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그 사람 냄새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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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화. 그 사람 냄새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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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화. 그 사람 냄새가 나
2023.08.13.
칼라인은 당황했다.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안야’가 나오다니?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칼라인을 따라온 뱀파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때 동료였던 이의 등장에 수군거렸다.
기둥 뒤에서 걸어 나온 여자는, 도미스가 처음으로 만든 뱀파이어인 언니 안야였다.
“놀랐나 보네. 내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어?”
안야의 질문에 칼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죽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살았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도미스가 만든 뱀파이어 중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칼라인과 용병단을 만들어 함께 지내게 된 반면, 안야는 도미스가 죽자 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행방은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뱀파이어라고 해서 불사는 아니기에, 칼라인은 안야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다니. 여기서. 심지어 웬 관을 가지고.
칼라인은 다시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안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나가.”
칼라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오랜만이라며 얼싸안고 기뻐할 사이는 아니라지만, 보자마자 다짜고짜 나가라니?
“명령하지 마라.”
그에 대한 불쾌감을 역시 말로 표현하는 순간. 안야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으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검을 세운 안야가 위에서부터 그를 덮쳤다. 칼라인은 피하는 대신 검을 앞으로 들어 그 힘과 타격을 그대로 막아냈다.
곧이어 빠른 속도로 치열하게 오가는 검 싸움이 벌어졌다. 뱀파이어들은 이걸 막아야 하는지, 말려야 하는지, 누구를 편들어야 하는지 몰라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잠시 뒤. 싸움의 승기를 쥔 게 누군지 확실해졌다. 칼라인이었다.
“왜 보자마자 성질이냐.”
칼라인은 안야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서 물었다. 타박하는 듯하지만 초조한 말투였다. 아직도 안야를 여기서 만난 충격이 그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한 듯했다.
안야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힐긋, 칼라인의 시선이 관으로 향했다. 안야를 보고 나자, 저 관에 있는 게 누구인지 궁금해진 것이다.
“저 관. 안에 누가 있지?”
이번에도 안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빠르게 저어댔다.
이전에 안야는 밝고 화통한 성품이었다. 누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대답하라고 답답해하면 했지, 자기가 입을 꾹 다물 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안야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보는 사람이 갑갑할 정도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500년이면 성격이 변할 만도 하지만.
“자리폴시 공주가 있나?”
칼라인이 대놓고 이름을 짚으며 묻자, 안야는 그제야 고개를 희미하게 저었다.
“그럼 누구지?”
“…….”
칼라인은 안야의 목에서 검을 치우지 않은 채로 계속 관을 힐긋거렸다. 안야의 말을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전의 안야라면 믿어도 되겠지만, 다시 만난 안야는 지나치게 이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믿어도 될까? 어쩌면 저 안에는 죽은 자리폴시 공주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안야가 뱀파이어로 만든 자리폴시 공주라거나.
어쩌면…….
칼라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그는 아까보다 훨씬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검을 내리쳐 튕겨냈다. 동시에 뒤로 몸을 빼며 관뚜껑을 날렸다.
무거운 관뚜껑이지만, 칼라인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쳐버리자 ‘그르릉’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밀려났다.
칼라인은 안쪽을 보았다.
‘비어 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뱀파이어들도 까치발을 들고 보러 왔다가 당황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빈 관인데?”
“아무도 없잖아.”
“이걸 왜 못 보게 한 거야?”
칼라인의 어깨에서 힘이 주욱 빠졌다. 그럴 리 없단 걸 알면서도 순간, 저 안에 있는 게 도미스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 탓이었다.
그는 허탈한 기분에 안야를 보았다. 안야는 떨어진 검을 주우면서 알 수 없는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까 관을 못 열게 막으려던 것과 달리 지금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칼라인 일행보다 좀 더 늦게 들어온 이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인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단장님.”
뱀파이어 부하가 슬그머니 부르자, 칼라인은 검을 검집에 넣고 안야를 힐긋 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갈 데가 없다면 같이 가자.”
안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라인은 잠시 그녀를 더 바라보다가, 부하들에게 떠나자는 고갯짓을 하고서 동굴의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안야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칼라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칼라인이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이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갖춘 이들이었다.
그들 역시 안야를 보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칼라인만큼은 아니었다.
“옮긴 로드 곁에 계실 줄 알았는데. 왜 아직 여기 계십니까?”
그들 중 하나가 묻자, 안야 역시 칼라인 때와 달리 순순히 대답했다.
“혹시 관에 떨어트린 물건이 없나 싶어서.”
“있던가요?”
“……아니.”
안야는 칼라인이 사라진 쪽을 반사적으로 곁눈질하며 물었다.
“너희는? 여긴 왜 또 왔지?”
“아. 혹시나 해서 시체도 처리하고, 싸운 흔적도 정리하러 왔습니다. 이 관도 치우고요.”
고개를 끄덕인 안야는 “수고.” 한마디를 던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고서 서둘러 일에 착수했다.
* * *
‘음. 라나문이 가을 축제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긴 한 건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두 번째 보고서가 없네. 설마 한 번 튕겼다고 실망해서 다 엎었나?’
그리고 자리폴시 공주의 실종을 조사하러 온다는 그 성기사 무리. 그자들은 언제쯤 오려나. 가을 축제랑 겹쳐서 오진 않겠지.
라틸은 멍하게 서류를 보다가 책상에 이마를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로드에게는 ‘내가 로드요!’ 하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기운이라도 풍기나?
단백부터 자리폴시 공주, 이번에는 성기사들 무리까지. 한쪽을 해결하면 다른 쪽이 와서 또 의심하고 쪼아대는 게 아주 미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뭐 로드다운 행동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다른 종족의 미남들을 후궁으로 삼은 것뿐이잖아?’
라틸은 구시렁거리다가,
“칼라인 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는 소리를 듣자 얼른 펜을 내려놓고 허락의 표시로 종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칼라인이 들어왔다. 겉보기엔 편안하고 아름다운 복장을 걸친 모습으로, 먼 다나산까지 다녀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라틸은 서넛을 제외하고, 시종장과 다른 비서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 칼라인에게 물었다.
“그래. 어땠어? 거기 뭐 이상하거나 수상한 게 있어?”
“그곳 동굴에 제복 차림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형룡술 성기사들이구나.”
“예.”
“공주는?”
“공주는 없었고, 제복 차림이 아닌 다른 시체들도 있었는데 제복 차림 기사들보다 그 수가 훨씬 적었습니다.”
“그자들이 성기사들을 공격한 건가?”
서넛도 흥미가 이는지 평소보다 좀 더 가까이 와서 대화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저희보다 한발 늦게 동굴을 찾아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동굴 밖으로 나가서 살펴보니, 동굴에서 시체를 치우고 있었지요. 아마 싸운 흔적도 처리했을 겁니다, 주인.”
놀라운 이야기에 라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시체 치운 이들이 누군데? 백랑화술?”
“모르겠습니다. 그자들은 제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요.”
“이야. 이건…… 놀라운데.”
라틸은 혀를 내둘렀다. 안에서 벌어진 일들도 이상했지만, 백화가 그 위치를 알고 있단 것도 이상했다.
백화는 대체 공주에게 뭘 얘기한 걸까. 공주는 뭘 듣고서 그렇게 놀라서 동굴로 갔을까. 왜 그곳에 간 이들은 모두 죽은 걸까.
공주가 부적을 썼다면 그 안에서 인간이 아닌 것을 마주쳤던 건데…… 그건 또 뭘까. 백화는 왜 그 위치를 공주에게 알려주었을까.
“성기사단끼리 암묵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걸까요?”
“글쎄.”
라틸이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칼라인이 라틸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까보다 한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거기서 더 이상한 걸 보았습니다, 주인.”
“더 이상한 게 있다고?”
“예. 제가 보기에는.”
“뭐였는데?”
“관과 안야였습니다.”
“안야? 어느 안야?”
“안야에 대해 기억이 나십니까?”
“둘 다 기억나. 하나는 대적자고, 다른 하나는 도미스가 만든 최초의 뱀파이어잖아.”
“뱀파이어 안야입니다.”
칼라인의 대답에 서넛이 고개를 기울였다. 칼라인은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이던 커다란 관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혹시 공주가 들어 있을까 싶어 열어보았지만, 관은 비어 있었습니다.”
“안야 침대 아냐?”
그 어두운 표정과 목소리는, 라틸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덩달아 가벼워졌다.
칼라인은 얼결에 웃음을 터트렸다가,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픽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딘가 후련한 미소였다. 하지만 조금 착잡해 보이기도 했다.
‘왜 저러지?’
그 표정을 보며, 라틸은 안야가 등장한 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언니 안야는 좋은 사람이었다. 적대 관계였던 동생 안야라면 모를까, 도미스와 친했던 언니 안야 쪽이라면 아직 살아 있어도 별로 문제 될 게 없지 않나?
합류하기 싫으면 그냥 자유롭게 살 것이고, 합류하고 싶다면 어떻게든 로드 측에 다시 올 것이고, 라틸 역시 언니 안야가 오면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
‘좋은 사람 같았으니 뭐. 별문제 없을 거 같은데.’
* * *
이곳은 다른 곳보다 좀 더 빨리 겨울이 찾아왔다. 나무며 땅 곳곳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어서, 계단과 나무와 바위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동굴 위쪽이 동그랗게 뻥 뚫린 탓에, 관 위에도 눈이 쌓였다. 햇빛을 받으라고 천장이 없는 동굴에 관을 놓아둔 건데. 햇빛이 아니라 눈이 먼저 쏟아졌다.
관을 여기에 두고 자리를 비운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안야는 눈을 치워야 하나 어째야 하나 걱정하다가, 아직 치울 정도로 쌓인 건 아닌 듯해 그 위에 그냥 팔을 대고 상체를 뉘었다.
어차피 그녀에겐 온기가 없기에, 눈에 대고 엎드려도 춥지 않았다.
안야는 그 상태로 멍하게 칼라인을 떠올렸다.
도미스가 칼라인을 살리기 위해 대적자와 거래했으니 당연히 살아 있겠지만…… 그래도 500년 만에 그를 보게 되자 싱숭생숭했다.
한때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다하려 한 연인인데. 한쪽은 관에 누워 있고, 한쪽은 아직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하들을 거느리며 다닌다니.
도미스가 원한 일이겠지만 역시 좀 슬프단 생각에 안야는 서글퍼졌다.
그때였다. 관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뱀파이어의 귀로 듣기에도 아주 미약한 소리여서, 안야는 황급히 관을 덮은 눈을 손으로 쓴 다음 관뚜껑에 귀를 가져다 댔다.
“냄새가…….”
역시 안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안야는 황급히 관을 열었다.
관을 옮긴 탓이었을까. 아니면 위치를 옮긴 탓이었을까. 500년간 잠들어 있던 도미스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도미스?”
긴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맑은 눈동자가 드러나자, 안야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고 쥐었다.
“도미스?”
재차 이름을 부르자, 허공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천천히 안야를 향했다.
“안야 씨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나요. 희미하게.”
안야는 도미스를 깨운 게 관을 옮긴 것도, 위치를 옮긴 것도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녀를 깨운 건 칼라인이었다. 아주 잠시, 그와 만난 짧은 시간에 묻었을 그 희미한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