원흉 2가 자이오르이니, 말이 좋게 나갈 리가 없었다.
“내가 수상하단 얘기.”
“누가 뭐랍니까.”
“어젯밤. 날 찾아와서 계속 약속을 잡으려고 해댔지. 바쁘다는 데도 나오라 우기면서.”
“…….”
“내가 바본 줄 아는가? 수사할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했을 거요. 안 그러고 낮에 만나자 하는 건 날 의심해서 그런 거 아니요.”
자이오르의 날카로운 항변에 연활이 비꼬았다.
“어젯밤에도 이렇게 야무지게 안 수상하게 굴어 주시지요. 그러면 오늘처럼 싫은 사람들끼리 붙어 다니진 않아도 됐을 텐데요.”
기르골의 명령으로 자이오르가 그들의 수사를 도와 붙어 다녀야 하는 게 싫은 듯했다.
하지만 자이오르 역시 싫긴 마찬가지였다. 기르골이 시키니 그대로 할 뿐.
“어제 보았겠지만 우리 기르골 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거든. 나중에 기사단으로 온실 수리 비용을 물어내라 하기 전에 밝히는 게 좋을 거요.”
청월이 차갑게 말했다.
“여보세요. 우릴 집어던진 건 그쪽 기르골 님입니다.”
자이오르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대답했다.
“우리 기르골 님이 그런 걸 상관하는 성정이 아니시라.”
세 성기사단장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자이오르는 길은 잘 안내했지만, 내내 분위기가 이래서야 수사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정보를 캐내서 뭘 머리로 정리하려고 해도, 옆에서 내내 구시렁구시렁 툴툴대니, 툭 하면 거기에 말려들게 된다.
“꼭 그쪽이 우릴 안내해줘야 합니까?”
참다못한 청월이 물었지만, 자이오르는 비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싫지만 그래야 합니다. 우리 주인님 명령이라.”
* * *
“주인은 이상하시군요.”
라틸은 칼라인을 앞에 앉혀놓고 머리카락을 땋다가 고개를 들었다.
칼라인이 여기에 온 건, 라틸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불러서였다. 아무래도 그자들이 궁전 안을 철저히 조사하고 다니니만큼 싱숭생숭해서.
“응?”
칼라인은 정자세로 앉아 주스를 빨대로 마시고 있었다. 라틸이 머리카락을 만질 때마다 과하게 움찔거리기에, 일부러 쥐여준 것이다.
평소 사람 음식을 잘 안 먹으려 하기에 아예 못 먹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지, 막상 라틸이 쥐여주자 칼라인은 주스를 잘 마셨다.
붉은색 무언가를 주스에 한 방울 섞긴 했지만…… 그건 모른 척해주자.
“제 머리카락이 좋으십니까?”
“그럼! 예쁘잖아.”
“머리카락만 예쁩니까?”
“그럼!”
“…….”
“다른 데는 잘생겼지.”
칼라인의 입술 끝이 올라가는 걸 보며, 라틸은 다시 그를 끌어당겨 머리카락을 땋았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핑계를 대고 쫓아내십시오.”
“난 내 백성들이 어지러운 일에 안 엮이길 바라.”
“폐하께선 좋은 황제이십니다.”
“좋은 황제가 되고 싶어.”
칼라인의 머리 양옆을 다 땋은 라틸은 히히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웃다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난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기분이 이상하더라.”
“제가 주인을 어떻게 보는데요?”
“모르겠어.”
“주인이 먼저 꺼낸 말인데.”
라틸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웃으면서 그냥 칼라인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침대에 네 명이 함께 누워 달란 이야기는 잘 하시더니.”
“그건 가짜로 눕는 거잖아.”
“전 충격 받았습니다. 정말로 그런 걸 좋아하실까 봐.”
“난 변태가 아니야.”
라틸은 단호하게 말하면서, 다 같이 누워 있으니 참 뿌듯했단 감상은 평생 비밀로 가져가기로 했다.
그러고 있자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고 종을 치자, 성기사단장 세 명이 들어오다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라틸은 칼라인에게 일어나라 신호하고서, 성기사단장 세 명에게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단백은 얼굴이 빨개진 채 다가와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로 보고했다.
“조사하러 돌아다니고 있는데요, 갑자기 백화 경이 다가와서는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자기가 폐하와 공주님에게 피해를 준 걸지도 모르겠다고 막 어두운 안색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말씀이신가 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거든요, 그러니까 백화 경이 표정이 막 어두워져서요, 전에 형룡 경이 여기에 왔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게 백화 경이래요, 근데 꼭 폐하를 의심하는 것처럼 말하길래, 진짜로 의심스러운 데는 다른 데 있는데 여기서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놓고 말했대요, 그리고 백화 경이 수상하다 여겨서 주목하던 장소가 있는데 그 위치를 알려줬대요, 그 위치를 듣자마자 형룡 경이 뛰쳐나갔다 하더라고요.”
라틸은 눈을 깜빡였다. 박수를 쳐야 할 것 같았다. 굉장한 딕션이었다.
“숨차지 않나?”
“예. 예. 괜찮습니다.”
단백의 귀까지 빨개진 걸 보다가, 라틸은 칼라인에게 나가 있으라 고갯짓했다.
아무래도 이 순진한 성기사단장은 라틸과 칼라인의 애정행각에 뇌가 한계까지 몰린 모양이다.
칼라인이 나가자, 단백은 그제야 호흡하면서 슬쩍 고개를 들어 라틸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괜찮네. 그러면 우리에 대한 의심은 풀린 건가?”
“네. 어디로 가셨는지 들었으니 그쪽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다행이야.”
라틸은 가슴에 손을 얹고서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과장되게 내쉬며 말했다.
“이젠 또 오고 그러지 말게.”
장난스럽게 말하자 셋 다 농담이라 여기고 하하하 웃었지만, 라틸은 진담이었다.
‘일단 부적을 바꿔치기한 일은 어떻게 잘 넘어갔구나. 다행이야. 백화가 잘 나서줬어.’
* * *
실종된 사람을 찾는 일이라, 일행은 저녁인데도 곧장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윌랑 왕자는 그 모습을 먼발치서 보며 작게 욕을 뱉었다.
“쓸모없기는.”
반면 라틸은 일이 잘 해결되자 기분이 좋아져서, 그들을 친히 배웅하기 위해 궁전 정문까지 나갔다.
“조심해서들 가게.”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는 좋은 일로 방문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세 성기사단장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동안, 라틸은 흐뭇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백화를 칭찬하기 위해 신이 나서 하렘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온실 주위를 지나갈 때였다.
“폐하, 폐하.”
뜻밖에도 자이오르가 이쪽으로 황급히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
가까이 온 자이오르는 라틸을 보며 ‘이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초조하게 있다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폐하. 기르골 님이 아까 그자들을 쫓아간 것 같습니다.”
라틸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뭐? 왜?”
“역시 분이 덜 풀리신 게 아닐까…… 하고 추측됩니다.”
“파묻어서 하루를 묵혔으면 됐지, 아직도 안 풀렸다고?”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라틸은 얼굴이 파래졌다.
“밀로 공주가 여기 들렀다 행방불명 됐는데. 이번엔 다른 성기사단장 세 명이 행방불명되면 타리움 궁전이 어떻게 보이겠어?”
라틸의 뒤에 선 서넛도 대번에 날카롭게 말했다.
“그냥 두어선 안 됩니다, 폐하.”
자이오르가 ‘그냥 안 두면 어쩔 건데?’ 하는 표정으로 뚱하게 쳐다보았다.
라틸 역시 화는 났지만 같은 생각이었다. 그냥 안 두면 어쩔 건데?
라틸은 지끈거리는 골머리를 누르며 물었다.
“따라가서 파묻어 버릴 거래? 뭐 어떻게 할 거란 말은? 없었어?”
자이오르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서, 라틸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시지요, 폐하. 기르골 님이 흥분하지만 않으면 그래도 꽤 머리가 좋으십니다. 꼬리 밟힐 일 없이 잘 처리하실 겁니다.”
“어떻게?”
“따라다니면서 틈새를 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라틸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당장 칼라인이나 서넛에게 그 동굴 위치를 알려주고, 기르골이 선 넘는 행동을 못 하게 말리라 하고 싶었다.
문제는 칼라인과 서넛 둘 다 기르골보다 약하단 점이었다. 자기들끼리만 있게 되면 기르골이 둘에게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둘을 따라 보내는 건 위험했다.
‘젠장! 그놈은 진짜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
사고를 치려거든 제발 티라도 안 나게 쳐야 할 텐데.
* * *
“도미스. 도미스.”
안야는 얼른 접시를 들고 관으로 다가갔다. 도미스는 여전히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듯, 떠나기 전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 안야의 목소리를 듣고는 희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도미스는 코를 킁킁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눈사과를 구해 왔어? 왜 오리고기 냄새가 나지?”
“저기, 눈사과를 구했는데 엎어져서. 대신 오리고기를 가져왔어.”
안야는 그렇게 말하고서 도미스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도미스가 온 힘을 다해 뿌리치는 바람에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도미스는 관 바닥에 머리를 쿵 박고는 눈을 부릅떴다.
“아파!”
“미안해 도미스. 네가 갑자기 치니까-.”
“안야 씨.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야?”
“그게…… 내 탓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쌍방 과실로 할까?”
안야는 중얼거리고서 웃으면서 오리고리를 내밀었다.
“자, 이거 먹고 얼른 기운 차리자.”
“안야 씨나 먹어.”
그러나 도미스는 이번에도 단호했다.
“난 눈사과가 먹고 싶다고. 그게 먹어보고 싶단 말이야. 다른 음식을 가져오려면 비슷한 거라도 가져오던가. 내가 500년 만에 깨어나서 오리 뜯고 있어야겠어?”
“!”
신경질적으로 외친 도미스는 곧 녹을 것처럼 아름답게 웃으며 두 손을 뻗었다.
얼결에 안야가 그 손을 잡자, 도미스가 솜처럼 부드럽게 속삭였다.
“안야 씨. 배가 고파. 다시 눈사과를 구해다 줘. 응?”
안야는 알겠다고 벌떡 일어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자신이 왜 눈사과를 안 구하고 돌아왔는지 뒤늦게 떠올리고서 얼른 도로 들어왔다.
오자마자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도미스가 신경질을 내서 잠시 잊었던 것이다.
“왜 그냥 와?”
“도미스. 네가 궁금해해서 칼라인 소식을 조금 알아봤는데.”
도미스의 목소리와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안야는 조심스레 관 곁으로 갔다.
도미스가 속눈썹을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칼라인이 왜?”
“저기…… 어떤 황제의 후궁이 됐대.”
“!”
“저기, 칼라인은 네가 죽은 줄 알잖아. 그래서 상처를 받았나 봐. 이젠 여자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거 같아. 그 남자가 칼라인을 행복하게 만들어줬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