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500년 전의 여우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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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화. 500년 전의 여우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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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화. 500년 전의 여우 가면
2023.07.30.
“왜 저렇게 급하게 갔을까?”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잉크병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 펜을 담그고 있는데, 이번에는 타시르가 찾아왔다.
라틸은 잉크를 빨아들여서 촉촉해진 펜을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도로 펜을 내려놓고 뚜껑을 닫아야 했다.
“무슨 일이야, 타시르?”
일단 다급한 일로 온 건 아닌 듯했다. 늘 짓고 다니는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었으니까. 게다가 꽤나 느긋한 태도다.
“전에 말씀하신 그 일요. 백화가 본 수상한 사람 말입니다.”
“아아, 그래. 알아봤어?”
“예. 전에 레안 황자님 쪽으로 식료품을 보내던 사람이었답니다. 그러니 수월하게 황자님과 거래를 했겠지요.”
“역할이 바뀌면서 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관리인을 매수하려 한 건가.”
“아마도요. 그리고 하나 더. 이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만…….”
“?”
“백화랑술 제복을 입은 성기사 하나도 그자를 계속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백화도 따로 조사를 하나 보네.”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시르가 지시를 원하는 듯 라틸 가까이 다가오더니, 라틸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가볍게 비볐다.
라틸은 멍하게 생각에 빠져 있다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람을 놀라게 해놓고서. 타시르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방금 그거 뭐야?”
“사랑이 담긴 비비적댐이었습니다.”
“이상한 행동을 하고 그래.”
“싫으십니까?”
“이상하다고 했지 싫다고는 안 했어.”
타시르가 웃으면서 라틸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뒤에 선 서넛은 황제의 책상에 걸터앉는 타시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을 굳혔다.
라틸은 타시르의 허벅지를 두드리면서 계속 생각하다가 지시를 내렸다.
“일단, 그자가 하고 싶은 행동을 계속하게 둬. 막지 말고. 하지만 뭘 하나 계속 봐둬야 해.”
“예.”
“대신 안쪽에서, 그러니까 레안 황자가 지내는 저택에 우리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한테 식재료 사이에 끼워 들어오는 수상한 물건을 모두 모아두게 해.”
“예.”
“아, 이건 내가 따로 지시해야 하는 거구나. 흑림에선 감시만 계속해.”
그걸로 보고가 끝났다 생각한 라틸은 타시르의 허벅지를 옆에서 밀어냈다.
“자, 이제 내 서류한테 자유를 좀 찾아주자고. 깔아뭉개지 마.”
타시르는 순순히 책상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바로 나가는 대신, 허리를 숙여 라틸 쪽에 얼굴을 붙이고서 말했다.
“폐하. 공주가 올 때는 마차를 타고 왔는데, 돌아갈 때는 마차는 두고 말만 타고 가버렸습니다.”
“급하게 굴더니. 급하게 갔네. 무슨 일이 있나?”
“그런 모양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라틸은 의아해하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럼 부적은?”
“도로 바꿀 틈이 없었지요.”
“!”
“일단 퍼리스 황자님 별궁과 밀로 쪽에 사람들을 보내서 기회를 엿보게 하겠습니다.”
‘이런. 진짜 부적을 가져다 두어야 완전히 그 공주가 의심을 풀 건데.’
물론 살면서 부적을 쓸 일이 많이 없으니, 바꿔치기 된 걸 오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금세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타시르 탓을 하기엔, 그 공주가 정말로 급하게 돌아가긴 했다. 아무리 대단한 암살자라고 해도 달리는 말에 탄 사람의 손수건을 꺼내 부적을 바꿔치기하긴 힘들다.
라틸은 멍하게 타시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 *
타시르가 나가자 라틸은 여전히 멍한 기분인 채로 아까 마시던 커피잔을 집었다. 그 사이에 커피는 다 식어 있었지만 괜찮았다. 식은 커피도 맛있으니까.
하지만 커피를 입에 넣기 전.
“임신한 사람들은 커피를 피합니다, 폐하.”
서넛이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라틸은 흠칫했다.
휙 고개를 돌리자, 서넛이 씩 웃더니 라틸이 든 커피잔을 가져가 옆에 놓았다.
“자꾸 커피나 술을 마시면 다들 폐하가 가짜로 임신했단 걸 알아차릴 겁니다.”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서넛이 차분하게 묻자, 라틸은 입을 뻐끔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 * *
“단장님, 단장님! 그래도 우리 둘만 가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공주는 시녀 겸 부하 성기사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중간에 마음을 바꿨다.
“그렇지?”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을 세웠다. 백화가 말해준 바에 따르면 지금 로드는 그리 위험한 상태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장 소집 가능한 단원들은?”
“서른 명 정도입니다.”
“불러.”
몇 시간 뒤. 형룡술에 속한 성기사 스물여덟 명이 곧장 공주가 기다리는 쪽으로 왔다.
공주는 그들을 데리고 백화가 알려준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공주는 백화가 알려준 동굴에 도착했다. 말끔하고 깨끗하던 복장은 헝클어졌고, 말 역시 몇 번이나 바꿔 타느라 출발할 때와 다른 낯선 말이었으나, 공주의 눈은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일을 좋아하신다니까.’
시녀는 공주의 밝은 표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공주뿐만이 아니라, 다른 성기사들 역시도 흥분된 표정이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안에 로드가 잠들어 있다고 한다. 악의 정점에 올라 있는 뱀파이어 로드가.
그런 자를 잡을 기회가 왔는데, 누구라도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공주님? 백화 경이 로드를 건드리지 말라 했잖아요. 잠들어 있다면서요.”
“건드리진 않을 거야. 그냥 좀 보려는 거지.”
“좀 무서워요.”
“하지만 보고를 하려고 해도 백화 경 말이 진짜인지 아닌진 확인을 해야 하잖아.”
“백화 경을 안 믿으세요?”
“믿지만 확인은 해야 해.”
“그게 안 믿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생각해 봐. 백화 경은 로드 위치를 알면서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어. 대적자들에게도. 사람들이 찾아다니는 걸 그냥 보기만 했다고. 어쩌면 가짜로 알려준 걸 수도 있어.”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흐뭇하게 웃고서 품 안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낸 다음, 검으로 손수건의 위쪽을 잘라 안에 넣어둔 부적을 꺼냈다.
“대신관 부적을 가져왔으니 괜찮아. 도망칠 때 급하게 쓸 수는 있겠지.”
* * *
‘밀로 공주가 밀로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타시르에게 새로운 보고를 들으며 라틸은 침대에 누웠다.
일부러 퍼리스 황자가 머무는 별궁과 밀로 쪽에서 대기했지만, 공주는 그쪽으로 오는 게 아니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고 했다.
공주 쪽은 쉬는 시간을 최소화하며 이동한 반면 이쪽은 전혀 준비된 게 없는 상태라, 흑림 쪽에서도 최대한 추적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최종 목적지까지 따라가진 못했다고.
‘대체 어딜 간다고…….’
라틸은 공주의 급한 행동을 떠올리며 혀를 차다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뭐. 어쨌든 이쪽이 범인이 아니란 걸 알았으면 그걸로 된 거지.
‘아이니 황후가 나와 사이가 나빠서 늘 나쁜 소리만 해댄단 것도 알았고. 내 주위에 뱀파이어들이 없단 것도 알았지. 자. 그럼 이제 뭘 어떻게 더 해볼래, 성기사들? 슬슬 내쪽에서 고개를 돌리지 그래?’
* * *
깊은 생각에 잠겨 잠들어서일까.
라틸이 눈을 떴을 때, 다시 도미스의 기억 속이었다.
라틸은, 정확히는 도미스는 어두컴컴한 성안에서, 그보다 한층 더 어두운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의 위쪽인가?’
이곳은 아직 랑스터 백작가인 듯했다. 그때 하녀가 도미스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걸 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진 모르겠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도미스가 미동도 하지 않고 아래만 쳐다보는 터라, 덩달아 그러고 있기를 한참.
뒤에서 돌과 신발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자기 신발로 바닥을 두드려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우 가면이 말했다.
“내 하녀랑 하인들 좀 그만 죽이시지요?”
‘게스타가 아닌’ 여우 가면이었다.
‘그때 하녀 사건 이후로 여러 명이 죽었나 보네. 그럼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인가?’
도미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난 누구도 죽이지 않았는데.”
여우 가면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문틀에 기대더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나열했다.
“도망치다가 계단을 구른 사람. 달아나다가 난간에서 떨어진 사람. 공포심을 못 이기고 자살한 사람.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라고 동료에게 살해된 사람.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
‘와. 몇 명이 죽은 거야 대체?’
“다 애매하게 죽이시긴 했네요. 직접 손을 안 쓰고.”
여우 가면이 빈정거렸다.
라틸은 도미스가 가지고 있던 그 명단을 떠올렸다. 거기에 도미스가 죽일 사람 표시를 해두는 것 같았는데. 하나하나 다 죽이고 있는 걸까.
혀를 내두르다가, 이번에는 다시 여우 가면 쪽으로 흥미가 돌아갔다.
게스타는 사람이지. 그러면 여우 가면도 사람인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는 가면, 뭐 이런 건가?
꼭 피로 이어진 후손이 아니라도, 저 가면은 나중에 다른 사람이 물려받고 그러나?
하지만 여우 가면에 흥미를 가진 라틸과 달리, 도미스 쪽은 여우 가면에 아무 흥미도 없어 보였다.
‘하긴. 여기 여우 가면은 도미스의 후궁은 아닐 테니까.’
도미스가 저 여우 가면에 대해 알아내지 않으면, 라틸도 저 여우 가면에 대해 알아낼 방도가 없다.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죽었을 때도 한소리라도 하긴 했을까?”
도미스는 오히려 자신이 이곳 하녀와 하인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그때도 여우 가면이 누군가를 질책하기는 했는지, 그게 더 궁금해 보였다.
칼라인을 통해 손을 잡게 되었고 여기서 머물고 있긴 하지만, 라틸은 도미스가 저 여우 가면에게 일말의 호감은 커녕 신뢰도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럼요. 너무나 슬펐답니다.”
여우 가면이 한 손을 자기 가슴 위에 올리면서 연극하듯 말하자, 도미스는 차갑게 웃고서 돌아섰다.
‘지금 여우 가면이랑 게스타는 성격이 전혀 다르네?’
그런데 도미스가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였다.
“그런데 로드?”
멀지 않은 곳에서 여우 가면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드는 안에 누구를 데리고 다니는 겁니까?”
도미스는 인상을 찡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지?”
라틸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순간 ‘설마?’ 싶어 기겁했다. 혹시 ‘안에 들어 있는 누구’가 자신을 말하는 걸까?
여우 가면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도미스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어딘가를 건드리려는 듯했으나, 도미스는 냉정하게 그 손을 쳐버렸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칼날 같은 목소리를 듣자, 여우 가면은 슬픈 척 양 입술 끝을 내리면서 손을 회수했다.
“너무하시네요. 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으시네.”
그 후로도 도미스와 여우 가면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지만, 라틸은 그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여우 가면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라틸은 여우 가면의 눈동자가 도미스를 지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확실했다.
라틸은 소름이 돋았다.
‘뭐야. 쟤…… 날 알아보고 있어?’