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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화. 혼란스러운 안야 (364/367)


363화. 혼란스러운 안야
2023.08.20.



 
공주가 여기서 곧장 향한 곳은 다나산에 있는 동굴이었고, 그 안에 있던 건 빈 관과 안야였다. 혹시 공주는 안야를 로드로 오해한 걸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대로 쭉 살아 있었다면, 안야는 약 500살인 뱀파이어가 아닌가.


‘여하간 백화가 그 위치를 공주에게 알려준 게 나한테 해로운 건 아니야. 백화가 정말로 거기에 로드가 있다고 여기건 아니건, 일단 나는 로드가 아니라 확신하고 있단 거잖아?’

만약 도미스의 기억 속에 백화가 있었단 걸 몰랐다면, 라틸은 백화가 동굴에서 오래된 뱀파이어를 발견하고 그쪽이 로드라 착각한 거라 여길지도 몰랐다.


“그렇군.”

어쨌든 무어라 대답은 해야 했다. 라틸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조사해 보게.”

‘나는 저자들이 떠나면 백화에 대해 조사해야겠어. 당장 내 적이 아닌 건 확실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라틸이 흔쾌히 허락하자 단백이 감동해 인사했다. 매번 찾아와 귀찮게 구는데도 시원스레 구는 데 정말로 감격한 듯했다.


“단.”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라틸은 선을 하나 그었다.


“조건이 하나 있네.”

“예?”

“아이니 황후가 대신관을 노리고 있어. 그 외에도 대신관은 여러번 암습에 시달렸지. 공주의 시녀가 있는 곳까지 대신관을 보낼 수는 없네.”

단백은 난처해졌다. 그녀는 황제가 ‘황후가 대신관을 노리고 있다’ 주장하는 데 난감해졌고, 대신관을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데 당혹스러워졌다.


“그럼 피아르 경을 여기로 보내는 건요? 그건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건 괜찮네.”

이러면 우선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며 온화한 척 웃었다.
 

* * *

성기사들이 도착해 황제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니,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첫날부터 조사한답시고 이 시각에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다간 강대국에 미움을 사게 될 것 같아서, 세 성기사단장은 오늘은 고된 몸을 쉬게 하고, 내일부터 조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 급하게 이동하느라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몸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로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연활은 라틸을 두둔하는 쪽이었다.


“사실 난 모르겠어. 대적자인지 로드인지 하는 그 황제는 그렇다 쳐도. 여기엔 대신관에 백화랑술, 대적자까지 다 있다고. 내가 로드라면 주위에 적을 쌓아두진 않아.”

“넌 로드가 아니잖아.”

“로드라면 그럴 거라고.”

“근데 자넨 로드가 아니잖아.”

“시비 거나?”

“시비가 아니라, 로드 사상은 우리랑은 다를 거라 말하는 거지.”

“로드가 사상이 달라도 바보는 아닐 거잖아 이 멍청이야.”

단백은 자기들끼리 작게 싸워대는 두 성기사단장을 곁눈질했다. 연활은 여기에 로드가 없을 거라 무게를 두는 반면, 청월은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여기는 눈치였다.

단백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저도 폐하는 로드가 아닐 거라 여깁니다. 형룡 경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청월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러고서 죽었지요.”

단백은 발끈해서 화를 내려 했으나, 연활이 먼저 끼어들었다.


“실종된 거다 멍청이야.”

단백은 인상을 찡그리고서 청월에게 물었다.


“청월 경은 폐하가 로드라 여기십니까?”

“로드라 여기는 건 아닙니다. 아니라고 확신할 필요 없단 거지요. 그렇게 라트라실 황제에게 유리한 말을 전하자마자 죽다니. 참으로 공교롭지 않나요?”

“그야…….”

그런데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으며 가는 그들을,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사람이 불렀다.


“성기사단장들이오?”

세 사람은 멈추어 서서 그들을 부른 이를 보았다. 화려하진 않으나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누구신지……?”

단백이 묻자, 청년은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윌랑에서 유학 온 왕자, 이이사라요.”

단백은 얼결에 같이 인사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저 왕자가 왜 자신들을 부른 건지 깨닫지 못했다.

다른 두 성기사단장도 마찬가지여서, 뚱한 표정으로 왕자를 보기만 했다.

그러나 왕자는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척 웃더니 손으로 건물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손님용 궁전에서 머무실 거요? 괜찮다면 저와 잠시 얘기를 나누지 않겠소?”

단백은 손을 저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왕자님. 저희가 지금은 좀 피곤해서요. 며칠 동안 계속 말을 타고 왔거든요.”

“아주 중요한 일이라 그렇소. 잠시면 되오.”

왕자가 저렇게까지 말하자, 세 사람은 마지못해 그를 따라갔다.

왕자는 자신의 방 안에 셋을 들여보내 준 다음, 하인에게 차를 가져오라 이르더니 긴 소파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할 말이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에 들렀다가 자리폴시 공주가 행방불명 되었단 말을 들으니 나서야 할 것 같아서 불렀소.”

단백은 맞은편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실은 내가 하인 몇 명을 밀정으로 여기에 심어두었소.”

그런 밀정이 없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밀정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단백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 왕자가 왜 굳이 밀정 이야기를 꺼내지?


“그 밀정 중 하나가 내게 이상한 말을 했는데…… 기르골이라고, 새로 들인 황제의 후궁인데. 아시오?”

단백은 “네. 잡지에 나왔는데, 의외로 후궁치고-.” 까지 대답했다가, 청월과 연활이 전혀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자 정색하고서 물었다.


“그자가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자에게 시종이 딱 하나 있는데. 그 시종이 밤에만 돌아다니고 낮에는 돌아다니지 않는다 하오. 좀 이상하지 않소?”

“!”

 

* * *

그 시각.

안야는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든 도미스를 바라보며 난처해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앞으로 평생 도미스가 깨어날 일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게 되다니.

도미스가 깨어난 것 자체는 기쁘지만, 그러면 일이 어떻게 되는 건지 헷갈렸다.

맹약이 잘못되어 봉인이 깨졌나? 그러면 맹약은 없던 일이 되는 건가? 아니면…….

상념 사이로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야 씨.”

안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잠드는가 싶던 도미스가 또 일어나 있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진 못한 채 그저 눈만 희미하게 깜빡일 뿐이다.


“도미스. 괜찮아?”

안야가 묻자, 도미스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중얼거렸다.


“냄새가 안 나요.”

“어? 무슨 냄새?”

“안야 씨한테 묻어왔던 냄새…….”

칼라인 냄새를 말하나? 안야는 괜히 자기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야, 그 후로 한 번도 못 봤으니까.”

“…….”

말을 한 안야는 도미스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로 자신에게서 칼라인을 떼어냈지만, 그래도 역시 신경이 쓰이는가보다 싶어 안타까웠다.

하긴. 그렇게 사랑했던 상대였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냈다 해서 마음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안야 씨. 그 사람…….”

“응. 걱정 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 어디 있는지도 몰라.”

안야는 혹시라도 도미스가 불안해할까 봐, 그녀의 손을 꽉 잡고서 속삭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손이 맞닿자마자 도미스가 확 자기 손을 빼버렸다.


“?”

안야는 도미스가 500년간 누워 있었으니 당연히 몸이 정상이 아닐 거라 여겼다.

지금도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듯하고. 그래서 손을 주물러주려고 한 거였는데. 도미스가 저렇게 손을 빼내자 당황스러웠다.


“왜 그래, 도미스? 손이 아파? 피부에 뭐가 닿으면 아파?”

안야가 뺨을 건드리려 하자, 도미스가 바로 말했다.


“네. 건드리지 마요.”

안야는 당황해서 관을 붙잡았다.


“왜 그러지? 부작용인가? 맹약이 깨져서…… 역시 봉인이 풀린 게 문제였나. 많이 아파?”

도미스는 대답 대신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물었다.


“안야 씨. 칼라인 어디 있어요?”

“그걸 왜 물어?”

“그는 내 거니까요.”

안야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

도미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모르는 척이에요? 칼라인은 내 연인이고 내 나이트인 거. 안야 씨도 알잖아요.”

“알지. 알긴 아는데…… 네가 칼라인을 ‘안야’에게 보내기로 했잖아?”

도미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안야 씨. 칼라인은 운명이 정해준 내 남자예요. 내가 보내고 말고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알잖아요?”

“하지만 맹약이-.”

“안야 씨. 칼라인을 찾아와요.”

“어?”

“칼라인을 어디서 만났어요?”

“다나산에 있는 동굴에서.”

“당장 찾아서 데려와요. 아니, 내가 직접-.”

도미스가 몸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관을 짚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도미스가 움직일 수 있는 전부였다. 도미스는 몸을 움직이길 멈추고서 팔을 도로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네. 힘이 안 들어가네요.”

“역시 맹약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걸까?”

도미스는 구멍이 뻥 뚫려 빛을 그대로 보내오는 동굴 천장을, 천장 사이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물었다.


“안야 씨. 내가 죽고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요?”

“죽어? 아, 봉인된 지 얼마나 지났나 묻는 거야? 아마 500년 정도 됐을 거야.”

“그럼 새 로드가 나타났을지도 모르겠네요.”

안야는 도미스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정신이 좀 혼미한가 보다 생각했다.


“새 로드가 어떻게 나타나? 네가 여기 살아 있는데, 환생할 수가 없잖아.”

“……그렇긴 한데. 맹약이 깨졌잖아요. 내가 깨어났고.”

“그래도 로드는 나올 수가 없어. 네가 여기 있잖아. 환생할 수가 없는걸.”

안야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도미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 파란 하늘을 노려보며 말했다.


“만약이란 게 있잖아요.”

“이건 만약이라고 가정할 일이 아닌걸.”

안야는 단호하게 말했다.

도미스는 더 그 일에 대꾸하는 대신 천천히 자기 배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안야 씨. 배가 고파요. 먹을 걸 가져다줘요. 그러면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게.”

안야는 밖으로 나가서 인근 민가를 찾았다. 그리고 몇 사람을 기절시킨 다음 피를 조금씩 뽑아 병에 모았다. 한 병이 다 채워지자, 안야는 그걸 들고 도미스에게로 갔다.


“자. 마셔.”

하지만 도미스는 피를 보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외쳤다.


“당장 그걸 치워요!”

“어?”

안야가 병을 들고 어리둥절해 묻자, 도미스가 거대한 바퀴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외쳐댔다.


“당장 그걸 치우라고요! 당장!”

“덜어줄까?”

“그 ‘피’를 치우라고!”


안야는 당황해서 병뚜껑을 열고 피를 단숨에 마셨다. 그러고서 도미스를 보자, 도미스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안야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도미스가 너무 오래 잤더니 피가 몸에 안 받게 됐나?

도미스는 안야의 그 멍한 표정을 곤란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며 요구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으로 가져와요.”

“어…… 응.”

안야는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은 그새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멀쩡히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 기절한 채 여기저기서 발견된 탓이다.

하지만 아무도 남들보다 마른 데다 병색이 짙고 창백한 안야가 범인이라 여기진 않았다.

덕택에 안야는 태연히 마을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찾았고, 곧 도미스가 만족할 만한 음식을 구해냈다.

그녀는 음식을 가지고 도미스를 찾아가 내밀었다.


“네가 좋아하는 걸 가져왔어.”

막 요리를 끝낸 오리고기 요리였다. 안야는 도미스가 좋아할 거라 확신했다.

다행히 도미스도 피를 주었을 때만큼 질색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먹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 먹고 싶지 않아요. 다른 거로 가져다줘요.”

“배고프다고…….”

“눈사과를 가져다줘요.”

“어?”

“그게 먹어보고 싶어요.”

안야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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