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백화에겐 오해를 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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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화. 백화에겐 오해를 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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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화. 백화에겐 오해를 샀지만
2023.08.09.
칼라인의 눈동자가 몹시 빠르게 떨렸다. 속으로 온갖 음험한 상상을 하는 게 분명한 눈빛이었다.
라틸은 칼라인이 자신의 말을 심하게 오해했단 걸 알아차리고 다급히 내저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자세로 있는 걸 보여주고 싶단 거야. 그러니까 그냥 여기 이 구도로 늘어져 있는 모습 말이야.”
전혀 소용이 없었다. 칼라인의 두 눈썹 양 끝은 이미 내려가 있었다. 라틸은 희미하게 그가 ‘변태’라고 생각하는 소리를 듣고 얼굴이 벌겋게 질렸다.
“아니, 그냥 ‘폭군 황제의 하렘’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싶을 뿐이야. 상대를 오해하게 하려는 거지, 내가 그런 구도로 뭘 하려는 거 아니라고!”
“…….”
“정말이야. 날 못 믿겠어?”
라틸이 언성을 높이자, 칼라인은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고서 라틸의 그림을 도로 건네주었다.
“믿으려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못 믿겠단 거네. 라틸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아직 게스타, 므라딤, 타시르, 기르골에게는 이걸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로해졌다.
‘하지만 칼라인이 이 정도로 놀라는 걸 보면 백화도 분명 놀라겠지.’
* * *
칼라인 때의 반응을 경험 삼아, 라틸은 게스타와 므라딤, 타시르, 기르골에게는 가짜로 ‘폭군 황제의 하렘’ 같은 구도를 연출하고 싶다고 미리 밝힌 다음 구체적인 사안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게스타는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므라딤은 호기심을 보였고, 타시르는 재밌어했으며 기르골은 즐거워했다.
하지만 라틸이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들게 해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단 건 아무도 모르기에, 굳이 이런 장면을 ‘왜 백화에게 보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다.
라틸은 놀란 장면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흔들려서 횡설수설하게 된다고 둘러댔지만, 안타깝게도 이 말을 믿은 건 므라딤뿐이었으며, 그 므라딤조차도 몇 분 지나지 않아 이 부실한 변명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라틸은 곧장 자신의 계획에 착수할 수 있었다.
“아니, 칼라인. 네가 조금 더 오른쪽으로. 기르골, 기르골, 기르골! 그렇게까진 안 해도 돼. 게스타, 조금 더 위로 가 볼래?”
라틸은 자신이 그린 도안을 보면서 신중하게 후궁들의 위치를 정해준 다음, 잠옷 차림으로 그사이에 들어갔다.
‘어…… 실제로 누우니까 많이 민망하긴 하네.’
자신이 계획한 구도이면서도 막상 실천하니 몹시 민망스러웠지만, 라틸은 눈을 딱 감고 일어난 다음 침실 밖에서 대기 중인 서넛에게 백화를 불러오라 지시했다.
서넛은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안쪽 상황을 보고는 안색이 어두워져서 나갔다.
라틸은 백화가 올 때를 대비해서 다시 침대로 돌아와 엎드렸다.
그 상태로 우두커니 있으려니, 기르골이 라틸의 등을 베고 누우면서 속삭였다.
“인간 둘에 뱀파이어 둘, 그리고 피인어 하나를 한 침대에 두다니. 사관이 이 모습을 못 봐서 다행이야, 아가씨. 역사상 가장 야한 황제라고 기록했을 거야.”
라틸은 이마를 이불에 대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칼라인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라틸을 도와주지 않았다.
“폐, 폐하는 나라를 위해서 이러시는 거예요…….”
게스타가 라틸을 위해 나서 주었지만, 그의 터무니없는 변명은 오히려 타시르까지 웃음 짓게 만들었다.
“아아, 그렇지. 나라를 위한 거지. 우리 로드의 마음이 즐거워야 나라에도 안정이 찾아오니까.”
기르골이 속삭이는 말은 그야말로 ‘폭군 황제의 하렘’에 어울리는 대사였다.
이 장면을 사관이 보았더라면, 라틸과 기르골은 그야말로 ‘폭군 황제와 요사스러운 후궁’ 커플로 이름이 올라갔을 것이다.
“다들 좀 조용히 해주면 안 될까?”
“하지만 제자님. 꽤 오래 살았지만 여섯 명이 한 침대에 올라간 건 처음이라 너무 설레는걸.”
“기르골. 그대만 입을 다물어도 괜찮겠는데.”
“내가 입을 다물면 더 어색해질 텐데.”
“…….”
용기를 내어 기르골을 침대에서 뻥 차버리고 싶다. 그가 굴러떨어지고 나면 속이 시원할 텐데. 하지만 그랬다간 저놈이 미쳐 날뛰겠지.
기르골이 여기서 미쳐 날뛰면 정말로 사관이 뛰어 들어와 이 장면을 기록할지도 모른다. 황제의 후궁이 황제의 무리한 요구를 받들다가 질투심에 미쳐서 날뛰었다고 기록되겠지.
라틸은 그렇게 이름을 올리고 싶진 않았다. 이미 호색한 황제로 올라가 있긴 하겠지만.
게다가 말은 ‘설레는걸’이라고는 하지만 기르골의 입술 끝에 달린 삐뚜름한 심술보는 그의 심경이 그리 좋지 않단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
“폐하. 백화 경이 왔습니다.”
마침내 문밖에서 서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라틸이 지시한 대로 문이 바로 열렸다.
라틸은 어색하게 올라간 어깨를 내리고서 편안하게 문을 쳐다보았다.
방 안으로 들어오던 백화는 라틸의 침대에서 일어난 장면을 보자 바로 굳어버렸다. 이윽고 그에게서 속마음이 들려왔다.
[이건…… 폐하는 취향이…… 본격적이시군.]
성공이었다!
하지만 기쁘진 않았다.
* * *
라틸은 엎드려서 백화에게 몇 마디 하다가, 집중이 안 된단 핑계를 대고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응접실에서 얘기하지.”
나가는 라틸에게 타시르가 웃으면서 인사했다.
“빨리 오세요 폐하.”
라틸은 억지로 웃으면서 그를 쳐다본 다음, 백화를 데리고 응접실로 나갔다. 미리 시녀들에게 말해 응접실을 비워두었기에 그 방 안에 있는 건 서넛뿐이었다.
“뭐 마시겠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빨리 들어가 보셔야 할 텐데요.”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게스타, 그 순진해 보이는 도령까지 저러고 있다니. 참으로 놀랍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몰라.]
라틸은 그의 속마음을 들으며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그래. 그러지.”
[대신관님이 아무리 애써도 상대가 안 되는 게 당연했어. 폐하의 본성이 저리 파렴치할 줄이야.]
“…….”
“폐하? 갑자기 왜 주먹을 그리 꽉 쥐십니까?”
“아니. 아니네.”
의도한 거지만 실제로 노골적인 호색한 평가를 들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라틸은 씁쓸하게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괜히 심각하게 보이는 이야기를 꺼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성기사들이 다 나한테 오는지 모르겠어. 안 그런가? 좀비가 계속 나타나는 건 카리센인데, 왜 우리나라에 오는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와 대신관님이 여기에 머무는데 타리움을 의심하다니요.”
그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다가, 라틸은 슬그머니 자리폴시 공주에 대해서도 꺼내 보았다.
“자리폴시 공주 말이야.”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백화의 머릿속에서 어느 위치가 하나 떠올랐다.
라틸은 속으로 그 위치를 계속 되뇌며 최대한 잊어버리지 않으려 했다.
“예, 폐하.”
“이러면 안 되는 건 아는데 원망스러워. 대체 왜 우리나라에 왔다가 엉뚱한 곳으로 가버려서 이쪽에 화살이 쏠리게 하는지.”
“그렇군요.”
[폐하께서 많이 억울하신가 보군. 그렇겠지. 로드 취급을 계속 받다가, 혐의가 풀리자마자 또 성기사들에게 치이게 생기셨으니. 그래서 스트레스를 후궁들과 즐기며 푸시는 건가.]
라틸은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참느라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 * *
라틸은 동굴 위치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날이 되자 칼라인을 불러 부탁했다.
“백화가 많이 놀랐는지 실수로 어떤 위치를 흘렸어. 이게 자리폴시 공주 실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지 없는진 모르겠지만, 그 화제를 얘기하다 나온 장소이긴 해.”
“어디입니까?”
“다나산의 카템 산에 있는 동굴이야.”
“다나산이라면…… 카리센과 타리움 사이에 있는 나라로군요.”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네 뱀파이어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안에 뭐가 있는지, 혹시 공주가 그 근처나 안에 있진 않은지 확인해줘. 성기사들이 와서 뭔가를 알아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해.”
칼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로 일어났다.
“급한 일이니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칼라인.”
라틸은 따라 일어서며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그를 불렀다. 나가려던 칼라인이 고개를 돌렸다.
라틸은 그의 눈동자를 잠시 새로운 기분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조심해.”
* * *
칼라인은 의뢰를 받아 자리를 비우지 않은 흑사신단 용병들을 데리고서 라틸이 알려준 위치의 산으로 가 보았다.
그 산에 동굴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헷갈리긴 했지만, 그래도 마침내 칼라인은 문제가 될 만한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입구에서부터 좋지 못한 분위기가 풍겨오는 동굴이었다.
“여기 같군.”
칼라인은 동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동굴에서는 아직 희미하게 피 냄새와 썩은 내가 났고 습기가 있었다.
칼라인이 걸을 때마다 바닥과 신발 굽이 닿으며 음산한 소리를 냈지만, 뱀파이어들 중 그런 분위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저게 그 형룡술 성기사들일까요?”
그렇게 걸어가고 있자니, 한 뱀파이어가 어느 구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엔 제복을 입은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런가 보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공주가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단장님.”
“일단 끝까지 가 본다. 기운이 평범하지 않아.”
피 냄새와 썩은 냄새도 그렇지만, 동굴 전체에서는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다. 웬만한 사람은 들어오기도 힘들 정도의 기운이었다.
그러다가 칼라인은 시체들 틈에 제복 차림이 아닌 이들이 섞여 있단 걸 눈치챘다.
“뭐지?”
훨씬 소수였지만 분명 죽은 시기는 비슷해 보이는데 옷차림이 달랐다.
“이 성기사들이 이자들과 싸우다 죽은 걸까요?”
“그랬을지도.”
칼라인은 심각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누군가 동굴 안에 새로 들어왔다.”
칼라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다른 뱀파이어들 역시 인기척을 느끼고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칼라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미 동굴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상태라, 지금 새롭게 동굴에 들어온 이들과 당장 마주치진 않을 터였다.
칼라인은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지시했다.
“불필요한 싸움은 피한다. 기척을 감추고 안으로 이동한다.”
그 후부터 칼라인은 물론 다른 뱀파이어들 모두에게서 발소리가 사라졌다. 그들은 어둠 속을 흘러 다니는 안개처럼 안으로 이동했다.
얼마나 그렇게 움직였을까.
갑자기 무언가 그들 쪽으로 확 날아왔다. 누군가 그들을 향해 날카로운 무언가를 던졌다.
칼라인은 손을 뻗어 날아오는 걸 대번에 낚아챘다. 단도였다.
‘오래된 물건이다.’
하지만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듯 옛날의 예기가 사라진 단도다. 칼라인은 단도를 손안에서 굴리다가 동굴 벽에 박아 놓고서, 안쪽으로 계속해 들어갔다.
곁의 뱀파이어 용병들도 제 무기를 꺼내서 혹시 모를 싸움을 대비했다.
이후 몇 번 더 멀리서 무기가 던져졌지만, 칼라인은 제 선에서 잡아챘다.
무기를 던지는 사람도 빠르고 예리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으나, 칼라인은 기르골에게 좀 눌려 있을 뿐 굉장히 강한 뱀파이어였다. 그는 무기를 전부 낚아채 동굴 벽에 박아 넣으면서 쉬지 않고 전진했다.
마침내 그의 앞에 세 칸으로 된 낮은 계단과 그 위에 놓인 관이 드러났다.
“관?”
칼라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에 왜 관이?
부하 뱀파이어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에 공주가 있을까요?”
“그렇다기엔…… 생기가 전혀 없는데.”
“공주가 죽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럼 누가 공주를 여기 두었단 거지?”
“그야-.”
부하들과 대화를 나누던 칼라인은 인기척을 느끼고 멈춰 섰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모두 인기척이 들려온 방향으로 휙 몸을 돌렸다.
누군가 기둥 뒤에 서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사람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고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칼라인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그쪽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