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9화. 칼라인은 라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360/367)


359화. 칼라인은 라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023.08.06.


단백이 돌아가자, 라틸은 타시르를 불러 서랍에 넣어둔 비밀 암호를 건넸다.


“레안의 전 식료품 관리인이 몰래 전하려 한 쪽지래. 원본은 아니고, 내용만 베낀 거. 암호라니까 무슨 말인지 해독해 보거라.”

이후에는 성기사들이 올 경우를 대비해, 인외 후궁들과 사정을 다 아는 타시르를 부른 다음, 밀로 공주의 실종을 알리고 이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의논했다.


“그 사람들이 오는 거야 어떻게 넘긴다고 쳐도. 문제는 밀로 공주의 시녀야. 그 시녀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부적이 바꿔치기 됐단 걸 알고 있대.”

“주인. 부적을 다시 되돌려 둘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 근데 공주가 갑자기 말을 타고 떠나는 바람에 못 바꿨어.”

“이런.”

므라딤이 혀를 찼다.

반면 기르골은 이런 의논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봉지에 담아 온 꽃잎만 우그적 우그적 씹으면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칼라인이 탓하는 눈길로 타시르를 보자, 타시르가 웃으면서 턱 밑에 꽃받침을 했다.

칼라인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으므로, 라틸은 두 사람 사이를 손으로 휘저어 말렸다.


“급한 상황에 우리끼리 싸우지 마.”

“맞습니다, 칼라인 님. 연약한 인간이 무서워하고 있다고요.”

타시르가 실실 웃으면서 하는 말에 칼라인의 표정은 더욱 나빠졌고, 기르골이 꽃잎 먹던 걸 멈추고 타시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타시르가 기르골을 보면서 빙그레 웃자, 라틸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기르골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기르골. 타시르는 사람이지만 우리에 대해 다 알고 도와주고 있어. 혹시라도 먹이라거나 음료수라거나 장난감으로 취급하지 마.”

기르골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꽃잎 하나를 다시 잎에 넣으며 말했다.


“그럼, 아가씨. 여우 같은 새끼라 생각하고 있었어.”

여우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게스타와 여우 새끼라고 지목받은 타시르가 동시에 기르골을 쳐다보았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르골 저놈은 왜 난데없이 타시르를 적대하는 거야?

라틸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일부러 차가운 음료수를 새로 가져오게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자, 다시 본론. 어쨌든 문제는 공주의 시녀가 부적이 가짜란 걸 알고 있단 거야. 부적을 여기서 사용했단 것도 알고 있어.”

“그럼 그 시녀가 왔을 때 다시 부적을 바꿔치기하면 어떨까요……?”

“그럼 편하지. 근데 내 생각에 시녀는 가짜 부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거 같아. 부적이 있다면 공주가 들고 있었을 거 같거든.”

“아아.”

“그 시녀가 지금은 의식이 없긴 해. 하지만 우리 측에 대신관이 있잖아. 성기사들이 오면 대신관에게 부탁해 시녀를 치료하려 하겠지. 시녀가 부적이 바뀐 지점에 대해 논의를 할 거고, 여기서 부적을 사용했단 이야기가 나올 거야. 그러면 우리가 의심을 사게 돼.”

므라딤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시녀를 치료하지 못하게 막으면 그것도 수상하겠소.”

“맞아. 이쪽도 벽. 저쪽도 벽. 지금 아주 곤란해.”

서넛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시녀를 죽이면 어떻겠습니까?”

좀 솔깃했지만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쪽에 조사를 오기로 되어 있는데 지금 시녀를 죽이면 우리 혐의가 짙어지지 않을까? 아직은 우리한테 혐의가 있어서 오는 건 아닌데. 시녀를 죽이면 혐의를 받을걸.”

인외 후궁들과 타시르, 라틸, 뱀파이어 근위기사단장은 서로서로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미는 쪽이 없었다.

라틸은 서로 눈치만 주고받는 상황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일단, 공주가 어디 간 건지, 왜 갑자기 급히 간 건지를 우리가 먼저 조사하자. 공주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누구지?”

“폐하십니다.”

“맞아. 나야.”

라틸이 민망해서 서넛을 한 번 흘겨본 다음 다시 물었다.


“나 전에 만난 사람이 누구지? 날 만날 때는 공주가 이미 서두르고 있었어. 그전에 만난 사람한테 뭘 들은 게 확실해.”

잠시 뒤. 후궁들은 공주를 마주친 순서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약 15분쯤 후. 결론이 나왔다.


“대신관?”

 

* * *

한편, 백화 역시 공주가 실종되었단 소식을 듣고 혀를 차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훈련을 게을리했기에 고작 서른 명 죽이는 걸 못 해 둘을 놓친 거지?”

하지만 백화가 혀를 차는 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의도에서였다. 백화는 형룡술의 단장과 그 부관을 놓친 부하들이 한심스러워 혀를 차는 것이었다.

이 일을 보고한 부관은 슬그머니 변명했다.


“하지만 단장님. 형룡술은 외지를 돌면서 계속해 괴물들을 사냥해 온 만큼 실전 경험이 퍽 많은 편입니다.”

“그렇군. 우리 백화랑술은 그럼 실전 경험이라곤 없는 샌님 같은 성기사들만 모아둔 곳이었어.”

백화가 빈정거리자 부관은 결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백화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전 경험으로 치면 백화랑술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백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지시했다.


“공주 일행이 그 동굴로 갔단 흔적을 지워라.”

 

* * *



‘대신관이 마지막에 공주를 만났다고? 이상한데?’

측근들과 의논을 끝낸 라틸은 도출된 결과가 영 믿기지 않았지만, 일단 대신관을 찾아갔다.


“공주를 마지막에 만나지 않았냐고요?”

대신관은 라틸의 질문을 듣자 고개를 기웃하더니 대답했다.


“제가 마지막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공주와 30초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폐하. 클라인 님한테 달려가는 길이었거든요.”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데?”

“근골이 좋다고 칭찬한 거로 기억합니다.”

“……그러네. 공주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서 극기 훈련을 하러 가진 않았을 거야.”

“왜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건 아냐.”

라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신관은 순수한 눈으로 멀뚱히 그런 라틸을 보다가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왜 그래? 뭐 다른 말 한 게 생각났느냐?”

“아니요. 백화 경이 저랑 같이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좀 시간을 두고 따라왔습니다. 어쩌면 백화 경과 얘기를 나눈 걸지도 모릅니다.”

 

* * *

다행히 백화가 근처에 있었기에, 라틸은 이번에는 백화에게 공주에 대해 물어보았다.

백화는 라틸의 질문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라틸이 말을 끝내고 빤히 바라보자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대신관님이 떠나신 후에 제가 형룡 경과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형룡 경이 폐하와 주변 인물들이 로드가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기에, 기분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

“저와 대신관님이 여기에 있는데도 단백 경에 이어 형룡 경까지 그러니, 우리를 무시하는 듯해 기분이 상한다고요.”

“잘했네.”

라틸은 얼결에 칭찬을 뱉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말이야. 백화도 별로 이상한 말을 한 눈치는 아니다.

라틸은 더욱 의아해졌다. 그럼 대체 공주는 왜 갑자기 급하게 뛰어간 거야?

* * *

아무리 찾아도 역시 공주가 마지막에 만난 사람은 백화였다. 그러자 라틸은 백화가 자신에게 거짓말했을 가능성을 짐작해보았다.

만약 백화가 공주를 자극할 만한 어떤 말을 했는데 숨기고 있는 거라면? 그러면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나?


‘좋아. 술에 취하게 해서 속마음을 읽자.’

결국 라틸은 자리폴시 공주에게 한 것처럼, 백화를 불러 놓고 속 깊은 이야기를 하자며 도수 높은 술을 건넸다.

하지만 백화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신관은 금주입니다.”

라틸은 독한 술을 잔뜩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백화의 거절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신전의 앞날을 위해 라틸을 대신관의 방에 밀어 넣기까지 하는 이 세속적이기 짝이 없는 성기사단장이 금주만 철저히 지키겠다고 하자 당황스러웠다.


“전에 그러지 않았나? 성기사들은 규칙이 좀 너르다고?”

“저는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것만 잘 지키는구나. 라틸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금주가 율법이라는 성기사에게 술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 * *

술을 마셔 속마음을 떠보리란 계책을 쓸 수 없게 되자 라틸은 다시 궁리를 시작했다.

술을 마셔 취하게 하는 것? 안 된다.

고문을 해서 마음을 약하게 하는 것? 당연히 안 된다. 신전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이고, 그런 짓을 했다간 로드 의혹만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다.

그럼…….

‘평범하게 마음을 뒤흔들어야 하나.’

라틸은 턱을 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백화는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 사람이었다.

성기사지만 세속적이니, 세속의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해서 쉬이 놀라지도 않을 거다.

게다가 세속에 물든 사람들조차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대신관과 자주 붙어 다니지 않는가.


‘그럼 어떻게 놀라게 한다…….’

곰곰이 생각해도 별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자, 라틸은 최근에 자신이 놀란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길 바라면서.


‘내가 최근에 놀란 일이…… 공주가 실종된 소식을 들은 거? 하지만 이걸로 백화를 놀라게 할 수가 있나? 백화를 놀라게 하려고 그자 측근을 죽일 수는 없잖아.’

그럼 그 전에 또 놀란 일은?


‘내 후궁들이 카지노에 가서 놀았단 걸 알고 좀 놀랐지. 하지만 마음이 뒤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어. 물론 대신관과 클라인이 침대 위에서 여러 명이 있는 게 좋냐는 얘기를 했을 땐 깜짝 놀랐……?’

무의미하게 종이에 낙서를 하던 라틸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거다!’

이거라면 아무리 세속에 익숙한 백화라도 몹시 놀랄 것이다. 아니, 사실 안 놀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곧 라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아이디어. 실행해도 괜찮을까?

한참 고민한 끝에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어차피 난 전 세계에 호색한이라 소문이 났다고.

* * *

결정을 내린 라틸은 그 길로 곧장 칼라인을 찾아가 부탁했다.


“칼라인. 부탁이 있어.”

“네.”

“좀 아슬아슬한 복장으로 침대에 누워 있어 줄 수 있어?”

“!”

칼라인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심각한 표정으로 듣다가 눈을 왕방울만 하게 떴다.


“예?”

하지만 곧 그의 입꼬리가 야하게 올라갔다.


“물론입니다, 주인.”

라틸은 활짝 웃었다.


“고마워. 그런데 다른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무엇을 원하시든 주인 뜻대로 하십시오.”

“옆에 타시르를 눕혀놔도 괜찮을까?”

“!”

칼라인의 눈이 더 커져서 왕밤만 해졌다. 그는 이번에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입가에 걸린 야한 미소도 증발해 사라졌다.

그 상태로 침묵하다가, 칼라인이 평소보다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타시르도 헐벗고 있습니까?”

“맞아.”

라틸은 칼라인의 표정을 슬며시 살피며, 자신이 아까 집무실에서 그려온 그림을 내밀었다.


“이게 자리 배치인데…….”

“두 명이 아닙니까?!”

“너랑 타시르, 게스타, 므라딤, 기르골까지 다섯.”

“!”

칼라인은 대답하지 못하고서 라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 명단이 라틸이 로드란 걸 아는 명단이 아니었다면, 칼라인은 이번 로드의 취향을 심각하게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틸이 짚은 이름들이 하나하나 다 로드의 측근들이기에 일단 칼라인은 라틸의 말을 기다렸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중앙에는 내가 있을 거야.”

“……그나마 다행이군요. 이렇게 해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아, 걱정 마. 별거 안 해. 그냥,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