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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화. 이제 그만 올 때도 안 됐나 (359/367)


358화. 이제 그만 올 때도 안 됐나
2023.08.02.



“랑스터 백작?”

“음? 예?”

“왜 날 그렇게 쳐다보지?”

마침내 도미스도 그 시선을 눈치챈 모양인지, 말을 나누다 말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여우 가면은 “아.” 하고 탄식하다가, 난데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모르고 데리고 다니시면 어쩔 수 없지요.”

“데리고 다니다니?”

라틸은 속으로 여우 가면에게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혹시 500년 전의 여우 가면. 날 눈치챌 수 있으니 나와 대화할 수도 있을까?


‘게스타 선배. 게스타 선조. 여우 가면 쓴 사람. 랑스터 백작. 이보시게. 내 말 들리시나?’

하지만 여우 가면은 라틸의 존재를 느낄 뿐. 목소리까지는 듣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 * *

라틸은 깨어나자마자 겉옷을 걸치고 복도로 나갔다.


“폐하? 어디 가십니까?”

당직을 서는 근위기사가 놀라서 라틸을 쫓아왔다.


“하렘에. 게스타를 보러.”

근위기사는 라틸의 대답을 듣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자다 말고서 제 후궁이 그리워 깨었나보다, 생각하는 눈치였다.

저들이 뭐라 생각하건 상관없기에 라틸은 꿈이 어쩌고 하면서 해명하는 대신 곧장 걸음을 옮겼다.


“폐하?”

게스타는 잠들어 있다가, 라틸이 이른 새벽에 찾아오자 놀라서 눈을 비볐다.


“무슨 일이신가요……?”

“꿈을 꿨는데.”

“악몽을 꾸셨어요……?”

게스타의 방 안은 온기로 가득했다. 게스타는 라틸을 조심스럽게 잡아 침대로 데려가 앉혀 주고는, 재빨리 딸기향이 나는 차를 타 왔다.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저도 악몽을 꾸고 나면 무서워요, 폐하.”

게스타는 라틸이 온 의도를 오해한 듯했다.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무서워서 온 게 아니라.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물어볼 거요?”

게스타의 시선이 힐긋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이 새벽에요? 자다가요 갑자기요?’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500년 전 여우 가면이 너랑 동일인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네 선조라거나 스승이라거나, 그래?”

“네?”

게스타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새벽에 찾아와서 한다는 질문이 선대 여우 가면 얘기라고 하자 더욱 의아한 눈치였다.


“맞아?”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지…….”

라틸은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꿈으로 본다는 걸 알려줘도 될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내가 전생의 기억을 꿈 형태로 볼 수 있어.”

“!”

상대의 생각을 읽는 능력은 절대로 밝히지 않을 셈이지만, 전생 기억을 본다는 정도는 말해줘도 될 것이다. 라틸이 계속 환생을 거듭하는 걸 아는 이들에게는.


“그 꿈에서 500년 전 여우 가면을 봤어. 너랑은 목소리도 머리카락도 체형도 다 다른 사람이었어.”

게스타는 아직도 혼란에 차 멍한 상태였다.


“보통 내가 전생 기억을 볼 때, 그러니까 시점 말이야. 삼자 시점이 아니라 도미스 시점에서 보거든. 내가 꼭 도미스인 것처럼 봐.”

물론 내가 도미스니까 당연하겠지만. 라틸은 말하다보니 이상해서 덧붙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게, 그냥 그렇게 쭉 보고 끝이었는데. 오늘 꿈에서 여우 가면이 날 알아봤어. 500년 전 여우 가면이. 도미스한테 ‘안에 든 게 뭔가요’라고 했어.”

라틸은 말하다 보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날 가리킨 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네. 당시엔 너무 놀라서 당연히 내 얘기라 생각했지만. 그리고 너한테 물어볼 일도 아니었어. 네 선조가 이런 이야기를 너한테 전할 리 없잖아.”

스스로 말을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정리가 된 것이다. 라틸은 괜히 새벽같이 달려왔다고 생각하며 게스타의 등을 두드렸다.


“자는데 깨워서 미안. 계속 자.”

그러고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뜻밖에도 게스타가 따라 일어나며 급히 말했다.


“기억을 물려받아요…….”

“응?”

라틸은 도로 앉았다.


“기억을 물려받다니?”

“전 여우 가면들의 기억을 물려받아요.”

“그럼 있어? 그 기억 안에, 도미스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기억이 있어?”

라틸은 흥분해서 게스타의 두 손을 잡고 눈을 빛냈다. 게스타는 얼굴이 벌게져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어요…….”

라틸은 인상을 찡그렸다. 없다고?


‘내가 본 게 과거라면 당연히 게스타가 물려받은 기억에도 그 기억이 있어야 하지 않나?’

“왜 없지? 너무 사소해서 까먹었을까?”

게스타는 잠시 라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예요.”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확신하는 투였다. 라틸은 게스타가 어떤 식으로 여우 가면의 기억을 물려 받는진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수긍했다.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아니면…….


‘혹시 내가 보는 게 과거가 아니라서……?’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던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다고 결정을 내리기엔 아직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 * *

며칠이 흘렀다.

라틸은 500년 전 여우 가면이 자신을 알아본 연유가 궁금했지만, 이후로 라틸은 도미스의 꿈을 딱 한 번만 더 꾸었을 뿐이고, 그 꿈에서조차 여우 가면은 등장하지 않았다.

도미스가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랑스터 백작가의 하인과 하녀들에게 천천히 복수를 해나가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렇게 평화롭게 지나가는가 싶던 어느 날. 라틸은 두 가지 충격적인 소식을 몇 분의 간격을 두고 듣게 되었다.

첫 번째 소식을 들려준 사람은 시종장이었다.


“폐하. 레안 황자가 전 식료품 관리인과 주고받은 쪽지를 입수했습니다.”

“쪽지였나?”

“예. 허락받지 않은 고급 술을 들여보내는 척하면서, 쪽지를 넣어 운반하고 있었습니다.”

“술 사이에 끼워서?”

“아니요.”

시종장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는데, 전 식료품 관리인은 알고 보니 상당히 머리를 굴렸다고 한다.

전 식료품 관리인이 비밀 쪽지를 보낸 건, 허락 없이 끼워 넣은 고급 술이 아니라 허가받은 진짜 식자재 상자였던 것이다.

시선을 고급 술로 돌리고서, 식자재에 붙은 라벨 뒤쪽에 쪽지를 숨겨 넣어서 보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저번에는 본인이 관리인이었으니 그게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거니까요. 정식 식자재를 손대지 못하니, 허락 없이 끼워 넣은 술 라벨에 그 짓을 한 모양입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는 운이 나빴고 이쪽에는 운이 좋았다.

허가 없이 끼워 넣기 한 식자재이니 샅샅이 뒤져서 그 쪽지를 발견할 수 있던 거지, 정식 식자재 사이에서 들어갔다면 놓쳤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

“쪽지가 전부 암호로 쓰여 있어서 해독이 필요합니다.”

시종장이 쪽지 다섯 개를 내밀었다.


“진짜 쪽지는 일부러 그대로 두었고, 거기 내용만 베꼈습니다.”

“잘했습니다.”

쪽지를 압수했다면, 적들은 정보가 유출된 걸 알고 또 다른 방법을 찾아서 비밀리에 신호를 주고받을 것이다.

이 쪽지의 내용을 모르는 상황이니, 적들이 손바닥 위에서 비밀 사인을 주고받게 두는 게 나았다.

라틸은 쪽지를 챙겨 노트에 끼워 넣었다.


‘타시르한테 해석해보라 해야겠어.’

그러고 있는데, 다른 시종이 들어오더니 어리둥절한 얼굴로 라틸에게 알렸다.


“폐하. 전에 방문했던 단백술의 성기사단장 단백 경이 또 찾아왔습니다.”

‘또?’

라틸은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축 내려갔다. 이 지긋지긋한 성기사들. 왜 자꾸 날 찾아오는 거야?

물론 찾아와서 ‘이젠 폐하를 의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준다면 그건 좋지만.


“들어오라 해.”

라틸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고 쪽지를 일단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펜과 잉크병을 정리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문이 열리고 굳은 표정의 단백이 안으로 들어왔다.


“타리움의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표정이 왜 저렇게 어둡지? 라틸은 단백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녀가 좋지 못한 사정으로 찾아온 걸 눈치챘다.


“나는 잘 지냈는데. 그대는 잘 지내지 못한 것 같군. 이번엔 무슨 일로 왔나?”

라틸은 빙빙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곧장 질문했다.

단백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자, 비서 하나가 얼른 간이 의자를 가져다 단백이 앉을 수 있게 놓아주었다.


“사람을 물려줄까?”

라틸이 묻자, 단백은 조심스레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비밀이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말해보게.”

“그게…… 자리폴시 공주님에 대해 아십니까, 폐하?”

젠장. 그 자리폴시. 대체 이 이름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지? 가까스로 공주의 의구심을 풀어 떠나보낸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어쨌든 모른 척할 수야 없었다. 그녀가 몇 번이나 타리움 궁전에 방문한 일도 비밀이 아니었으니.


“모를 리가. 두 번이나 국혼을 신청하다가, 안 되니 연애결혼으로 우리 황실에 들어오려 했지. 하지만 내 하렘 구경을 한번 하고 나더니,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냥 떠나 버렸다네.”

“아…….”

과한 정보가 주어지자 단백이 입을 벌렸다. 단백은 그런 이야기까진 몰랐다.


“덕분에 공주와 연애를 할 둥 말 둥 하던 내 이복동생이 아주 제대로 차였지.”

“그, 그렇군요.”

“그런데 그 공주가 왜?”

순진한 단백은 얼굴이 벌게져서 중얼거렸다.


“공주께서 형룡술의 성기사단장인 건 아십니까?”

“아네.”

단백이 마른침을 삼키자, 그걸 기점으로 다시 그녀의 얼굴이 어둡게 돌변했다.


“공주님이 실종되셨습니다.”

“정말인가?”

“네. 밑의 성기사 스물여덟 명이 사망했고, 공주님의 부관 겸 시녀였던 피아르 경만이 생존했지만, 그 기사도 지금은 의식이 없습니다.”

라틸은 정말로 놀랐다. 아니, 멀쩡히 궁전을 떠난 사람들이 왜?


“어쩌다가?”

“모르겠습니다. 그조차도 피아르 경이 말을 타고 근처 신전에 도착해서, 의식을 잃기 전까지 가까스로 이야기해 준 덕에 알게 된 거니까요.”

“어디에서?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고?”

“예. 피아르 경이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은 ‘부적이 가짜였다’는 거였습니다.”

라틸은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놀랐다.

라틸은 타시르에게 명령해 공주가 가진 대신관의 부적을 바꿔치기했다. 나중에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공주가 급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돌려주지 못했다.

그런데 공주가 실종되고, 부적이 바꿔치기 되었단 걸 눈치챘다면…….


“몬스터들과 싸운 건가?”

“모르겠습니다. 이제 조사를 해야겠지요.”

단백은 라틸의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저, 실은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폐하.”

“공주가 실종되어서?”

“네. 공주님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이곳이니까요.”

라틸은 속으로 욕이 나올 뻔했다. 가까스로 의심을 풀어서 돌려보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마지막에 들른 곳이 여기 맞나? 공주가 여기서 떠날 땐 공주와 시녀 둘뿐이었는데. 스물여덟 명의 성기사는 없었어.”

“다른 곳에 들렀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공식적으로 들른 곳이 여기여서요. 여기를 조사해야 공주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라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순간 솔직하게 ‘자네들…… 진짜 사람 귀찮게 하는군.’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로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단백은 한 번 이쪽을 의심한 전적도 있으니, 어쨌건 라틸은 대외적인 로드의 이미지를 피해가야 했다.


“참으로 안타깝군. 얼른 성기사들을 데려오게. 공주 찾는 걸 내가 진짜, 후. 열심히 도와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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