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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화.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기르골 (365/367)


364화.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기르골
2023.08.23.


윌랑 왕자의 말을 들은 성기사단장 셋은 쉬려던 계획을 바꾸었다. 그들은 무기를 빠르게 꺼내기 좋도록 차림새를 점검하고서, 기르골이란 후궁이 지낸다는 온실로 가보았다.

뱀파이어가 정말 시종으로 위장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만약 뱀파이어가 시종이라면, 그 주인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세상에 누가 밤에만 활동하는 시종을 곁에 둔단 말인가.


“실례합니다.”

온실 문을 두드리자,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리고 창백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실 안을 드나들 수 있는 건 기르골이란 후궁과 그 시종뿐이라 했으니, 이 작자가 아마 시종일 것이다.

남자는 보기에도 무척 창백하고 생기가 없었으나, 피부색이 이런 사람도 있기에 성기사들은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진 않았다.

단백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사용했다.


“실례합니다. 기르골 님의 시종이신가요?”

“그런데요.”

“밀로의 공주님이 실종된 일 때문에 조사 중입니다. 아, 물론 폐하께도 허락받았고요. 그 일로 탐문할 게 있어 그러니 내일 오후 두 시 정도에 만날 수 있을까요?”

단백이 사용하려는 방법은 바로 낮에 만나보는 것이었다. 뱀파이어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니까. 만약 여기서 거절한다면, 상대는 꽤 수상쩍은 인물일 터.


“그건 안 되겠는데.”

시종이 대번에 난색을 표하자 연활과 청월이 시선을 빠르게 주고받았다.

단백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어? 왜요? 그때 바쁘십니까?”

시종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기르골 님의 시종은 나 하나뿐이라. 낮에는 너무 바쁩니다.”

“시간을 많이 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 잠깐도 바빠요.”

“그럼 저희가 여기로 오겠습니다.”

“주인님은 외부인이 이 안에 들어오는 걸 싫어하십니다.”

“문 앞에서 얘기하면요?”

“시간이 없습니다.”

이쯤 되자 정말로 수상하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낮에 만나는 걸 피하고 있지 않은가.

단백이 요리조리 그래도 계속 말을 걸어보는 동안, 연활은 뒤쪽으로 빠져서 아주 작은 성수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성수를 손바닥에 몇 방울 묻힌 다음 비비고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 시종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렇군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단백은 연활이 갑자기 작별을 청하자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가 손을 내미는 걸 보자 뭘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시종은 이번에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모르는 사람들하곤 손잡지 않습니다.”

역시 이자는 수상하다! 확신한 청월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수를 꺼내 시종에게 부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팔을 기울이기 전. 그의 손이 허공에서 잡히는가 싶더니, 청월이 온실 안쪽으로 날아갔다.


“뭐야!”

단백과 연활은 놀라서 옆을 보았다. 언제 나타난 건지, 키가 몹시도 크고 수려한 백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청월이 부으려던 성수병이 들려 있었다. 단백이 ‘누구냐’고 묻기도 전, 남자는 성수병을 자기 손안에서 부숴버렸다.


“이게 뭐야.”

그러고는 씩 웃더니 단백과 연활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것들은 뭐고.”

 

  
내내 뚱하게 있던 시종이 얼른 말했다.


“무슨 공주 실종을 조사하러 왔단 자들입니다, 주인님. 와서는 자꾸 시간을 내라 손을 내밀어라, 온갖 요구를 해댔지요.”

단백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자,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 한 손으로 청월을 던져버렸다.

성수를 손에 흠뻑 적시고서도 멀쩡하지 않았다면, 단백은 저자야말로 뱀파이어라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발 남자는 아주 멀쩡했다.

그때 연활이 갑자기 백발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자! 저자 그자잖아!”

단백이 쳐다보자, 연활이 단백의 어깨를 찰싹찰싹 두드리며 외쳤다.


“저자, 기억 안 납니까? 쇼드 폴리에서 난동 부리고 간 그잡니다! 현상 수배서에서 봤잖아요!”

단백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단백은 쇼드 폴리에 가지 않은 지 이미 몇 해니까.

하지만 연활이 거짓말하는 건 아닐 거다. 그럼 저자는 범죄자인 건가?

단백이 생각을 마치기 전. 백발이 연활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아가를 본 적이 있어.”

“아가?”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그려 넣는 그림이 있거든. 거기에 얼굴이 그려져 있었어.”

활짝 웃으며 뱉은 말에, 연활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 전. 이번에는 연활이 날아가 청월 옆을 굴렀다.


“!”

백발이 연활도 한 손으로 잡고 던져버린 것이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단백에게 닿았다.

단백은 황급히 무기를 꺼내 들었으나, 눈 깜짝할 사이 연활의 옆으로 던져졌다. 세 성기사단장이 나란히 온실 바닥에 던져진 것이다.

시종은 좋다고 손뼉을 쳤다.


“자이오르. 셋 다 묻어.”

하지만 기르골의 명령을 듣자 더 박수칠 수가 없었다.


“네? 묻으라고요?”

“나란히 묻어. 꽃 세 송이가 새로 피겠네.”

빙그레 웃은 기르골은 그 말을 끝으로 자기 침실로 걸어갔다.

시종은 바닥을 구르는 세 성기사단장을 힐긋 보고서, 기르골을 쫓아가며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주인님?”

“지금은.”

“머리까지 묻을까요?”

단백과 청월, 연활은 그 대화를 들으면서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꿈틀거리는 것 외엔 하지 못했다.


“그래, 머리까지.”

“하지만 주인님. 저자들을 죽이면 폐하께서 그 옆에 주인님을 묻으려 하실 텐데요…….”

그 말을 듣고서야 기르골은 멈춰 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안 되지.”

“그렇죠. 그럼…….”

“목까지 묻어.”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네!”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듣고 우리를 추궁하러 왔나 알아내. 멀쩡히 잘 있는 우리한테 온 이유가 있을 거야.”

 

* * *

다음날. 성기사단장들이 어디를 수색하고 있나 궁금해진 라틸은 사람을 시켜 그들을 찾게 했다.

하지만 성기사단장들은 아무 데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갔나?”

의아해서 찾아봤으나 분명 떠난 건 아니었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이 마구간에서 쉬고 있었으니.

라틸은 기르골이 찾아와 “예쁜 꽃이 피었는데. 구경갈래?” 하고 물어본 뒤에야, 세 성기사단장이 기르골의 온실에 피어난 걸 알고 펄쩍 뛰었다.

라틸은 식겁해서 온실로 뛰어갔다.


“으!”

온실에는 성기사단장 셋이 일렬로 어깨 정도까지 파묻혀 있었다.


“목까지 묻으라 했는데. 내 시종이 말을 안 듣네.”

기르골의 설명을 들은 라틸은, 그의 동그란 뒤통수에 꿀밤을 먹이고 싶어졌다. 이거 진짜 미친 건가. 물론 미쳤지만.


“당장 풀어줘.”

“너무 거슬리던데.”

“거슬려도 풀어줘. 내 허락받고서 조사하고 다니던 거였는데, 네가 이러면 어떡해?”

라틸의 지시를 듣고서야 기르골은 성기사단장들의 머리를 잡고서 무 뽑듯이 흙에서 뽑아주었다.

세 성기사단장은 헐떡거리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밤새 묻혀 있는 것만으로도 몹시 괴로운 모양이었다.

라틸은 혀를 차고서 그들에게 사과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네. 우리 막……내 후궁이 성격이 좀 안 좋아서.”

세 단장은 기르골이 웃으면서 내려다보자 뭐라고 항의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야 ‘쇼드 폴리에서 가장 현상금이 높은 이를 왜 후궁으로 들이신 건지’ 라던가 ‘성격이 안 좋은 수준이 아니다’ 던가,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하였지만 당장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 태도에 라틸이 난감해하고 있자니, 내내 가만히 있던 기르골이 빙그레 웃고서 나섰다.


“아가씨. 저 세 단장은 내 시종을 의심하는 거 같더라고. 뱀파이어인가 아닌가. 그래서 내 시종에게, 오늘 하루 저 셋을 따라다니면서 오해를 풀어주라 했어.”

그 말에 성기사 셋 모두 놀라서 기르골의 시종을 보았다. 어제는 그렇게 낮에 안 만나려 하더니. 낮에 나오겠다고?

하지만 시종은 멀뚱하고 화난 얼굴로 수긍했다.


“네, 제가 저 셋을 안내하고 다닐 겁니다.”

라틸은 자이오르가 성기사단장 셋을 데리고 나간 뒤에야 기르골에게, 뱀파이어 시종이 낮에 돌아다닐 수 있던 비결을 들었다.

뱀파이어가 낮에 햇빛을 받아도 괜찮게 해주는 약이 있는데, 게스타가 이 약을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럼 여분으로 만들어서 계속 바르고 다니면 되지 않아? 왜 이제야 써?”

“만들기도 어렵고, 조제에 재료도 천문학적인 액수로 들어가거든.”

“아.”

라틸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으나, 기르골의 돌발 행동에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번에는 어떻게 잘 해결이 되었지만. 기르골이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좀 곤란할 텐데.


“그런데 어떻게 한 거야?”

“뭐가.”

“들어보니 성수병을 깨서 성수가 손에 쏟아졌다면서. 그런데 넌 왜 멀쩡해?”

 

* * *

한편 그 시각.

안야는 눈사과란 걸 구하기 위해 동굴을 나섰다. 여전히 안야는 눈사과가 뭔지 몰랐지만, 도미스가 먹고 싶다니 구해주고 싶었다. 500년 만에 먹는 음식 아닌가.

그러다 안야는 마을 사람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눈사과라면 카리센 특산품을 말하나?”

“카리센?”

“응. 본 적은 없는데, 전에 상인들이 거기서 유행하는 음식이란 얘기를 했지.”

카리센으로 간 안야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 눈사과라는 게 3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음식이란 것이다.


‘그럼 도미스는 이 음식을 어떻게 아는 거지? 500년이나 관 안에만 있었는데?’

안야는 얼떨떨해졌다. 도미스가 그녀의 눈을 피해 벌떡 일어나 카리센에 다녀올 리도 없었다.


‘일단…… 사서 가자.’

의아하긴 하지만 먹고 싶다니 가져다 줘야지. 그 생각을 하던 안야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단 걸 깨달았다.

피는 사람들에게서 빼낸 거고, 오리고기는 다 구워졌길래 그냥 들고 달아난 거였다. 그러면 눈사과도 그렇게 해야 할까?

‘눈’이란 글자가 들어가는데. 설마 녹는 음식은 아니겠지. 녹는 음식은 뱀파이어의 속도로 달려가더라도, 이동 도중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제발 그런 음식은 아니기를 바라며, 안야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눈사과를 구할 수 있단 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막 눈사과를 훔쳐서 달아나는 그녀를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어? 안야?”

안야는 뛰다 말고 돌아보았다.


“안야 맞네!”

밝게 외치면서 달려오는 이는 한때 함께 행동했던 뱀파이어 홀린이었다. 한때라고 해도 500년 전이지만.

반가워하며 달려온 홀린은 안야를 보더니, 사슴처럼 껑충거리다 물었다.


“세상에, 여기서 널 볼 줄은 몰랐다. 어떻게 지내? 잘 지내? 뭐 하고 지냈어?”

“그냥 나는…….”

안야는 머뭇거렸다. 원래라면 절대로 위치를 말하면 안 되는데. 봉인이 깨어지고 도미스가 깨어났다.

상황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비밀로 남겨야 할지, 말해도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안야는 도미스가 ‘칼라인이 어디 있냐’고 계속해 묻던 걸 떠올리고 물었다.


“칼라인은 어디서 지내?”

“아 단장? 단장은…….”

갑자기 홀린의 입술이 양옆으로 찢어지더니, 그가 굉장히 웃긴 이야기를 떠올린 듯 배를 잡고 낄낄대서 안야는 놀랐다.


“왜? 왜 그래?”

전에 보니 다친 것 같진 않던데. 게다가 부하 뱀파이어들도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이상한 반응이지?

어리둥절해 있자니, 홀린이 웃음을 참느라 두꺼비 같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은 지금 후궁이 되었지.”

“!”

안야는 가까스로 구한 눈사과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궁? 웬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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